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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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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뭔가를 써보려고 했었나보다. 발터 벤야민 책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책을 동시에 읽으며 얼기설기 뭔가를 쓰다 말았다. 한 버전이 아래 내용이다. 제목만은 그럴듯하다, <비판적 미디어론으로의 초대>. 그런데 정작 나는 초대를 받지 못한듯 하다.

벤야민의 경구를 몇 개 뽑아, 관심있던 아도르노, 매클루언, 귄터 그라스(가십성으로 말하면 아렌트의 첫 번째 남편이고, 벤야민의 사촌이다.), 브루디외, 플루서 등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어떤 주제나 개념을 가지고 다른 것(개념, 사람)과 연결해 보는 걸 생각을 했었다.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텔레비전 – 테크놀러지와 문화형식>도 함께 읽고 있어나 보다. 살펴보니 <몸-경험’에서 매체로, 그리고 매체에서 ‘몸-효과’로>도 이때 쓴 거다.

매스미디어인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개인매체(블로그 등)가 어떻게 연결/배치될 때,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공진화할 수 있는지 이런 관심사를 가지고 쓰던 글이다. 그리고 주변에 만연된 '기술결정론'에 대한 자기방어를 위한 목적도 있었다. POOQ과 스마트미디어렙(SMR)을 만들 때, 바탕에 깐 이론적 배경(싸움의 도구)이기도 하다. 우린 비물체적 변환(incorporeal transformation)과 다른 배치, 곧 상황을 타개할 전략을 원했다.

글의 내용과 양이 유행하는 웹의 양식과 달라 자구책(?)으로 '달기어려운' 중간 제목을 억지스럽게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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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벤야민

벤야민
벤야민과 아도르노
벤야민과 매클루언
벤아민과 군터 그라스?
벤야민과 브루디외
벤야민과 플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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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함
미세지각
시민종교, 아우라
블로그, 신화적 사고
유동적 자아매몰
흐름, 체험
미디어와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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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테크놀러지와 문화형식』을 읽으며

Television : Technology and Cultural Form (Paperback, 3 New edition) - 10점
Williams, Raymond/Routledge
한글 번역본이 있는데 절판되었다.


대중인가, 다중인가

테크놀러지와 사회제도 및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현시대의 논의에 있어서 텔레비전은 단연 독보적인 사례 p.7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는 바는 텔레비전의 수사법을 ‘흐름(flow)'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때 흐름이란 광고, TV 프로그램, 방송사 자체 홍보물 등 서로 연관성이 없는 텍스트들을 TV 시청이라는 총체적인 경험의 양식으로 한데 묶는 유동적인 전달방식을 말한다. p.10

나는 TV를 stock이라 하고 인터넷을 flow라고 했다. 이때 flow와 윌리엄스가 말한 flow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인터넷에서 flow은 TV의 중앙 집중화된 콘텐츠 제공방식에서 벗어난 다른 맥락, 다른 가지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스가 지적한 flow는 계속해서 이어나 나오는 TV 콘텐츠에 대한 시청 경험 전체를 묶어내는 개념이다.

☞ 중앙 집중화된 콘텐츠 제공방식을 들뢰즈-가타리 용어로 하면 '홈 파인' 방식, '몰적' 방식 정도가 되겠다. 다른 맥락, 다른 가지로 벗어난 방식은 '매끄러운/미끄러운' 방식이나 '분자적' 방식, 리좀적 방식 정도로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2019.6.27일 추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중앙 집중화된 콘텐츠의 제공방식에서 옆으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 같으면서도 다른 경험을 할 수 가능성에 대해 생각을 집중해보자. TV를 둘러싼 쌍방향 테크놀로지를 이용하면 집단의식을 지지하면서도 그 안에서의 다양성을 끌러낼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은 너무 많은 잡다함 때문에 집단의지와 사회에 필요한 정형화(?)된 문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인터넷은 차이를 강화(개별화작용의 강화)하고 사람들을 더 작게 나눠 놀 수 있도록 하여 민주주의가 힘겨워하는 곳까지 간다. 즉 너무 많은 주의 주장으로 인해 사회가 분열된다.

시청 경험 전체에 대해서 생각하면 TV와 PC의 차이를 알 수 있다. TV를 켜놓고 아이를 돌보거나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할 수 있다. 하지만 PC를 켜놓고는 할 수 없다. PC라는 매체 자체를 놓고 보면 전혀 flow가 아닌 stock이라할 수 있다. 작용을 가해 꺼내야한다. TV는 스위치를 끄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방송이 흘러나오지만 PC는 인터랙션 없이 두면 검은 화면으로 변해버린다. 화면보호기로 가있거나 절전 모드로 전환된다. 서론의 끝부분으로 가면 이와 관련된 이야기(페미니즘과 관련하여)가 나온다.

문화양식과 경험의 정치학에 대한 탐구 p.11

그가 주로 다루었던 문제들은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사회구조와 사회변화에 대해 갖는 관계, 제도적 실제로서 매체가 발전하는 과정, 문화엘리트 특히 지식계층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평가절하,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수사적 형식과 텍스트적 양식, 또 그것이 일상생활에 끼치는 영향 등이었다. 특히 궁극적으로 윌리엄스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보다 나은 세계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p.11

윌리엄스는 지식계층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평가절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가 죽기 직전(1980년대가 되어) 그가 틀리고 지식계층의 이런 태도가 맞았다는 것이 현실로 들어났다. 서론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그가 원했던 것은) 우리가 텔레비전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문명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풍부한 방식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밝히는 것 pp.12-13

사회변화를 목표로 한 기획으로서, 전자매체를 통해 의사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민중에게 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향상된 수준으로 제공되는 폭넓은 참여 민주주의의 창출을 꿈꾸고 있었다. p.13

이런 기획이 실패했다. 하지만 TV를 통해 어떻게 민중의 참여를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진짜 가능한 일이었다면 왜 현실화되지 못 했는가를 묻고 답해야 한다.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가?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를 이용하여 긍정적인 사회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 p.13

‘매스(mass)’라는 말은 20세기의 ‘폭도/군중(mob)’이라는 말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그는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항상 영화, 라디오, 신문 등 널리 보급된 대중매체와 그에 호응하는 일반대중에 대해 반민주주의적인 문화적 선입견을 갖도록 만든다. p.13

대중매체의 등장과 함께 대중이 등장했다면, 대중이 먼저인가 매체가 먼저인가? 둘 사이의 선후보다는 둘의 처음부터 필연적(어떤 면에서 필연적인가?)으로 엮여있었다. 대중매체가 폭도/군중을 만들어 냈다면 어떤 측면에서 그런가? 매체를 통한 광범위한 정서의 전염이다.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사회에 모여 사는 익명의 대중들은 북소리(매클루언?)를 듣고 그것에 격렬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겉보기에 ‘저속한’ 대중문화로부터 이른바 계몽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로 ‘매스’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이런 입장에 대해 윌리엄스는, “‘대중(mass)’이라는 개념은 사람들(대중)을 오합지졸의 무리로 표현하는 것이며, 동시에 매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이러한 무리들의 기능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효과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복합적인 전달매체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정작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p.13

비록 상당정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매체가 통제된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특정 시점에서 이런 통제가 약화되고 매체가 대중들의 정서가 소통되는 문화형식이 되기도 한다. 오합지졸의 무리처럼 보였던 대중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전 사회를 뒤덮는다. 저속한 대중문화가 계몽 민주주의의 가치를 엎고 대중 속에 잠재해있던 (정서적/감정적?) 야만성을 일깨운다.

‘매스’라는 용어의 부정적인 용도를 밝히면서 윌리엄스는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지닌 민주적인 잠재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좀더 나은 방법을 찾고자 했다. … 고도로 분산되고 소외된 현대생활의 여건 속에서 ‘공동 관심사(common interest)’ 내지는 그가 지칭한 바 ‘공동 문화(common culture)’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커뮤니케이션을 기초로 할 때 획득되며, 송출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즉 송출의 출처는 실제로 다양하며 이 다양한 모든 출처가 공동 채널에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고방식을 가질 때 가능하다”고 언급했다. pp.13-14

‘매스’라는 용어는 부정적으로 해석되서 안된다고 지적한다. 아도르노의 주장을 생각해보자. 현재의 대중매체가 옳다는 것보다는 ‘다른 용법’으로 현재의 매체(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인터넷과 기존의 대중매체가 (참여적) 민주주의를 위한 상호보완적 관계가 될 수 있다. TV가 참여적 민주주의를 확산시킬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다.

분산된 인터넷 매체에서의 아젠다(agenda)가 특정 조건에서 대중매체를 통해 확산된다. 그것의 직접적인 영향력보다도 다수(사회 전체)를 향해 아젠다를 제기할 수 있는 매체의 존재가 중요하다. 출처가 다양한 송출이 실제로 가능해진 역사적 상황 속에 서있다. 이 다양한 출처가 TV라는 공동 채널에 연결될 때, 참여적 민주주의가 확산될 수 있다. 또 사회는 분열되지 않고 ‘공동 관심사’와 ‘공동 문화’를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개인 미디어가 매스 미디어와 결합되는 특정 조건에 대해 탐색해야 한다. 그리고 매스 미디어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인 ‘발췌/배제’(특정 사건을 전체 맥락에서 제거하여 일부만을 보여줌으로써 생기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막기 위한) 시도들을 해야 한다. 블로그 등은 생생함을 갖고 있지만 ‘주관적 관념론’에 빠지기 쉬우며, TV는 (군터 안더스의 주장대로) ‘객관적 관념론’을 확대 재생산 한다. 이제 우리는 세계의 다양함과 함께 참여적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미디어의 목적성을 함께 담을 수 있는 형식을 마련해야 한다.


상황에 타개를 위한 언어적 개입 - 전략의 문제
 - 알뛰세르: 이론적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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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보편자들도 믿음의 대상이 되면서, 행위주체에 인과적 힘을 발휘하면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을 발생시킨다." 하나의 이론, 전략이 기존의 기계적/언표적 배치를 뒤흔들며 탈주선을 만드는 것. 기계(적 배치)에 비물체적 변환을 만들어내는 것. 이정우 교수는 이렇게 해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학과 정치학을 결합해 독특한 언어론을 전개한다.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 모든 언어적 표현에는 일종의 주체화(subjectivation) 행위가 수반된다. 즉, 인간의 모든 언어는 객관적인 정보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태도, 감정, 상황 등 주체화를 함축한다. 이 주체화는 ‘기호 체제’ 안에서 성립한다. 언어는 사건과 맞물린다. 언어는 더 이상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계를 바꾸기 도 한다. 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발생하는 것 뿐 아니라, 언어가 사건에 개입해 세계를 바꾸 는 것이다. 이때 사건은 ‘비물체적 변환’이며, 이는 언어만 가지고서는 안되고 기계적 배치와 언어적 배치의 교직이 이루어져야 한다. 들뢰즈-가타리가 이야기하는 사건과 남경희교수가 이야기하는 사건은 '행위 주체의 믿음/태도' 등과 연관지어 본다는데서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그림 등은 2019.6.27일 추가)


윌리엄스가 추구한 대안적 미래, 그리고 TV와 인터넷

『텔레비전』을 쓸 무렵 윌리엄스는 더 이상 단일한 ‘공동 문화’나 ‘공동 관심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양한 공동사회와 다양한 관심사들이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p.14

그는 생애를 통해 계속해서 ‘매스’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렸다. 그리고 매체생산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만 보다 민주적인 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 했다. 사람들이 쟁점을 논의하고 개념을 정립하고 창조적으로 그들의 삶을 조명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민주적인 문화환경 속에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본질을 손상시키는 용어를 거부하고 매스 커뮤니케이션 모델이 제한된 상상력을 거부함으로써 윌리엄스는 매체와 대안적 미래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놓았다. p.14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비교해서 생각해 보자. 테크놀로지에 의해 벤야민이 꿈꾸었던 것들은 모두 실현되지 않았다. 아도르노의 ‘묵시론적(?)’인 미디어 이해가 맞았다. 그렇다고 벤야민의 상상/꿈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틀리더라도 벤야민처럼 상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맞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현실에서 매체생산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부르디외가 이런 논거를 펼친 것 같다.) 발췌/선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체생산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증대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다양한 쟁점을 제기하고 이것이 다시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확산되는 모델을 생각해 보자.

그의 희망의 밑바탕에는 문화형식이 역사적이며 물질적 실제라는 신념, 곧 남자와 여자가 살아가는 방식을 이루는 삶의 요소라는 구체적인 신념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모든 역사적인 실제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형식들도 변하기 마련이다. p.14

변화된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형식과 비교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문화형식이 물질적 실제라는 생각은 담론의 물질성,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이라는 개념과 닿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다른 종류의 사회적 생산과 과정의 ‘균등하지 않은’ 발달단계를 개념화하면서, 문화유물론이라는 개념의 강도를 낮추게 된다. 그에 따르면, “주어진 어떤 문화 속에서 지배적 경향, 잔여적 경향, 부상적 경향이라는 현재의 용어는 이런 역사적 불일치 현상을 정확하게 지적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p.16 (주6)

모순의 불균등 발전에 따른 중층결정이란 개념과 닿는다.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문화형식(매체)을 갖을 수 있다. 이것은 (특정) 매체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렇다면 모두 ‘강도’의 문제로 이야기하여야 하나?

커뮤니케이션 제 형식이 “그 자체로 실재를 끊임없이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주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p.16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형식이 나오면 새로운 실재가 형성되고 실재와 실재의 관계가 변화된다. 벤야민과 아도르노, 매클루언이 본 것이 이런 것 아닌가? 물질적 사회과정과 언어(커뮤니케이션)가 처음부터 결합되어 있다.

윌리엄스에게는 언어의 물질성이야말로 사회적 변화를 생각하는 매개물 이었다. 그는 커뮤니케이션이 정치적, 경제적 세력 등 보다 기본적인 다른 세력들에 의해 단순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총체적인 역사적 물질과정의 일부라고 믿었기 때문에, 매체가 실질적인 사회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변화의 실천은 전적으로 우리가 테크놀러지의 사용에 대해 어떤 식으로 상상하는지,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도가 어떻게 이런 사회적 상상력을 구체화시키는지에 달려 있다. 그 이유는 기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문화형식과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기능을 규정하는 것은 특정 역사적 상황에 있는 특정 사회적 집단들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p.17

아도르노의 주장과 다르게 말을 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정치적, 경제적 세력들에 의해 단순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도르노는 테크놀러지 뒤에 있는 것은 경제적 지배라고 말을 했다. 상상을 용법으로 바꿔보자. 그러면 테크놀러지에 대한 새로운 용법과 이것을 구체화 시킬 제도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명박정권이 들어서면서 인터넷에서 불어 닥친 법, 제도의 문제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새로운 기술이 발현하는 순간은 곧 선택의 순간이다.” p.17

매클루언의 기술결정론에 대한 비판 (“매체의 효과가 그것을 조종하거나 사용하는 자가 누구인지에 관계 없이 동일하다면, 또 어떤 식의 통제를 가하려고 하는지에 관계 없이 동일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정치적, 문화적 논쟁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테크놀러지가 그 자체의 놀리대로 기능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pp.17-19

테크놀러지의 논리를 대변하는 웹2.0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 윌리엄스의 주장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사람들이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대한 반감을 갖는 이유(는) 새로운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이 기존의 문화적 권위를 위협한다는데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p.20

문화적 권위에 대한 위협은 『미디어2.0』에서 다룬바 있다.

문화적 염세주의와 파멸을 예전하는 식의 기술결정론이 지식인계층에서 비롯된 것 ... 이런 식의 논리가 파생시키는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어떤 식의 대안도 상상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 ...  그 이유는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통한 문화적 접근과 취향의 변화가 기존의 권위적 문화제도를 위협함으로써 지식인 계층과 소수문화를 구가하는 자들의 권력과 위신의 근거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p.20

그 거부감의 근원은 다름 아닌 특정 문화가 담고 있는 특정 이데올로기일 뿐 p.21

효과 연구를 기술결정론의 부산물로 보고 그 분야 전반을 공격으 대상으로 삼는다. 효과 연구에서 보여주는 과학적 진실이라는 근거가 어떤 식으로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 “대체되고 추상화된 원인을 통해 전반적인 변화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취급어야 한다는 뜻이다.” ... “우리가 실제 사회의 행태를 보면 이런 식의 전형화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p.21

(폭력적이다라는) 일탈을 판단하기에 앞서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의) 그 기준이 되는 ‘규준’을 먼저 정립해야 한다고 효과연구의 허점을 찌른다. p.22

규준이 문제이다. 이 규준에 따라 텔레비전에 나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앵커의 어떤 말과 결합될 것인지 등이 결정된다.
 
☞ '결정된다'를 '결정되어 있다'로 읽자! 영토화, 층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어떤 말과 결합된 것인지' 디아그램을,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른 층화를 원할 때, 규준에서 탈주를 원할 때, 도덕(선악)이 아닌 스피노자적인 윤리(기쁨과 슬픔, 또는 좋음과 나쁨)의 문제가 발생한다. (2019.6.27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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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언론에서(언론사별로) 믿음, 욕구, 가치가 프레임이 된다. 그 각자의 프레임들은 스스로 '보편자'임을 주장한다. '우리의 삶의 세계, 생활세계, 또는 일상세계의 존재자들, 또는 실재자들은 경험적 개별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들과 욕구들과 가치들이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 들뢰즈-가타리가 기표화와 구분된 주체화의 층위를 둔 이유와 연걸된다. 탈기관체가 되려는 주체의 의지(욕망, desire)가 중요해진다. (2019.6.27일 추가)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를 포함한 모든 테크놀러지, 특히 텔레비전은 특정 사회질서의 의도이며 효과이다.” p.22

매클루언처럼 기술결정론적 효과만을 이야기하는 것인 의도를 지적한다. 의도가 제도의 구조, 제도의 기획자들과 설립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이것이 효과와 관계를 맺는다.

☞ 의도는 푸코-들뢰즈적인 언표적 배치/코드화, 지적 투쟁과 전략 등등과 연결된다. 그리고 비물체적 변환이란 개념. 이런 방향에서 전략의 문제를 <미디어2.0>에서 다뤘다.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전략을 통해 통신사/포털 중심으로 전개되는 언표적 장에서의 투쟁(혹은 산업적 경쟁/게임)과 이론적 개입, 그것을 통한 현재의 강고한 구조의 변환. 그 실천의 결과물(기계적 배치물)이 www.pooq.co.kr(콘텐츠연합플랫폼주식회사)이고 스마트미디어렙이다. 이 연합체/회사/기계를 만들 때, 줄 곧 그들의 책을 읽고 있었다.
 
이정우교수의 말처럼 '언어만 가지고는 안되'기에 Corporation(회사라는 하나의 신체/body)를 만들었다. (2019년 6.27일 추가)

그런데 매클루언이 이야기하는 효과는 감각기관의 확장, 특정 지각의 강화를 지적하고 이에 따른 인간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것이 하나의 기술적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이런 기술적 가능성과 함께 시장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세력이, 이 세력의 의도가 지구촌을 만든다.

☞ 감각기관의 확장은 미세지각과 연결할 수 있다. 그리고 특정 지각을 강화시키는 AR, VR 등과도, 그런데 매클루언의 지적처럼 특정 감각의 확장은 다른 감각의 축소를 가져온다. 그리고 미디어의 파편화와 결합된 감각의 파편화는 생활세계와 정치세계의 파편화를 불러낸다. (2019.6.27일 추가)

(부권주의, 권위주의, 상업주의, 민주주의 등) 이런 다양한 제도적 모델들은 서로 다른 국가적 매체 시스템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융합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 (미국과 영국의 시스템) 양쪽의 경우 모두 정치적, 경제적 목적이 방송기술의 발달을 좌우해왔다. ... 우리의 방송 시스템이 갖춘 모양새는, 매체 고유의 성질이나 보다 전반적인 사회적 필요성의 ‘징후적’ 성격뿐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선택들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p.23

‘유동적인 자아매몰(mobile privatization)’ p.25

☞ 자아매몰의 현재적 형태로서의 인터넷 동호회/카페, SNS 등에서의 친구맺기 등과 preer pressure. 이런 현상을 가브리엘 타르드(1843~1904)의 논의와 연결지어 볼 수 있다. (2019.6.27일 추가)

방송이란 서로 모순되지만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현대 사회생활의 두 가지 양상인 지리적 유동성(교통과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의 발달로 실현되었다)과 자아매몰(가정 구조와 지역사회의 구축으로 말미암아 강조된 가치)의 역설적 관계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 거대한 도시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작은 생산집단에서처럼 한 곳에 뿌리박고 사는 존재방식을 경험하지 않게 되었다. 교통수단과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발달로 여러 지역사회가 서로 연결되고, 사람들은 고도로 유동적인 세계에서 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산업화 이래, 핵가족화를 통해서 개인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점차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가정은 항상 보다 큰 사회적 맥락에 의존하여 자금, 생활유지, 세계에 대한 정보 등을 얻을 수 있었다. ... 방송이란 바깥세상의 모습을 개별적인 가정으로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방송은 사람들에게 개별적인 가정의 테두리 내에서도 먼 곳으로 여행하는 것과 유사한 감각을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대중사회의 정보와 연예를 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pp.25-26

‘개인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는 이유’에 대한 분석을 최근 어디선가 읽었는데 ... 짐멜의 책인듯하다. 왜 차별화하려고 하는가?

‘방송이란 바깥세상의 모습을 개별적인 가정으로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모습을 발췌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보여주면서 팬텀(환영)을 만들고 객관적 관념론의 세계에 빠지게 한다. ‘먼 곳으로 여행하는 것과 유사한 감각’을 제공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 여행 자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여행의 맥락(context)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객관적 관념론은 사회를 묶어낸다. 말 그대로 ‘유사한 감각’, 정서/느낌과 생각을 갖도록 하여 유동적인 사회를 (가정 내에서?)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회를 보호, 유지하는 하나의 역능(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힘을 긍정할 수도 있다. 귄터 안더스의 책을 읽을 것

인터넷은 객관적 관념론의 세계를 분산시켜 주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롤플레잉 게임은 아주 주관적 관념론의 세계를 보여준다. 외부세계를 발췌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시뮬레이션(시뮬라르크와 연관성은?)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터넷은 분산시키고 참여시킨다. 그래서 사회의 갈등을 더욱 확산할 수 있다. 방송, 신문에서 삭제(괄호 친)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낸다/살핀다. 하지만 여전히 이 세계는 주관적 세계에 가까우며 객관적 관념론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방송, 신문 등을 매개하여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방송, 신문을 참여적으로 민주주의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개연성을 볼 수 있다. 주관이 단순한 주관이 아닌 개인들이 겪은 삶이란 맥락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라면 이런 활동은 발췌(배제)의 논리를 무력화시키고 개인적 삶의 층위까지 내려갈 수 있게 만든다. 개인적 삶이 좀 더 큰 집합적인 지지자, 또는 반대자를 만나고 이것이 솟아오르며 매스 미디어에 잡히고(포획되고?) 전체로 확산된다.

분산된/분열적 자아는 매스 미디어를 만나 추상화되어(객관적 관념으로 전화되어) 하나로 결합된다. 구체와 추상! 잡다한 것들로 이루어진 인터넷의 중요성. 노무현씨의 지적을 보자. 인터넷은 쓰레기로 가득 찼다는 취지의 지적.

인터넷과 매스미디어가 모순적으로 결합되어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비관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가능성, 용법을 달리하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인터넷 환경에서의 유동적 자아매몰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변할까? 가정 자체까지 점차 유동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 사회가 붕괴될 것인가? 아니면 어떤 새로운 밸런스를 찾을 것인가?

주관적 관념론에 대하여 논하기 위해서 게임중독 현상에 대한 사례/논문을 찾아 읽어야 한다.
2019/06/27 09:15 2019/06/2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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