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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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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도 2012~13년 사이에 썼을 것이다. '짐승같다'는 말이 있다. 잔악함이나 못된 정도가 '사람'의 도(선)를 넘어섰을 때 사용한다. 나쁜 쪽으로 '되기(becoming, 들뢰즈)가 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방향이라면 '~되기'가 아니라 '~이기'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스피노자가 던졌던 질문.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왜 같은 물건을 보고 서로 다른 정서(정동/감응)이 일어날까? 그런 상황이 지속될 때, 해부학이나 분류학의 기준으로 같은 종이라 할 수 있을까? 종을 구별하는 다른 차원, 강도적 차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맹자도 했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가 종교전쟁(네덜란드의 내전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면, 맹자는 전국시대의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 다만 스피노자는 차이에, 역량/능력과 감응의 차이를 말했다면, 맹자는 그 와중에 감응/정서의 동일성(?)을 말했다. 그런데 맹자의 단(端, 실마리)을 동일성이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사물이나 사람의 규정성인 정체성, 동일성을 의미할 정도로 본질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의 길과 짐승의 길이 나뉠 수 있다. 현대의 진화생물학적 설명에 따르면 유전자에 새겨진 사회성을 실마리라 할 수 있을까!

6월 19일 올린 뉴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강한 정서적 연대감>부분은 아래 글을 써보려고 하면서 읽은 책/논문들에서 흄과 관련된 부분을 좀 정리한 것이다. 스미스와 흄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이 기억이 맞을 것이다).

이 글은 <상상력, 우리 자신을 초월하도록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 같다. 스토리(이야기, 드라마, 특히 TV 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에 빠져 있었고, 그 아래 있는 것으로 상상력을 살펴보았었다.

근대 초기 철학자들, 스피노자 등에게 상상력(imagnation)은 창의성(creation)과 관련성보다는 감각작용(이미지 작용 - 이미지가 감각기관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에 더 가깝다. 이런 감각작용-감응/정서(정신작용이라 할 수 있는 것) 등이 어떻게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가, 그 결과/효과들에서 스토리/드라마까지 연결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싫어했던/비판했던' 흄을 읽기 시작했다. 또 스미스도 ....  어떤 기사(news)보다도 드라마(연극, 소설 등)이 사회를 묶어내는데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이런 가설 위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BBC의 전략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강한 정서적 연대감"이란 키워드를 보았다. 어떤 우연들이 만나 이런 저런 것들을 공부하게 만들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읽기


연민과 동정심, 사람과 사람을 사이를 잇는 마음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는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연민(憐憫: pity)과 동정심(同情心: compassion) 역시 ‘타고난 성품(天性: principles)’이라고 말한다. 연민과 동정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때 드는 감정이다. 또 이런 감정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 감정이다.
 성인(聖人)과 무도한 폭도(暴徒) 또는 냉혹한 범죄자의 차이는 이러한 감정을 얼마나 예민하게 느끼는가, 둔감하게 느끼는가에 있지 않을까?


맹자(孟子, BC 372? ~ 289?)는 “타고난 바탕을 따른다면 선하게 될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말하는 본성이 선하다는 의미이다. 선하지 않게 되는 것은 타고난 재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즉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덕(德)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실마리(端, 가능태) 정도가 본성에 있다고 한다.


“누구나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이다.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에 빠지려는 것을 보게 된다면, 깜짝 놀라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서 어린아이를 구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 아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짊(仁)의 단서이다. 이러한 인은 밖에서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 뿐이라고 맹자는 지적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남의 불행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는 연민의 마음이고, 그 불행을 내 일처럼 느끼는 마음, 즉 동정심이다.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의 예처럼 이해타산이 개입하기 전에 순간적으로 드는 마음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 어린아이를 구하지만 어떤 사람은 외면해 버릴 수도 있다. 맹자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잇는 마음을 동정심이라고 생각했다. 동정심을 갖고 있어 나는 다른 사람의 느낌을 공감하고, 나와 내 가족처럼 타인을 보살필 수 있다.


그런데 맹자가 볼 때 이 공감의 능력은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어 세상 전체로 확대된다. 우물 속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남의 불행]를 가까이서 볼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공감의 가능성과 TV

익사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시신이 터키 해변에서 발견(2015.9.3일) 같은 일이다. 신문, 인터넷 등 모든 매체가, 그리고 그 생생함에 있어 TV가 합심해 불러일으킨 것이 '어린아이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이다. 거리감은 감각의 강도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매클루언은 TV가 만들어낸 효과를 보면서 '지구촌'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2019.7.11일 추가)

tele-vision, 원격 현전은 거리감을 줄이고(없애고) 장소성에 얽매인 관계를 풀어헤쳐 놓는다. 텔레비전의 해상도, 흑백 < 컬러 < SD < HD < UHD 등으로의 발전은 '생생함'에 대한 추구의 결과이다. 영상을 보여주면서 그곳에 있는 것처럼 또 그들과 만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우리의 정서(신체와 정신)를 흔들어놓고 싶어한다. 상상력이 아닌 상 그 자체가 눈 앞에 펼쳐지고 우리의 몸이 그 안(화면 안)으로 침몰되길 원하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가 커다란 원색의 그림을 그린 이유이기도 하다. 눈을 한 가득 채운 색면(추상) 속에서 우린 경이를 느끼고, 숭고미에 빠져들듯이 현재의 기술은 그런 효과/미학을 추구한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색채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비극, 아이러니, 관능성, 운명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만 훙미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와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텔레비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로스코 채플(Rothko Chaple)에서 우린 벤야민이 '죽음을 선언'했던 '아우라 장치-제의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2019.7.12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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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크 로스코 그림 앞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15.5.15

따라서 가장 가까이 있는 자기 부모를 가장 ‘사랑[동정하고 공감]’할 것이고, 친척 어른은 그 보다 덜 절실한(切實: 느낌이 뼈저리게 강렬한 상태) 마음으로, 동네 어른은 그 보다 더 엷은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다. 사랑의 영역은 점점 엷어지긴 해도 감각의 강도적 차이(强度的 差異) 나부터 시작하여 이 세상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 이런 사랑과 관심을 통해 내가 확대[확장]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세상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

절실함,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서 말한다면 강렬함과 생생함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맹자는 이런 과정을 “동정심을 느끼는 마음을 느끼지 않는 부분까지 이르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맹자는 이런 마음의 단서를 키워서 연민이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원칙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인(仁)하다고 말한다. 이제 사람들은 이 잠재적인 것을 길러내야 하고, 또 잘 길러내면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



감각의 강도적 차이, 신체에 부딪히는 물질의 힘


지금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에 빠지려 한다. 그것을 본 모든 사람이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며 동정심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세기(强度)는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은 예민하게[강렬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둔감하게[더 엷은 마음으로] 느낀다. 이런 감정을 마음으로 느끼는데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감정의 세기 차이는 감각의 세기 차이에서 온다.


사물로부터 오감(五感: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감각자료(sense data)들은 순식간에 다른 감각자료로 대체된다. 그에 맞춰 여러 감정들도 순간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어떤 감정은 시간의 흐름 속에 점점 강화되기도 한다. 감각과 감정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우리 몸 속에서 평행하게 생기고 사라진다. 우리는 어떤 것을 봄[감각]과 그것에 대해 느낌[감정]을 따로 떼어 분석할 수 있지만 그것의 선후를 나눌 수 없다. 심신평행론


“모든 감각은 줄어질 수 있고 따라서 감각을 없애서 점차로 소멸케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에서의 실재성과 부정성 사이에는 많은 가능적인 중간적 감각들의 연속적 연관이 있다.”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한 말이다. 가능적인 중간적 감각들의 연속적 연관이란 말은 감각이 없음(無, 否定性)에서 감각이 어느 양에까지 점차로 올라갈(上昇) 수 있음을 말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는 사물 자체(실재성)에 더 가깝게 갈 수 있다.


“지각에 있어서 모든 실재는 도(度, degree)를 가지며, 도와 부정성(零, zero) 사이에는 점점 감소하는 「도」의 무한의 단계가 있다면, 그리고 또 모든 감관이 감각의 수용성(受容性)에 대한 일정한 도를 가져야 한다면, 현상 중에서 모든 실재적인 것이 없음을 증명하는 어떠한 지각도 불가능하고, 따라서 어떠한 경험도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경험으로부터는 공허한 공간 또는 공허한 시간에 관한 증명이 끌어내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감성적 직관에서 실재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첫째로 그 자신 지각될 수 없고 둘째로 그런 「없음」은 어떠한 유일한 현상으로부터도 결과될 수 없고, 「현상의 실재」의 도(度)의 구별로부터서도 결과될 수 없으며, 또한 현상의 설명을 위해서 가정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공간이나 시간의 전직관(全直觀)은 어디까지나 실재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의 어떤 부분도 공허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실재는 현상의 불변적 외연량을 변경함 없이 무한한 단계를 거쳐서 없음(공허)에까지 줄어질 수 있는 도(度)를 가진다. 이 때문에 공간이나 시간을 메우는 무한히 서로 다른 도(度)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직관의 외연량은 동일하더라도, 서로 다른 현상들에 있어서의 내포량은 보다 적거나 보다 클 수가 있다.” 모든 경험 자체에 이미 실재적인 것[사물, 사건]에 대한 일정한 도를 내포한다. 사회적 실제 뒤르케임


감각이 없음과 물아일체[사물 자체를 앎] 사이에는 무한한 앎의 단계가 있다. 이 하나 하나의 단계가 도(度, degree)이다.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는 순간 예민하고 강렬하게 느끼거나, 둔감하고 엷게 느끼는 것을 사람들 사이에 「강도(强度)」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달리는 기차를 타고 지나며 그런 일이 일어난 곳을 멀리서 아주 짧은 순간 지나쳤다 해도 강도가 영(零, zero)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어떤 것에 대한 감각과 감정[그 어떤 것에 대한 기쁨(좋음)과 슬픔(싫음)]이 평행하게 동시에 존재한다면, 둘 다 훈련이나 교육을 통해 그 보고 느끼는 강도를 강화, 또는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일이면 기쁜 것을 원하고 슬픈 것을 피하려고 하는 반면 남의 일은 기쁜 것보다 슬픈 것에 더 관심[동정심]이 가는 것이 사람인 듯 하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살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이다.)


▸ "감각의 강도적 차이, 신체에 부딪히는 물질의 힘"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자극, 물질의 힘도 있지만 이것을 느끼는, 신체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 이 신체의 능력에 의해 종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불변하는 '종'이라기 보다는 개체군정도가. (2019.7.11일 추가)


상상력(想像力), 우리 자신을 초월하도록 하는 것


우리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없고,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연민과 동정심을 갖고 공감할 수 있는가? 애담 스미스는 상상(想像)이라고 말한다. 상상을 통해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하는 것이다.


“상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인이 처한 상황에 놓고 우리 자신이 타인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는 방식은 마치 우리가 타인의 몸 속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 그와 동일인(同一人)이 되고, 그럼으로써 타인의 감각에 대한 어떤 관념을 형성하여, 비록 그 정도는 약하다 할지라도, 심지어는 타인의 것과 유사한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 상상력을 스토리라고 읽자! (2019.7.11일 추가)


---- 단상들 ----


물아일체에 도달하는 힘은 상상력에 있다.
▸ 아우라, 장치 등과도 관련될 수 있다. (2019.7.11일 추가)

이것은 어린아이가 우물 속에 빠지려 할 때 느끼는 것의 무한

마음에는 예민함이나 둔감함에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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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우물이라는 경험의 발생적 구성요소 (라이프니츠의 주름처럼 잠재적인 것) 파랑과 노랑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진다는 관계 – 요소들 사이에 성립하는 변별적 관계 파랑과 노랑이 섞인다


그것을 보는 나 … 관계로부터 강도적 크기로서의 경험 .. 특정성들 초록으로 보인다.

▸ 장소성을 만들어내는, 어떤 감응을 끌어내는 장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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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상을 하나로 묶은 전 세계인을 밥상머리에 올려놓는 TV가 나왔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동정심의 폭발 … 상대적으로 강한 동족애)


가까이서 본다는 것 생생하다는 것 … 절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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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사랑을 통해 나의 존재가 확대되는 것 … 미디어 인간의 확장이란 매클루언의 말  인간의 확장 = 정서적 확장, 공감적 확장 = 애견에까지 확장되는 공감 능력 ..


“동정심을 느끼는 마음을 느끼지 않는 부분까지 이르도록 하는” 과정  이과정에서 미디어의 역할 그리스 축제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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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 프레임에 의해 조작된, 편집된 동정심과 공감의 세계에 대한 야유
▸ 발터 벤야민의 사촌, 한나 아렌트의 첫 번째 남편 (2019.7.11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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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하게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한 동정심과 같은 감정을 예민하게 혹은 둔감하게 느끼는 것을 ‘강도적 차이(强度的 差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측은지심 인지단야


https://vimeo.com/262754814 (2019.7.12)

Rothko Chapel, 2018 from Catherine Edelman Gallery on Vimeo.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마크 로스코 전시회, 2015.3.28

2019/07/11 23:37 2019/07/1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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