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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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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7일 <뉴미디어론> 세미나를 시작했다. 세미나에 참석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4명이다. 오리엔테이션 형식으로 어떤 것을 공부할지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뉴미디어론 세미나를 시작하며>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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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개요

지금까지 발전되어 왔던 각종 미디어 형식들이 디지털화되면서 하나의 형식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미디어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콘텐츠 간의 결합(융합)이 일어나고 있다. 디지털화에 의해 새롭게 가능해진 콘텐츠의 전달방식을 뉴미디어라 한다.

이런 뉴미디어 기반에는 기술이 있다. 하지만 본 세미나의 목적은 뉴미디어에 필요한 구체적 기술에 대한 논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러한 기술이 발달하게 된 사회, 경제적 동인과 이런 기술의 쓰임새(용법, 가능성), 용법에 따른 사회, 문화적 변화들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기술 자체가 사회에 존재함에 따라 기술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특정 사회세력들에게는 전략적인 것들이 된다. 기술의 쓰임새가 서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식(기술)과 자본, 지식과 계급/계층들이 결합되고 흩어진다.

따라서 뉴미디어에 대한 하나의 이론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러 담론간의 경쟁이 존재하게 된다. 경쟁하는 담론들이 서로의 진리치를 주장하며 수많은 사회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아직까지는) 여전히 유동적이며, 비결정적인 ‘뉴미디어’에 대한 논의는 이런 현실에 대한 인식 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빠른 변화와 유동성에 의해 고정된 이론이 불가능하다면 변화의 과정, 변화 속에 있는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경제학, 사회학, 철학, (미디어에 대한) 역사학 등에서 발전한 개념을 통해 뉴미디어를 읽을 것이다. 어떤 때는 문자 이전의 시대로, 또 어떤 때는 르네상스나 인쇄술이 발견된 시대로, 결국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닐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뉴미디어가 품고 있는 무한한 잠재성에서 가능성을 추출해내는 방법을, 또 그 가능성을 촉발시켜 현실화 시킬 수 있는 힘들에 대해 이야기 할 예정이다. 이 강의를 통해 우리는 뉴미디어의 지도를 만드는 방법, 어떤 이론을 새우는 도구상자를 갖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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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론 세미나를 시작하며

미디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세미나를 시작하고자 한다. 미디어는 우리말로 “매체(媒體)”라고 번역된다. 매체는 “매개체(媒介體)”라고 할 수도 있다. 매(媒)는 “結緣(결연)을 꾀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개(介)는 “사람이 사이에 끼어 들어 일을 처리한다”는 의미로 “끼다”의 뜻으로, 체(體)는 “형상(形狀), 근본(根本), 격식” 등의 의미를 갖는다. 체(體)에서 음(音)을 나타내는 풍(豊)은 “신에게 바치는 많은 물건을 수북이 담은 것”을 의미하는데 뜻을 나타내는 뼈(骨)과 함께 쓰이면서 여기서는 “여러 가지 갖추어져 있음”을 뜻한다. 체(體)는 목, 두 손, 두 발 등의 여러 가지가 갖추어진 몸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매체, 미디어는 “사람들 사이를 연결시켜주기 위해 끼어 있는 여러 가지 것들(격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국어사전에서 매체는 “어떤 작용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하는 물체”라고 정의한다. 사실 사람 자체가 미디어이기도 하다. 비근한 예로 명령을 전하는 사람을 전령(傳令)이라고 하며 이들은 역사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또 우리 자신도 미디어이다. 우리는 구어, 몸짓, 눈빛 등을 통해 어떤 내용을 다른 이에게 전한다.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주인공인 메멘토(Memento)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전직 보험 수사관인 레너드(Guy Edward Pearce)는 자기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과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것, 그리고 범인은 존 G 라는 것이 전부이다. 중요한 단서까지도 쉽게 잊고 마는 레너드는 자기 가정을 파탄 낸 범인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메모와 문신을 사용한다. 묵고 있는 호텔, 갔던 장소, 만나는 사람과 그에 대한 정보를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남기고, 항상 메모를 해두며, 심지어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하며 기억을 더듬는다. 이 영화를 보면 우리의 몸이 노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나의 말을 여러분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공기(의 파동)도 미디어에 넣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 정보 이야기를 했다. 정보는 information이다. form은 어떤 꼴, 형태(shape), 외관 또는 내용과 대비한 형식을 말한다. 어떤 내용을 특수한 표현 형식에 맞춰 넣는 것(과정)이 formation이라면, 넣어진 상태가 information이 될 것이다. formation의 뜻은 형성, 구성, 편성, 조립, 구조, 형성물이고,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결과가 아닌 하나의 과정을 상정한다는 점이다. 또 형식으로서의 form에 대한 내용은 content가 된다. 정보는 내용(content)과 특정한 형식(from)에 맞춰진 결과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미디어, 매체는 content를 전달하는 수단들로 한정한다.

그런데 content가 어떤 form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같은 내용일지라도 다른 미디어라 할 수 있다. 미디어에 있어 문제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식이 중요한 것이다. 이곳에서 뉴미디어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information/content의 전달 형식이란 의미로 말이다.

문명화된 우리는 정보화된 형태로의 세계를 본다. 이것은 천동설과 지동설의 이야기를 통해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서,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서 그리고 현대과학의 근거를 연구한 많은 철학자들 이야기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눈은 “날 것”이 아니며, 우리는 어떤 안경을 쓰고 있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원근법은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이다. (서양미술에서) 이전의 그림을 보면 중요한 것이 커지고 덜 중요한 것은 작거나 흐릿하게 있었다. 동양미술에서는 원근법이나 배경조차 없는 양식(정형화된 미술형식)이 발전하였다.

현대 광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우리는 이전에는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던 세계, 미생물의 세계를 관찰하기도 하고,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사진술은 우리가 흘려 보내던 것들 잡아 놓고 그 미세한 차이를 알 수 있게도 한다. 시간 차이를 둔 항공촬영은 불법 건축물을 잡아내고, 지도를 제작하는데 이용된다. 동일한 영화를 여러 번 본 사람은 볼 때마다 다른 것들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반복적인 관람은 스토리가 아닌 디테일에까지 사람의 주의가 미치게 하는 것이다. 그림, 사진, 영화와 같이 어떤 형식 속에 사물, 사건, 시간의 흐름이 포착(정보화)되면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세계가 드러난다.

미디어는 우선 형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형식에 내용을 쑤셔(또는 구겨) 넣으면서 많은 내용이 없어지기도 하고, 또는 사실과 다르게 과장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실재하는 세계와 달라지는 내용에 대한 관심을 갖기 이전에 먼저 하나의 형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몸을 기반으로 하는 미디어, 구어(口語)와 승리를 알리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다리 등이 있지만, 우리는 미디어의 형식을 이루는 결정적 요소를 기술(technique)이라고 부르려 한다. 우리는 이미 생물학적 몸에 기반한 미디어까지도 기술이라 부르는데 어색해하지 않다. 말하는 기술(話術)이 있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 수사학, 논리학의 발전은 이런 기술의 발전인 것이다. 지금도 달리기 선수들은 빠르게 다리를 앞뒤로 움직여 땅을 박차고 정해진 시간 내에 많은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기술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미디어를 기술 기반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형식이라고 한다면 잘못된 말일까? 또 만일 이런 기술이 인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즉 인간의 근본적 한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전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함께 공부하며 다시 인간(여기에서의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 다른 것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육체와 이에 깃든 정신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던 기술과 인간이 결합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뉴미디어를 새롭게 나타난 내용(content)의 전달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정보의 존재방식(또는 정보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뉴미디어에 대해 함께 토론하기 위해 나는 먼저 “내용(content) 없는 뉴미디어의 형식에 집중하자”고 제안한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며 형식 없는 내용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미 ‘뉴미디어 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에 이제 그것의 정확한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이런 노력, 사고를 통해 추상화(개념화)한 후 다시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는 종합의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맑스(K. Marx)는 <정치경제학 비판서문>에서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수많은 규정들의 총괄, 즉 잡다한 것의 통일이기 때문에 구체적이다. 따라서 사유 속에서 구체적인 것은, 비록 그것이 현실의 출발점이고 따라서 직관과 표상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총괄의 과정, 결과로서 나타나는 출발점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구체에서 추상으로, 또 다시 추상에서 구체로’의 사고의 운동과정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뉴미디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이런 과정을 거치자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미디어2.0>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물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하겠다. 그래서 함께 작업하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길 바란다. 마샬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1960년 <기술, 미디어, 문화>라는 글에서 “지식을 실행하고 교환하는 것은 지식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사람들 간의 유대를 강화하여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지식의 실행과 교환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높여준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전자시대에서는 그 동안의 어떤 시대보다도 풍성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생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 또한 이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미디어2.0>은 선과 악 같은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서, 또는 어떤 집단의 승리나 패배, 성공과 실패라는 도식적 이해를 넘기 위해서 쓰여졌다. 전체론(holism)적 시각에서 뉴미디어 현상에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을 위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가족유사성’ 개념과 부르디외(Bourdieu)의 ‘장(場) 이론’에 의지했던 것이다. 또 푸코(Foucault)의 전략, 들뢰즈(Deleuze)의 계열화 등에 의존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어떤 회사에 매인 생활인으로서의 존재 기반에 의해 ‘극한까지 사고’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책을 낸 후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았다.

 “첫째는 새로운 지평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철학이나 사회학으로부터 도용한 개념들이 어떤 방식으로 너의 분석에 적용되고 있는지가 확연하질 않았다. 미디어2.0은 이러 이러하게 규정될 수 있다고 선언적으로 주장한 뒤, 실제 분석은 다른 방법론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왜 가족유사성이나 장이라는 낯선 개념들에 호소해야 하는지가 후속하는 분석들 속에서 설명되고 있질 못하다.

둘째로는 두 가지 언어의 공존이 나를 좀 난감하게 했다. 한편에서는 현상을 기술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 올 세상을 규정하려는, 달리 말해 기술적 언어(이러 이러하다) 와 규정적 언어(이러 이러해야 한다)가 제1장부터 공존하다 보니 작업의 성격이 모호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1장에서 너는 풍경을 말한다고 하지만, 아주 빈번히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하다 보니, 2장 과 3장이 논의의 심화가 아니라 반복으로 비춰진다.”

이번 만남과 배움(學)를 통해 우리가 친구(朋)가 되기를 원한다. <논어>는 “學而時習之, 不亦悅乎?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로 시작한다. 이에 대해 다산(茶山)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학은 가르침을 받음이다. 습은 학업을 익힘이다. 시습은 그때그때 그것을 익힘이다. 열은 마음이 유쾌함이다. 학은 아는(知)의 방법이고 습은 실천하는(行) 방법이다.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것은 지와 행을 함께 해나가는 것이다. 후세의 학문은 배우기만하고 익히지 않으니. 그래서 기뻐할 만한 것이 없다. 붕은 도를 함께하는 자이다. 락은 깊이 기뻐함이다.” 함께 학습(學習)을 시작하며 하고 싶은 말이다.

이제 함께 읽고 토론할 책들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뉴미디어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긴 우회로를 함께 걷기로 결심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이야기 하며 오랜 동안 걷고, 그러면서 함께 기쁨과 슬픔, 또는 좌절감을 맛보아야 하며, 그래서 정서적 동질감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겨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함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1.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1936
   기술적 복제, 장, 역사성
2. 테오도르 아도르노, M.호르크하이머, <문화산업: 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
   (<계몽의 변증법> 내 게재), 1947
    기술지대, 문화산업, 경제
3.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1964
    인간의 확장, 인간의 축소
    지각 : Fold(pli), Micro-perception, Virtuality(virtualite), Becoming
4. 피에르 부르디외, <장들의 몇가지 특성>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내 게재)
    역사성, 장(Camp), 물질성
5. 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내 제1장 뉴미디어란 무엇인가?
6. 김상환,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중 일부
7. 최진호, <흐름의 공간과 분자적 미디어>
    (<부커진 R vol2,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다시 사회구성체론으로> 내)
8. 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1983
   마술적 그림, 텍스트적 계몽, 기술에 의한 새로운 마술(탈맥락화)
9. 루이 알뛰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내 게재)
10.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중 일부 (<193, 194 기계>)
11.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중 제4장 성적 욕망의 가치
12. 박종진, <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2009/03/07 09:00 2009/03/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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