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고 있다. "어떻게 해서 평등이 아메리카인에게 인간의 무한한 완전가능성이란 관념을 갖게 하는가"에 이런 귀절이 나온다.
공동체를 이루는 시민이 신분과 직업과 출생에 따라서 각 계급으로 나누어질 때, 그리고 모든 사람이 우연한 일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을 억지로 따라야 할 때는,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서 인간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됨으로써 아무도 더이상 자기 운명을 피할 수 없는 법칙에 저항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귀족사회의 주민들이라고 해서 인간의 자기향상의 능력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들은 그것을 무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은 '개선'은 구상할 수 있지만 '변화'는 구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의 사회상태가 개선되리라고는 생각하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성은 진보하며 또 앞으로도 진보할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리 그 진보에는 어떤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p.595)기업도 마찮가지다. 구성원이 직급이나 직위, 직능(맡은 일), 나이(혈연,지연,학연이나 성별과 같은 자연적 요소 등)에 따라서 각 계급으로 나누어질 때 무력감을 느낀다. 무력감이 한계이다. 여기서 계급은 제도적으로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고, 다분히 조직문화와 관련있다. 문화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금기(taboo)이다. (계급이 아닌 능력으로만 하자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적 논리처럼 보인다. 능력 보다는 어떤 사람의 덕arete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사람에게나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덕이 있다고 믿는다. 윤리적 신념이다.) 회사에서 전략이나 실행계획을 짜 연초의 사업목표보다 10% 더 성과를 내면 '개선'이고, 20%를 넘으면 '혁신'이라고 말한다. '개선'은 있어도 '혁신'은 없다. 그리고 '혁신'이 있다해도 '변화'는 없다. 20% 초과라는 혁신은 운에 따르는 것에 가깝다고 다수가 생각한다. 운은 우연에 따르는 것, 운명 같은 것이다. 때 아닌 "복"타령을 하기도 한다. 개선, 혁신, 변화가 없다고 밑에 직원을 탓할 이유가 없다. 계급적이고 위계적인 구조가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신분, 직업, 출생과 상관 없이 1인 1표라는 형식적 평등에 기초한다. 토크빌의 말처럼 자기 능력의 무한성에 대한 긍정에서 변화가 온다는데 동의한다면 개선해라, 혁신해라, 변화해라 말하면서 아랫 사람을 쪼을 일이 아니다. 윗 사람 스스로가 온존하는 위계적 구조를 흔들어야 한다. 스스로 내려앉지 못하면서 누구에게 내려앉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가공(架空)할 공력이다. 윗분들의 경험과 지혜를 존중하지만 변화가 어렵다면 그 길 가운데 그분들이 떡 버티고 말로만 변화를 부르짖기 때문이다. 변화는 말에서 오지않고 행동에서, 존중하고 들어주는 관용적 태도에서 온다. (이런 분의 또 다른 가공할 능력 중 하나는 바로 아래 문단에서 말한 '내 멋대로 꼴불견'을 높이 사면서 칭찬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이 '가공'의 뜻 속에 들어 있으니 새겨 들으시길!) 아랫사람에게도 자기절제와 절도가 필요하고, 자기연마와 숙고 과정도 필요하다. 부족한 줄 모르고 '내 멋대로'는 꼴불견이다. 이런 친구들 보면 '관용적 태도, 존중'이란 말을 물리고 싶다. 대놓고 뭐라고 안한다. 무섭기 때문이다. 담배 피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보고도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것과 같다. (이런 면에서 비겁한다.) 이런 태도와 문화를 쉽게 만들 수 없다. 이럴 때 하는 극약처방이 있다. '어린 놈'을 아주 위에다 올려놓는 것이다. 아니면 '윗분'을 아주 아래 내려놓는 것이다. 문화적 충격요법이다. 귀족사회가 갑자기 평민들의 민주정체로 바뀌는 것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 격어보지 못해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비인간적이지 않을까! 애에게는 어린시절이 필요하다를 평범한 말에 기대어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른은 그 반대다.) 이런 생각 거의 하지는 않지만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팀원들에게 걸림돌이 아닐까? 'another brick in the world'라 불릴 나이가 된 걸까? 120까지 산다면 아직 1/3밖에 못살았는데. 어째든 함께 있는 동료들(company)이 내가 보기에는 자기 능력의 무한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 공화국의 시민이 아닌 귀족사회의 농노나 평민이다. 확신이 없는 것이 모두 '외적 요인'과 관련있다면 나도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내적 요인과도 관련있다면 나에겐 조금 다행이지만 그 친구들이 걱정이다. 못참을 정도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이다. 입이 간지럽거나, 몸이 간지럽고, 머리가 간지럽지 않다. 하지만 '간지럽히지 못하는' 나에게 다시 책임을 묻는 밤이다. 결국 무능한 것이다. 귀족사회와 민주사회에 '낀' 중간관리자의 서러움이라고 애써 자위해보지만 이것 또한 허망한 빈말이다. 마음 속 한가득 욕이 나온다. 혼자 허둥대는 것은 아닌지 ... 그래도 포근한 바람 속에 책을 읽어서 좋고 행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