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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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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후 '기술지대'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술지대'에 관한 이해없이 '플랫폼(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술지대'에 대한 논의가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이란 점을 고려하면 플랫폼사업과 연결은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Marx의 <자본> 전체가 그렇지만 지대이론도 고전경제학자인 D. Ricardo에서 왔다고 생각하면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지대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사는 <방송과 통신정책, IPTV 융합정책의 지대추구론적 분석 : 지대추구의 효율성 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nvergence Policy of Broadcasting and Telecommunication in IPTV Convergence Service with Reference to Rent Seeking Theory> 때문이다. 이 논문의 저자는 이상호 교수/박사이다. 2007년, 나는 KT IPTV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박사는 KT에 근무하는 counter partner(차장)였다. 그가 지대이론에 근거해 플랫폼 사업자의 wining을 이야기했고, 우리가 추구했던(?) 'Digital Contents Platform'이란 허무맹랑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 있는 친구에게 예전에 서점에서 서서 읽었던 만델의 <후기자본주의>를 제본해 보내달라고 부탁했었다. 지금도 관심을 갖고 관련된 책과 논문들을 읽고 있고, 또 그 사이 기술지대와 플랫폼의 관계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정리해 <문화경제학> 시간에 짧게 강의를 했다.


기술지대는 기술(기술과 기술적 장치들, 그리고 지적 재산권 등의 법률적 제도 등도 포함된 기술)을 기반으로 부(가치)의 전유를 위한 회로 중 하나이고, 부불노동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이 구체화된 형태가 플랫폼, 또는 FAN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 알파벳)이란 것을 모른다면 그 '사업'의 경제적 핵심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자본>이 과학이거나 어떤 경제학적 진리를 담고있다면 객관적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적 회로/기계'에 대한 이론적 분석의 명확성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이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진리가 아닌 '인간적인 진실', 계급의 존재와 착취구조 그리고
그것의 철폐에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기술지대'에 대한 관심은 '양가적'이다. 한편이 새로운 착취구조에 관련된 것이 있다면, 반대편에는 '어떻게 하면 플랫폼 사업에 성공할 것인가'라는 측면이 있다. 우린 이런 모순 속에 살고 있다. 2007년부터 살펴보던 것들이지만 내 짧은 지식으로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지난 10년 사이 기술지대와 플랫폼에 관련된 논의들에 많은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 문화과학의 <플랫폼 자본주의> 특집호를 읽으면 '왜 플랫폼 사업자가 돈을 버는지'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문화과학 92호 - 2017.겨울 - 10점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지음/문화과학사


이 글은 <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빌렘 플루서, 그리고 기술적 복제 시대의 우리>(2008)와 <텔레비젼: 테크놀러지와 문화형식을 읽으며>(2013) 사이에 있던 글이다. 아래 글에는 정작 기술지대에 대한 내용은 없다. 기술지대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 '기술지대'로 검색하여 살펴보기 바란다. 2007년 <유비쿼터스 환경에서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한국정보처리학회지에 관련 내용을 발표했었다.

▸ 블로그에 게재된 내용 http://dckorea.co.kr/tc/28

또, 2009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나온 2009년 말 발간된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이란 책자를 읽다가 이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매클루언과 윌리엄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매클루언이 윌리엄스의 생각(비판)처럼 '기술결정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기술이 나온 사회, 경제적인 배경에 대한 관심보다 기술의 변화에 의해 변화된 미디어-인간의 '배치'와 그 '효과'에 관심이 켰다고 본다. 이런 그를 한국에서는 다시 호명해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과 같은 글들이 아전인수/침소봉대로 해석해, 뉴미디어를 위한 기술결정론자로 재탄생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어찌보면 윌리엄스 역시 그렇게 호명된 매클루언을 향해 당대에 기술결정론자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불려나온 면이 있다.

정부(정책기관)에서 세금을 써서 연구를 한다면 '미리 답을 정해놓고' 보다는, 열린 형태의 연구를 후원하는 형태가 맞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비전'에는 기술에 대한 맹신과 (방송통신융합을 위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기합리화만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미래 세대와 우리의 삶을 걱정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산업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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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지대


“싫어하는 것에 반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조절하기 위해 스위치를 끄는 곳이 어디인가를 알아두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
마샬 매클루언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미래(1966)>, 스테파니 매클루언 ․ 데이비드 스테인즈 편저, 『매클루언의 이해: 그의 강연과 대담』, 커뮤니케이션북스, p.139

 


테크놀로지와 문화, 그리고 우리의 삶


기술 발전과 문화


우리시대의 총체적인 삶의 경험, 이에 따른 감정과 생각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런 변화의 근원에는 공통적으로 놓여 있는 것은 기술이다. 테크놀로지(technology)는 기술을 생성하는 첨단 공학들과 이에 기반을 둔 기술 산업의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고, 이미 우리 삶 속에 구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 공학, 컴퓨터 공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은 기술의 영향이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등의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까지 미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시대의 문화는 ‘기술적 문화(Technische Kultur)’라 할 수 있다. 기술은 이제 삶의 형식의 총체이자 인간이 역사적으로 이루어낸 모든 내적 ․ 외적 산물의 총체로서 이해되는 문화라는 개념에 비견되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

* 문병호, 「테크놀로지 시대에서의 예술적 계몽력 - 전통적 표현 수단에 기초한 예술 작품들의 위기와 기회」, 『비판과 화해 - 아도르노의 철학과 미학』, pp.109 ~ 110을 참고함


최근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이 문화예술 ․ 인문사회등과 융합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문화 기술( Culture Technology)’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문화기술대학원을 설립했다. 문화기술은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하여 방송 ․ 영화 ․ 음악 ․ 애니메이션 ․ 게임 등의 문화예술 산업을 첨단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

** http://100.naver.com/100.nhn?docid=794689(2009.9.14)의 ‘문화기술(文化技術, culture technology)항목을 참고함

하지만 문화기술의 비약적 발전 때문에 문학, 회화, 음악, 영화와 같은 전통적인 문화예술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디지털화된 예술 작품들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즉 정보통신 수단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면서 전통적인 문화예술의 수용 형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디지털 음원에 대한 기사를 추가 인용할 것) 또 생산방식도 이에 영향을 받아 전통적 표현 수단을 따르는 예술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디지털화된 예술작품들이 새로운 소통 양식인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감에 따라 전통적인 문화산업의 시장 질서역시 무너졌고, 새로운 질서는 아직 생성 중에 있다. 이런 위기의 근저에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특징인 대량성・신속성∙복제성 등과 자본주의적 문화산업의 생존 논리인 상업성∙오락성∙소비성 등이 함께 놓여있다.


테크놀로지 발전의 효과(effect)


기술은 어떤 대상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이용하는 인간 행위의 방식이다. 사람들은 기술을 이용해 주어진 대상에서 무엇을 얻기도 하고, 대상을 자신의 필요나 욕구, 희망에 맞도록 변화시키기도 한다. 기술에는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와 소망이 깃들어있다. 이런 까닭에 기술은 인간이 손과 도구를 이용하고 지적 사고 능력을 갖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을 해왔다. ***

*** 문병호, 같은 책, pp.110~111을 참고 함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경험과 삶을 총체적으로 바꾸고 있는 현실을 빗대  매클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변화하는 것은 액자 속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액자 자체” ****라고 한다. 그에게 동시적이고 즉각적인 정보의 이동이 이뤄지는 전자기술시대는 특정 중심지역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이 중심에 해당되며 경계선도 없는 영역이다. 이 공간은 세계 전역에서 동시에 도착하는 전자정보(모자이크)에 의해 만들어지며, 정해진 연결성이 없는 접촉이 이루어지는 곳(우발성)이다.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의 정보환경을 떠받치는 동시성을 가진 정보들은 시각이 아닌 촉각이나 후각 등 여러 가지 감각에 어울리는 청각에 의존한다.

****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커뮤니케이션북스, p.253

▸ "전자기술시대는 특정 중심지역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이 중심에 해당되며 경계선도 없는 영역"이라는 표현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정말 그런가! 현실은 그 반대의 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즉각적인 정보의 이동 가능성이 실제적인 정보의 이동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기술의 영역 밖에 정보를 취사 선택하는 구조가 온존한다. 기술적인 층위와 그것을 전달하는 언론-미디어의 층위가 만난 지점에서 '정보의 이동'이 결정된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publishing(공개) 가능성이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경로를 벗어나 우발적으로 '이슈들'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맞지만 하나의 층위, 기술적 가능성의 층위만을 볼 때 우리는 현존하는 강고한 힘들을 읽어낼 수 없다. (2019.7.15일 추가)


하지만 19세기 이래 서구인들이 생각한 자신이 사는 공간은 정규적이고, 자연 그대로의 합리성을 지닌 시각적 공간이었다. 이 공간은 유클리드가 마련했던 기하학적 공간으로 연속적으로 균일하며 상호 연결적이고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공간이다. 이런  시각적 공간 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전자기술시대의 동시성을 가진 정보환경에서 쉽게 자리를 잃고 당황하기 마련이다. 이런 변화와 혼란은 테크놀로지, 특히 전자기술의 총화인 텔레비전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낙관론자인 매클루언은 만일 우리가 살고 있는 전자정보시대가 청각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나면, 새로운 환경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예상되지 않는 일들이 발생할 위험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감각들은 불빛이나 열, 소리의 강도에 대한 변화에 즉시 적응하며, 그래서 20세기 전자기술시대의 정보서비스에 의해 형성된 환경구조상 일어나는 변화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원인을 알기도 전에 우리의 감각들은 이런 변화에 먼저 적응하게 되고, 적응의 결과가 먼저 드러나기조차 한다.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 삶의 총체적 경험을 바꾸는 것이다. *****

 ***** 마샬 매클루언, <직업윤리의 종말(1972)>, 같은 책, pp.266~268을 참고 함


▸ 매클루언은 "인간의 모든 감각들은 불빛이나 열, 소리의 강도에 대한 변화"에서 '강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양화하기 어려운 상대적 위치. 유클리드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있는 인간의 감각(더나아가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기술에 의해 우리의 감각들이 '지각(의식적인 앎)보다 먼저' 적응한다고 이야기한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전개체적・전의식적인 신체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기술이 우리의 지각과 어떤 개념을 만들어낸, 자각하게 만드는 시발점이 된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이 때 불빛이나 열, 소리의 강도의 변화(환경의 변화)'는 우리 신체(몸)의 강도 변화를 수반한다. 다른 신체(불빛, 열, 소리)와 만난/접속한 인간 신체의 변화는 단순한 수동적 적응이 아니라 신체의 잠재성(역량, 힘)의 표현이다.

"역량은 하나의 양 이다. 그렇지만, 역량은 길이와 같은 양이 아니라 힘과 같은 양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반적이고 단순한 양, 곧 이른바 외연량(des quantités extensives)이 아니라 강도 단계(une échelle intensive) 를 갖는 강도량(des quantité intensives)이다. 그건 곧 이런 뜻이다. “실재들 은 다소간 강도를 갖는다. 그 자신인 실재의 강도, 그 본질을 채우는 실재의 강도, 그 실재를 그 자체로 정의하는 강도, 그것이 바로 그 실재의 강도이다.” " 김재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2013.2 (서울대학교 대학원), p.120 (2019.7.15일 추가)


따라서 매클루언은 테크놀로지에 의한 인간의 확장이 어떻게 인간의 지각 능력을 변화시키는가 하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 제기했던 문제,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내는 효과라는 문제의 연장선상에 서있다. 매클루언은 관심사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문제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기존 과정(旣存過程)의 진폭(振幅)을 증가시키거나, 속도를 빨리하는 방법, 혹은 그 표현 방법이 심리적 ․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라도 그 ‘메시지’가 인간에게 관계하게 되면 그것에 의해 인간의 척도(尺度)가 달라지고 혹은 진도가 달라지며 혹은 기준이 달라진다. 철도는 달리는 일, 수송하는 일, 혹은 바퀴, 선로(線路)를 인간 사회에 도입해 온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종류의 도시와 일과 레저를 낳게 하여 종래의 인간의 기능을 촉진하고, 또 규모를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 열대 지방이건 한대지방이건 마찬가지이며, 또한 철도라는 매체가 운반하는 물건이나 내용이 무엇이든 조금도 상관없다. 한편, 비행기도 그 사용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이 운송 속도가 빨라짐으로써 철도형의 도시 ․ 정치 ․ 인간관계를 해소하려 하고 있다.” ******

 ****** 마샬 맥루한, 같은 책, p.8에서 인용


▸ "어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라도 그 ‘메시지’가 인간에게 관계하게 되면 그것에 의해 인간의 척도(尺度)가 달라지고 혹은 진도가 달라지며 혹은 기준이 달라진다"고 매클루언은 말한다. 왜 인간의 척도, 진도, 기준이 달라질까? 그것은 인간의 역량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재인박사는 "
유한 실존 양태는 그것을 규정하는 다른 유한 실존 양태와 외적으로, 연장적 부분에 의해 관련된다"고 하면서 아래 글을 주석으로 달았다.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몸들이 다른 몸들 에 의해 제약되어(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몸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몸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몸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분된다.”(Spinoza E II P13 이 하 「자연학 소론」. 강조는 원문, 밑줄은 필자) 김재인, 같은 책, p.121

스피노자의 말에 기대어 살펴보면 인간의 몸이 '어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의 메시지'와 연합되어 다른 몸(개체)이 된 것이다. 이때 메시지는 '고양이의 웃음'이 고양이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의 전달형식(표현방식?, 기계적 배치?, 또는 인간 몸과의 접속방식/interface)이라고 생각해보자. (2019.7.15일 추가)


그런데 이런 접근 안에는 증기기관・철도・텔레비전, 그리고 지금의 인터넷과 같은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일반적인 명제가 들어있다.



'빛나는' 효과에 눈이 멀어버린 기술결정론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바꾼다’는 명제의 현재적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1973년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텔레비전 분석을 위해 사용했던 틀을 그대로 현재의 인터넷에 적용한다 하여도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1)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그후 뉴스와 오락을 제공하는 매체로서 인터넷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이전에 존재했던 뉴스와 오락 매체를 대체하게 되었다.

(2)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인터넷이 갖는 힘이 너무 커져서 제도와 사회적 관계의 틀을 상당 부분 변화시켰다.


(3)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정보통신매체로서 인터넷이 가진 고유한 성질은 실재에 관한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을 변화시켰고, 이어 개인과 개인의 관계 및 개인과 세계에 대해 갖는 관계까지 변화시켰다.


(4)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커뮤니케이션과 오락의 강력한 매체로서 인터넷은 물리적 유동성의 증가 등 다른 테크놀로지의 발명으로 초래된 요인들과 함께 사회의 규모와 형태를 변화시키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5) 인터넷은 과학기술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발명되었으며 오락과 뉴스 매체로 발전했다. 이어 예기치 않은 결과로 텔레비전은 다른 뉴스와 오락 매체의 생명력과 중요도를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가정, 문화, 사회생활의 핵심적인 과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6) 인터넷은 과학기술 연구에 힘입어 하나의 가능성으로 개발되었다. 이 가능성이 새로운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것이라는 잠재력을 인정받아 투자와 개발의 대상으로 선택되었으며, 특히 분권적 의사 소통과 민주적 견해 형성 및 행동양식 형성에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7) 인터넷은 과학기술 연구에 힘입어 하나의 가능성으로 태어났으며, 새롭고 수익성 있는 전자적인 상거래, 콘텐츠 전달, 커뮤니케이션 및 커뮤니티 서비스의 면모를 인정받아 투자와 장려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인터넷은 특징적인 디지털 가전 기기들과 결합되어 확산되었다.


(8)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특징과 사용이 발전함에 따라 능동적 참여성, 집단지성 등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사람들에게 항상 잠재되어 있던 것인데, 인터넷이 보다 구체적으로 발현하게 만들었다.


(9)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의 고유한 특징과 사용에 따라서 새로운 종류의 사회, 곧 분산되어 있고 복합적이면서도 세분화되어 있는 사회의 요구를 야기했으며 동시에 충족시켰다. 새롭게 창출된 롱테일(long tail)경제가 그 예이다.


이런 견해들은 윌리엄스에게는 텔레비전, 우리에게는 인터넷과 같은 어떤 테크놀로지가 우리 세상을 바꾸었다는 익숙한 명제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 중 일부일 뿐이다. 많은 경우 여러 해석들이 동시에 혼합되고, 중복되어 나타난다.

윌리엄스는 (1)~(5)와 같은 형식으로 설명할 경우 테크놀로지를 순전히 우연적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라 지적한다. 이런 입장은 어떤 기술적 발명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이유를 그 자체의 내적 발전에서 찾는다. 따라서 그 발명에 따르는 결과는 테크놀로지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우연적이다. 인터넷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그에 따르는 특정한 사회적 ․ 문화적 사건들도 생겨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을 기술결정론이라 부른다.


“이 관점은 현재 사회변화의 성질을 밝히는 정설로 자리잡을 만큼 그 기세가 매우 강하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본질적으로 내적인 연구개발의 과정에 따라 개발되며, 그에 따라 사회적 변화와 진보의 여건이 조성된다. 진보란 특히 이러한 발명의 역사이며, ‘근대세계를 창출해 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예견된 것이든 예기치 못한 것이든, 테크놀로지의 효과는 역사적 산물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텔레비전론』, pp.49~50


(6)~(9)의 입장도 인터넷을 테크놀로지의 우연적 산물로 본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만 인터넷의 사용을 그 중심에 두고, 그 사용이 다른 맥락에서 결정되는 어떤 사회적 질서나 인간 본성의 몇가지 특징에 대한 징후로 여길 뿐이다. 따라서 인터넷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특정한 어떤 매체에 의해 참여적 질서를 만들었거나 세분화되고 협업적인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현재보다는 좀 더 영향력이 적은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을 수 있다. 앞의 입장보다 덜 결정론적인 이런 입장을 윌리엄스는 징후적 기술론(symptomatic technology)라 한다.


“이 관점은 특정 테크놀로지 외에 사회적 변화의 동인이 되는 다른 조건들도 강조한다. 또한 특정 테크놀로지나 테크놀로지 집단이 다른 어떤 징후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테크놀로지는 그것과는 별개로 결정되는 사회과정의 부산물로 여겨진다. 이미 드러나 있는 사회과정의 목적들을 위해서 어떤 테크놀로지가 사용된다면, 그것은 단지 효과 차원의 위상만을 가질 뿐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책, p.50


테크놀로지와 사회적 제관계


우리가 1970년대의 윌리엄스에 의지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살펴본 것은 이런 견해가 지금도 여전히 테크놀로지와 사회에 관한 우리의 사고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말 발간된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은 이런 사고를 대표한다. 이 책에서는 매클루언의 이론을 정리하며 “매체가 단순한 정보 전달의 수단을 넘어서 인간의 의식 패러다임과 의사소통의 구조, 그리고 사회구조 전반의 성격까지도 재편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방송통신 융합의 철학적 출발점으로 삼기 적절한 이론가”라고 주장한다. 또  “그의 매체론은 커뮤니케이션의 물질성에 따라 문명의 성격까지도 바뀔 수 있다는 관점에서 ‘문명의 미디어론’으로까지 명명될 수 있다”며, 이를 기반으로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을 제시한다. *********

********* 황성주 외,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2008.12), p.59, p.110을 볼 것. 강조는 필자. 우리는 매클루언의 통찰을 기술이 만들어낸 사회적 효과라는 차원에서 이후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이렇듯 현재의 뉴미디어에 대한 입론들은 대부분 기술결정론에 서있다. 테크놀로지와 사회의 관계를 살필 때 “기술을 고립적인 요인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기술은 “자율적인 힘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출하거나, 또는 자율적인 힘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루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책, p.51

 

그런데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은 기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조성하는 것, 담론과 대화, 방송과 통신의 균형과 조화 속에서의 융합, 공급자중심에서 이용자의 참여와 협력을 중심으로 한 융합을 방송통신융합의 추진방향으로, 자유, 참여, 다양성, 창의성을 그것의 가치로 제시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일반적 당위론과 보편적인 가치,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사회적 효과를 적당히 버무린 몇 가지 트렌드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뉴미디어의 철학과 가치를 대변할 수는 없다. ***********

*********** 황성주 외, 같은 책, pp.110~113을 볼 것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테크놀로지는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와 소망이 깃든 기술이라는 일반적 특성을 넘어선 기술,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작동하여 인간을 종속시키고 장악해버린 기술, 자본주의적 상황 아래에서 특수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미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위험사회’ ************* 에 살고 있고, 테크놀로지 자체가 새로운 삶과 더 나은 문명이 만들어낼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갖을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지 않다.

윌리엄스의 통찰에 따르면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과 같은 입장이 갖는 강조점을 바꾸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공동의 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근대 이후 사회관에 깊이 뿌리박힌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다른 관점에 서서 테크놀로지, 구체적으로 텔레비전을 살펴 볼 것을 권유한다.

************   문병호, 같은 책, pp.111~113을 참고 함
*************
울리히 벡,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새물결을 볼 것, 이 책에서 울리히 벡은 기술에 의해 구조적으로 조작되고, 통제되는 산업사회는 더 이상 인간의 의지에 따라 조종될 수 없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의 역사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것의 여러 가지 사용까지 살펴볼 수 있다. 텔레비전과 관련한 이 관점은 연구개발의 과정에 의도라는 요인을 되돌려 놓는다는 점에서 기술결정론과 다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상정된 어떤 목적이나 실천을 실현하기 위해 테크놀로지가 추구되고 발전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목적과 실천이 직접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징후적 기술론과도 다르다. 곧, 드러나 있는 사회적 요구, 목적, 실천 등에 대해 테크놀로지가 주변적인 요인이 아니라 중심적인 위상을 갖는다는 뜻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책, p.51, 강조는 필자


따라서 우리시대의 총체적인 삶의 경험, 이에 따른 감정과 사고 양식의 급격한 변화 양상을 살피기 전,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이끄는 사회적 요구, 목적, 실천을 살펴보아야한다. 



비판적 기술사(技術史) ․ 기술학(技術學)


‘쟁기를 끄는 황소가 경제적 범주가 아니듯이 기계 ․ 기술도 경제적 범주가 아니다. 기계 ․ 기술의 현재와 같은 적용은 우리의 현재 경제체제의 제관계에 속한다. 기계 ․ 기술이 적용되는 방식은 기계 ․ 기술 자체와는 전혀 다르다. 화약을 사람들이 인간을 해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든,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사용하든 언제나 화약인 것과 같다.’ + 사회적 제관계 속에서 기술 발전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은 일반적 당위론과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자의적인 가정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테크놀로지의 실제적인 발전과 그 ‘철학적 가치’는 모순될 수밖에 없다.

+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중원문화, p.55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기술의 본질은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기술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그것에 매몰되거나 그것을 회피하는 한, 기술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결코 경험할 수 없다.

기술에 대해 누구나 알고 있는 대답은 기술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과 기술은 인간의 행동의 하나라는 것이다. 기술에는 연장, 기구, 기계 등의 제작과 사용이 속하고, 이때 제작된 것과 사용된 것 자체도 기술에 속한다. 더 나아가 욕구와 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들도 기술에 속한다. 이러한 장치 전체가 곧 기술이고, 기술 자체 또한 장치이기도하다. 하지만 이렇게 기술을 중립적인 것으로 고찰할 때가 최악의 경우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기술에 내맡겨지고, 이것이 옳다고 신봉하며 기술의 본질에 대해 맹목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볼 때 기술을 하나의 수단이며 인간 행동의 하나라고 보는 현대인의 통념은 기막힐 정도로 올바르다. 하지만 이 통념의 올바름이 현대 기술의 본질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

++
  마르틴 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강연과 논문』, 이학사, pp.9~11을 볼 것


“따라서 현대 기술도 목적을 위한 도구라는 말은 올바르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념이 인간을 기술과 올바르게 관계 지으려는 모든 노력을 규정하고 있다. 모든 것은 기술을 도구로서 적당한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듯이 기술을 “정신적으로 장악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기술을 자유자재로 다루려 한다. 이처럼 기술을 지배하려는 의지는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절박해질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에도 그것을 지배하려는 의지가 가능할까?” +++

+++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책, p.11에서 인용, 강조는 필자


현대의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버린 기술이다. 19세기 중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경제학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기계의 발명이 어떤 인간의 매일매일의 노고를 가볍게 했는가는 참으로 의문이다.” ++++

++++
칼 마르크스, 『자본론 I-2』, 이론과 실천, p.427에서 재인용, 원문 <Of the Stationary State - from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John Stuart Mill (1848)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왜냐하면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기계의 목적은 이러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적 조건하에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그 밖의 모든 노동생산력의 발전이 그러하듯이 상품을 저렴하게 하는 것이며,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필요로 하는 부분을 단축하여 그가 자본가에게 무상으로 주고 있는 다른 부분을 연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 칼 마르크스, 같은 책, pp.427~443을 볼 것. 마르크스는 기계와 대공업을 논하면서, 자본주의적 조건하에서 ‘기계의 발달’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살펴볼 때 개념적 ․ 도구적 정의 ++++++ 에서 벗어나 그것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즉 ‘비판적인 기술사(技術史)’ 입장에 서야한다. 1735년 존 와이엇(John Wyatt)가 방적기계를 발명했고, 그것이 18세기의 산업혁명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불완전한 것이지만 방적기는 이미 그보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영국과 같은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비판적인 기술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어떤 기술 발명의 사회적 맥락과 그 사용 방식을 살핀다. 이런 입장에서 18세기 산업혁명 시대를 보면 한 개인에 의해서 발명이 이루어진 경우가 얼마나 적은가를 알게 될 것이다.

++++++ 하이데거는 이를 “기술에 대한 도구적 ․ 인간학적 규정”이라고 부른다.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책, p.11을 볼 것

또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 및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이때 기술이 인간 노동 과정과 관련을 맺고 있다면, 기술학(技術學)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태도와 인간 생활의 직접적인 생산과정을 밝혀줄 수 있다. 인간 생활은 사람들이 맺고 있는 온갖 사회적 생활관계와 거기서 생겨나는 정신적 관념들을 포함한다. +++++++

+++++++   칼 마르크스, 『자본론 I-2』, p.428~429를 볼 것

기술에 의한 사회적 효과, 즉 기술에 따른 경험과 지각을 포함한 삶의 총체적 변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기술의 사회적 성격을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술 자체가 아닌 기술의 사회적 이용방식에 따라 우리의 생활 방식과 경험들이 달라지고 거기서 정서와 지각, 정신적 관념들・가치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  메모들 ----------

하지만 이 모순은 우리가 미리 상정한 고정 관념과 실제적 운동 사이의 모순일 따름이다.


먼저 테크놀로지 발전의 원인을 살핀 후 이에 따라 문화산업, 방송통신융합의  내에서의 변화를 기술지대(技術地代)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 볼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른 예술 작품의 생산과 수용 형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원인 :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논의를 살필 것

기계에 대한 프루동의 주장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자본론 서한집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동자본주의와 자유노동의 보상 - 독점지대, 4차 산업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 이항우, 한울(2017.8) 정동자본주의는 감정노동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인지자본주의, 인지와 자본 등과도 공명한다. 그리고 좀 더 관심이 있다면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의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렙소디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2019.7.16일 추가)

2019/07/15 23:48 2019/07/15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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