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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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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6일 <뉴미디어론> 세미나를 하면서 마노비치의 "이런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라는 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글이다. 전체로서의 미디어의 역사 속에서, 다른 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 뉴미디어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이런 발제문을 쓰게 된 배경에는 학제(학문, 신문방송학과는 뉴미디어를 어떻게 생각할까? 정치학과는? 미학과는?)간 서로 다른 뉴미디어에 대한 정의가 있는데 이런 정의들은 모두 뉴미디어에서 어떤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노비치의 글 또한 어떤 입장 중 하나에 서서 '어떤 하나의 이데아(idea)로서의 뉴미디어'를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산업에서 보아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웹에서는 웹에서 정의한 뉴미디어가 있고, IPTV는 IPTV가 정의한 뉴미디어가 있다. 그리고 방송사는 방송사가 정의하는 뉴미디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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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의 언어> 중 “이런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 비판


이런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

레프 마노비치는 <뉴미디어의 언어>에서 뉴미디어와 과거의 미디어의 핵심적인 차이를 수적 재현(Numerical Representation)과 이에 근거한 모듈화, 자동화, 가변성, 부호 변환 등의 특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뉴미디어와 옛 미디어의 차이라고 믿는 정의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①뉴미디어는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전환된 것이고, 디지털 방식으로 기호화된 미디어는 분절적이라는 정의부터 ②컴퓨터라는 하나의 기계에서 디스플레이 되는 멀티미디어라는 정의, ③순차적(linear) 접근이 아닌 무작위적이고 동시적(non-linear) 접근이 가능하다는 정의, ④디지털화 정보손실(디지털화된 미디어에 담긴 정보의 유한성)을 초래한다는 정의, ⑤디지털화된 미디어의 훼손 없는 무한복사 가능하다는 정의, ⑥뉴미디어는 미디어가 객체와 이용자가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정의 등은 뉴미디어에 대한 잘못된 신화이다. 왜냐하면 전통 미디어의 양식에서도 이런 특성들을 찾을 수 있고, 따라서 “핵심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디지털 재현이 한정된 숫자의 샘플들로 구성된다”는 분절성이 뉴미디어의 특성이다라는 정의는 이미 영화가 사건을 기준으로 1초당 24프레임으로 샘플 추출한 것과 원리상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영화가 우리를 뉴미디어에 맞게 준비시켜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뉴미디어는 원리적으로 영화가 이룩한 “이러한 이미 단절적인 재현을 계량화하는 것”뿐이고, 영화가 “연속적인 것에서 단절적인 것으로의, 훨씬 더 어려운 개념적 전환”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앞서 이야기한 6가지의 “흔히 뉴미디어와 옛 미디어의 차이라고 믿고 있는 정의들”이 전통 미디어 역사 속에서 형식이나, 또는 기본적인 원리(내용)가 동일한 사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런 이유로 인해 “이런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what new media is not)”라고 말한다. 결국 이런 특성들을 제외시키고 나면 그에겐 “수적 재현(Numerical Representation)“만이 뉴미디어의 핵심원리가 된다.


마노비치 비판에 대한 논리적 근거 검토

그런데 마노비치가 분절성, 상호작용성과 같은 개념들을 뉴미디어의 원리에서 배제하는 논리의 기반에는 반증주의(反證主義)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증주의는 “참인 관찰 언명의 어느 정도 유용성을 갖긴 하지만, 관찰 언명에 근거한 논리적 연역을 통해 보편 법칙이나 이론을 지지할 수 없다. 그 반면에 전제로서의 단칭 관찰 언명을 근거로 하여, 논리적 연역에 의해 보편 법칙과 이론이 거짓임을 밝히는 것이 가능하다”는 귀납적 비약(歸納的 飛躍)을 통해 성립된 과학이론(가설)이 성립되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기 위해 제안되었다.

마노비치는 “뉴미디어는 분절적이다”라는 명제(주장)에 대한 진위를 따질 때 반증주의자들이 ”보편 언명이 거짓이라는 것을 적절한 단칭 언명에서 연역해낼 수는 있다”는 논점을 철저히 활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다만 (과학철학에서의) 반증주의자들은 과학의 전제를 다루고 있기에 ‘반증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뿐인데, 마노비치는 미디어의 역사 안에서 보편 언명에 대한 적절한 반증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반증된 명제를 뉴미디어의 정의에서 배제한다.

반증주의자들이 “검지 않은 까마귀 한 마리가 x라는 장소에서 t라는 시간에 관찰되었다”라는 전제를 통해 “모든 까마귀가 검은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추론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노비치는 “전통 미디어인 영화는 시간을 1초당 24프레임으로 샘플 추출한 분절적인 것이다”라는 반증사례를 통해 “뉴미디어는 분절적이다”라는 명제를 기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뉴미디어는 수적 재현이다”라는 명제를 이런 방식을 통해 비판할 수 있지않을까? 이런 비판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전통 미디어가 “x라는 장소에서 t라는 시간”에 “수적 재현”이라는 이런 양식을 띄었음을 입증하면 된다.


미디어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수적 재현 양식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19세기 사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수학 특히 기하학과 관련 없이 미술을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400년부터 1250년 사이에는 열성적인 교회의 신부들에 의해 고대의 전통이 남아있던 모든 예술 작품들을 파괴되었고, 미술과 수학(물리학)에 대한 위대한 서양의 전통도 함께 파괴되었지만 말이다.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에서 가르치던 유클리드(BC 330? ~ BC 275?)는 <원론(Elements)>에서 공간에 대한 연구를 기하학이라는 학문분야로 성립시켰다. 그는 정신적 추상에 기초해 공간을 직선들의 상상적인 그물망에 의해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체계화하였다. 또 자연은 이러한 기하학적 접근을 확증시켜주었다.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가 직선이라는 명제는 유클리드의 공간이 단일하고, 연속적이면서 균등한 곳임을 함축한다.

또 피타고라스(BC 582~BC 496)와 그에 의해 창설된 학파는 수학을 통해 정화와 불멸이라는 신비적인 종교의 문제에 도달하고자 했고, 수학적 사유가 인간을 개별적인 사물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질서 있는 세계, 즉 수의 세계로 이끈다고 생각하였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만물은 수이다’라는 주장은 모양과 크기를 갖는 만물의 기초에는 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수로부터 기하로, 더 나아가 실재의 구조로 나아갔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를 이해함으로써 그들은 ‘형상(form)’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의 영향 속에서 고대인들은 수를 변덕스럽게 변화하고 있는 만물의 근저에 있는 고정불변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기하학적 공간과 수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플라톤(BC 428/427 ~ BC 348/347)이 “기하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는 문구를 자신의 아카데미 정문에 새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근원을 수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를 수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스의 미술가들은 완전성에 대한 추구를 통해 이러한 이상을 성취하였다. 우리가 쓰는 “합리적(rational)”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이성, 논리 그리고 인과성이라는 하부적인 뜻과 함께 비례라는 뜻을 의미하는 라틴어 ‘ratio’로 소급된다. 고대 건축 양식에서 발견한 직사각형의 이상적인 비례는 각면이 5:8의 비율이다. 그리스 신전들은 이 공식을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이러한 완전성의 모델이 지금 “황금비”로 알려진 것이다.

영화가 1초당 24개의 프레임으로 샘플을 추출하여 시간을 근거로 한 분절성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근원을 수라고 생각하면서 세계를 수적 질서로 해석하고, 또 자신들이 만들어낸 미적(미디어) 양식을 수적 비율을 통해 재현하였다. 이들의 접근이 뉴미디어의 수적 재현보다 더 급진적인 접근이고, 인류문명사에서 보면 “더 어려운 개념적 전환”이었다.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비너스

파르테논 신전은 BC 447년 기공하여 BC 438년에 완성되었다. 익티노스가 설계한 파르테논 신전은 각 부분이 정확하게 기하학적인 비율로 되어 있다. 신전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외부 윤곽은 완벽한 황금 사각형이다. 신전 기둥의 윗부분은 전체 높이를 황금 분할하고 있다. 왼쪽에서 네 번째 기둥은 가로 길이를 1 : 1.618로 황금 분할하고, 다섯 번째 기둥은 가로 길이를 1.618 :1로 황금 분할한다. 또 제일 아래 기단의 가로를 한 변으로 하고 기둥의 높이를 또 한 변으로 하는 직사각형은 황금사각형 두 개를 붙여 놓은 것과 같다.

그리스 말기에 만들어진 비너스(BC 2C ~ BC 1C초) 상에서 황금비로 이루어진 수적 재현의 문제를 살펴보면 배꼽을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가 1:1.618이고, 상반신만 놓고 보면 머리끝에서 목까지, 목에서 배꼽까지의 길이의 비도 그렇다. 또 하반신에서는 발끝부터 무릎까지, 무릎부터 배꼽까지 길이의 비가 1:1.618이다.

황금비에 대해 그리스 예술가들은 완전비례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시각예술에서는 이러한 특정한 비례가 보편적으로 인정받아 ‘카논’이라고 불리었다. 15세기의 유명한 수학자 파치올리(Luca Pacioli)는 이것을 ‘신성비례’라고, 17세기 초 케플러(Johannes Kepler)는 ‘귀중한 보석’이라고 불렀고 ‘황금비’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세기 때부터이다. 이때 페히너(Gustav Theodor Fechner) 같은 사람은 심리학적 방법을 통해서 황금비에 관한 실험을 행했다. 미를 비례나 조화로 보려는 견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고대 로마에서 꽃피고, 중세시대의 긴 침잠기를 거쳐 르네상스 이후 찬란하게 부활하여 지금도 미적 기준으로 작용한다.

꽃다발 만드는 법에 적용된 황금비율

<그림. 꽃다발 만드는 법에 적용된 황금비율>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perspective)이 발견되었다. 원근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그리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다. 시선의 법칙에 충실한 원근법은 중세 회화에서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동시에 드러내는 비현실적 공간을 배제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회화를 학예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고, 과학적인 탐구정신을 기반으로 대상을 탐구하고, 회화를 수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원근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벽, 마루, 천정에서 멀어지는 선들은 깊이를 나타내면서 그리스도의 머리 바로 위 한 점에 모아지도록 그렸다. 이 소점은 화면에서의 강조점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면서 동시에 화면 전체를 통일된 구도 속에서 파악하도록 한다.

16세기 원근법은 알프스를 넘어 북으로 퍼져 많은 미술가와 이론가들에 의해 발전되고 정교해 진다. 독일의 뒤러는 <측정법>(1525), <인체비례론>(1528) 등을 통해 원근법이론을 한다.

뒤러, <원근법 연구>

1525년 뒤러의 목판화 <원근법 연구>를 보면 비스듬히 놓여있는 류트의 손잡이 쪽에서 보면 화면에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연구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화가와 사물 사이엔 한 장의 투시화면을 세워 화면을 통해 오는 시선을 따라 화면에서 절단되는 단면을 그리면 정확한 화상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화면에서의 사물의 형상을 정하기 위하여 화가의 눈과 사물을 잇는 선이 화면 위치에서 만나는 점을 찾아내고 있다.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배운 미술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 원근법에 매료되어 있었다.

회화와 수학을 체계적으로 연결시킨 최초의 인물인 레오나르도는 “수학의 특성 중에서 증명의 확실성이야말로 탐구자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기 때문에, 원근법은 인간의 모든 지식체계와 학설 중에서 으뜸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예술(미디어) 형식에서 수적 재현의 문제는 음악에서도 발견된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은 음악에 하나의 정수비가 존재하면, 그 비율에 따라 각 음절들은 조화로운 음정을 이루기 위해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런 예를 통해 ‘만물은 수이다’라는 개념에 대한 개념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노비치가 뉴미디어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쓴 것처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많은 원칙들이 뉴미디어에만 유일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미디어 기술에도 역시 유효”했듯이 수적 재현의 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예들을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위에서 보인 예들이 부족하다면 마노비치가 “상호작용성의 신화”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문장을 인용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모든 고적적인 그리고 심지어 어느 정도 현대적인 예술작품들도 여러 가지 방식에서 ‘상호작용적’이다. 문학적 서사에서 생략, 시각예술에서 대상의 세부묘사의 생략, 그리고 또 그외의 재현적 ‘축도’ 등은 사용자가 잃어버린 정보를 채워 넣도록 요구한다. 연극이나 회화 역시 관람자의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연출이나 구성에 의존하며, 관람자가 디스플레이의 여러 부분들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조각과 건축에서 공간적 구조물을 경험하려면 관람자 자신이 직접 몸을 움직이며 돌아다녀야 한다.”

현재 존재하는 조각과 건축은 수학적 비례와 균제, 건축공학의 산물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미디어의 수적 재현은 고대 그리스 이래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문자 이후 가장 오래된 미디어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뉴미디어 개념에 대한 접근

이렇게 비판했을 때, 모든 뉴미디어에 대한 정의를 기각하고 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 ‘뉴미디어란 무엇인가?’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눈만 껌벅대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는 방식으로 <뉴미디어론 강의를 시작하며>에서 인용했던 맑스(K. Marx)의 <정치경제학 비판서문>과 나의 제안을 다시 ‘읽기로’ 하겠다.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수 많은 규정들의 총괄, 즉 잡다한 것의 통일이기 때문에 구체적이다. 따라서 사유 속에서 구체적인 것은, 비록 그것이 현실의 출발점이고 따라서 직관과 표상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총괄의 과정, 결과로서 나타나는 출발점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구체에서 추상으로, 또 다시 추상에서 구체로’의 사고의 운동과정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뉴미디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이런 과정을 거치자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리는 뉴미디어라는 어떤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에 대한 정의를 역사적 사례들과의 대조를 통해 완전하게 새로운 특성의 발견을 통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뉴미디어는 전 미디어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거나 발명되었던, 그리고 지금도 새롭게 발견되고 발명되는 것들 사이의 관계, 그 관계 속에서 어떤 특정한 형태(특성)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강해짐으로 전체가 변형되고,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어떤 것으로 ‘가정’하면서 이해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이 ‘어떤 것’을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고 싶다.)

만일 뉴미디어의 원리가 0과 1로 이루어진 수적 재현의 형식이 맞다 하더라도 이 재현의 형식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명될 수 있다. 앞에서 마노비치가 비판했던 6가지의 개념들을 생각하지 않고 뉴미디어를 그려낼 수 있을까? 우리가 이것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이런 개념들을 다시 가지고 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뉴미디어는 이러한 ‘잡다한 것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구체적인 층위에서 차이적/미분적(differential) 관계가 개체화되는 것을 다루기 위해 ‘강도(intensity)’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미분적인 관계는 강도적인 양을 통해서 개체적 차이로 구체화(분화)된다. 예를 들면 유전자는 뉴클레오티드들의 이웃관계(미분적 관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는데, 이러한 관계는 수정란 표면에 새겨지는 힘의 강도들을 통해 상이한 기관들로 분화된다. 이처럼 유기체는 차이적 관계가 작동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관계의 차이에 따라 다른 개체가 되는 것이다. 미디어에서도 이웃항과의 관계에 따라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동일한 어떤 것이 이웃과의 관계에 따라 뉴미디어가 될 수도 전통미디어가 될 수도 있다.

알뛰세르는 헤겔적인 ‘총체성’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를 사고하기 위해 ‘중층적 결정(overdetermin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프로이드는 이 용어를 수많은 꿈의 사유들이 단일한 이미지로 응축(condensation)되는, 또는 특별히 강력한 사유로부터 정신심리학적 에너지가 외관상 사소한 이미지로 대체(displacement)되는 과정에서 특권적 지위를 얻은 이미지로 꿈의 사유들이 표상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알뛰세르가 프로이드에 기대 이와 똑 같은 개념을 사용한 이유는, 사회구성체의 각 구성요소 내의 모순이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 위에 미치는 효과들을 묘사하여, 주어진 역사적 순간에 지배 내 구조에 있는 모순들의 지배와 종속, 적대성과 비적대성을 규정하기 위해서였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모순 A의 중층적 결정이란 그 복합적 전체 내에서 있는 모순 A 이외의 다른 모순들이 모순 A에 반영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사회과학에 있어 그것을 달리 말하면 모순 A의 불균등 발전이다.)

우리는 ‘중층결정’된, 또는 이웃관계들의 강도들을 ‘가족유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를 통해 ‘전체로서의 뉴미디어’에 접근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다음 시간부터 강의할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에서 다루는 문제이다. (본질주의적 접근이 아닌 관계적 접근을 시도한다.)


참고문헌

1. 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생각의 나무(2004)

뉴미디어의 언어 - 10점
레프 마노비치 지음, 서정신 옮김/생각의나무
2. 앨런 차머스, <현대의 과학철학>, 서광사(1985)
현대의 과학철학 - 10점
앨런 차머스 지음, 신일철 외 옮김/서광사

3. 강태희 외, <미술, 진리, 과학>, 재원(1996)
미술 진리 과학 - 10점
강태희 외 지음/재원

4. 레오나드 쉴레인, <미술과 물리의 만남>, 도서출판 국제(1995)
미술과 물리의 만남 1 - 10점
레오나드 쉴레인 지음, 김진엽 옮김/국제
5. 사무엘 E.스텀프, 서양철학사, 종로서적(1983)
서양철학사 - 10점
사무엘 E.스텀프 지음, 이광래 옮김/종로서적

6. 루이 알뛰세르, <자본론을 읽는다>, 두레(1991)
자본론을 읽는다 - 10점
루이 알튀세르 외 지음, 김진엽 옮김/두레
2009/03/16 20:00 2009/03/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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