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 관리자 : 새글쓰기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블로그에 오신것을 환영해요^^
[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45
42
527474
'2011/07'에 해당되는 글 2건
◀ 이전 페이지 : [1] : 다음 페이지 ▶

아래 글을 썼던 1998년 5월과 지금, 그 사이에 십년이 넘는 세월이 있다. 2008년 말 정리가 마지막이다. 몸에 붙어있다 떨어져나간 비늘처럼 끄적거리던 글들의 묶음이 있다. 메고 다니는 가방 한구석에도, 컴퓨터 옆 작은 상자 안에도 있다. 상자 안의 종이는 편견이 없다. 포스트잇에서, A4지, 신문 조가리, 회사노트까지 각양각색이다.

언제부턴가 소리로 녹음되어 몇몇은 컴퓨터 안에 찌부러져 집(zip)을 마련했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씌어졌다 어떻게 기를 쓰고 지메일 노트에 안착한 것들도 있다. 종이의 물질성을 잃자 더 흩어져 버렸다. 또 더 정리도 안한다. 마음 뿐이다.

이십대 때, 언젠가부터 형이 더이상 글을 안쓰는 것을 보면서 의아해 했었다. 왜 안쓸까? 지금 그 답을 안걸까? 모른다는 편이 맞을까? 형은 다시 펜을 들고 쓰고 있는 눈치다. 부럽지도 않다. '언제나 쓸 수 있어!' 이런 생각도 있다. 하지만 못쓴다. 안쓰는 것이 아니다. 관심사가 변했을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을 읽고 있다. <나에게 던진 질문> 전문이다.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을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함께 탄식하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한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끝과 시작 - 10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문학과지성사

한 때, 몇번인가 시론(詩論) 같은 것을 쓰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그때 정의한 시론이다. "존재와 당위 사이의 괴리 속에서 솟아난 비명"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다 내린 결론이다. 시를 못쓰는 것은 괴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괴리감 자체가 존재 속에 쪼아리를 튼 것이 아니었다고 해야할까? 의식화의 결과물이었을까? 아니다.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다. 눈 뜬 장님이다. "단 일 분이면 충분한 순간"의 주의(注意)도 없다. 그래서 공감이 없고, 시도 없다. (이런 생각과 함께 다른 존재의 지평 위에 서있다라는, 공감을 하라니까 분석하고 종합하려는 ... 젠장!)

감정도 없이, 판단을 한다며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한 말이나 늘어놓는 재주만 늘은 것은 아닌지. 도구적 이성이다. "냉혹한 세상을 탓"하며, 이것을 "함께 만들어야 함"을 잊은 것은 아닌지.

"시적 감정은 도구적 합리성을 압도하는 합리적 이성의 뿌리" 1996년에 쓴 글 조각이다. 다시 감정의 문제로 돌아왔다. 참다운 우정을, 투명한 사회를 원하다고!

요즘 관심사가 시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들게된 이유는 요즘 관심사 때문이다.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너무 단순하고 명확한 것은 아닐지라도 <같은 것을 봐야, 같은 것을 느낀다>다. 대충 내려놓은 결론이다.

인쇄술 이후로 매스미디어가 만들어 낸 세계가 편협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한 세계만 보여줘다지만 이것이 <공감의 세계>를 만든 것은 아닌지, 그리고 대중민주주의를. 근대(16,17세기~) 이후 감정, 공감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 이런 맥락에서 미디어의 역할이 관심사다. 역할이라기 보다는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낸 사회적 효과가 맞겠다.

매스미디어가 만든 공감 위에 근대적 윤리와 인권같은 제도들이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인터넷이 만든 '다양성의 세계'와 매스미디어의 '한 세계'와의 관계가 관심사다. 일하면서 나온 주제다. 최근 발표자료, 회사 보고서를 찾아보니 2005년부터 시작했나보다. 2007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와 관련된 책들만 편식(?!)하고 있다. (장르는 다양한데 모두 이런 문제틀에서 읽고 있다.)

1996년 처음 회사에 들어가면서 세운 목표가 하나 있었다. 일주일에 시집 한권 읽기. 책장에 쌓여있는 시집이 몇백권이 될까? 그런데 미디어에 대해 알겠다고 몇년간 던져놨던 시집을 최근 다시 들었다. 신형철의 산문집인 『느낌의 공동체』때문이다. 제목에서 느낌이 올 것이다. "공감"! 우리 정서의 다양성에 대한, 그 정서(감정)를,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를 소중히 여기며 갈고 닦은 시인들에 대한 평론집이다. 하지만 평론이 아니다. 그는 유리컵 따위를 소중히 여기는, 순간의 눈물을 흘리는 시인보다 더 섬세한 눈길을 가진듯 하다. 시에 대한 절실한 애정이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은 모국어에 대한 애정으로 쓴 시집이다. 결국 이런 신형철씨에게 낚여 다시 시집을 들었다.

느낌의 공동체 - 10점
신형철 지음/문학동네

인터넷과 시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지? 내 생각엔 정서(감정)의 다양성이다. 결국 이 정서 위에서 세계에 대한 시선의 다양성이 나온다. 이들의 단점이 무엇인줄 아는지? 그 독특성에서 나오는 불편함! 인터넷의 악플처럼 코드가 안맞는 시에 대한 악평이나 무시(안읽기)아닐까. 아니면 상대방에 대한 노골적 공격성! (인터넷도 시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정의 노골적 표현이 시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보통사람들은 감정을 통념에 맞춰 통제한다면 시인은 그렇게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정서의 계발이나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좋으나 소그룹으로 무리져 공감(일반성의 세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시끄러운 인터넷은 천편일률 매스미디어와 다르다.

관심은 "인터넷/민주주의/세계의 다양성"과 "매스미디어/공감/현 사회(공동체)에 대한 보호(유지)"이다.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이런 접근이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분명히 말하건데 공감은 인터넷의 것이 아니다. 매스미디어에 속한다. 공통경험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 이에 대해서는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런 관심도 사실은 존재와 당위의 괴리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공장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아래 글이 1998년 5월 시론이라고 썼던 것이다. 시간은 얼굴을 붉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자기가 썼던 글들을 볼 때 말이다. 그래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블로그에도 아래 이야기했던 몇편의 시들이 올라와 있다.

요즘하는 메모들은 모두 정서, 공감, 감정과 관련된 미디어이다.

개인적 감정/심상이 사회적 사실이 될 때

김광기, <뒤르케임 경구의 재해석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취급하라">를 읽으면서 해놓은 메모이다. 인터넷은 개인적 감정, 심상을 사회적 사실(표상)로 만들어 내는 가장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 사실이 되는가? 그 구조를 알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감정을 6가지로 나눴다.(맞나 다시 확인해야 한다.) 지금은 수백가지의 감정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천가지의 공감'이 가능하고, 그래서 999개의 반감이 있을 수 있다. 모든 감정들이 역 대합실처럼 웅성대니 시끄럽다. 뒤르케임의 시민종교(공통된 윤리적, 정서적 기반) 때문에 한참 괜찮은 책을 찾다가 2주전부터 읽기 시작했다. 뒤르케임이 쓴 '사회적 사실'이란 개념, 그것이 만들어지는 구조에 대한 생각이 훌륭하다. 몇년간 뭐라고 부를까 고민하던 것인데.

그렇다면 잠정적으로 나에게 미디어란 무엇일까? 공동체를 만드는 공감! TV, 신문 등의 대중매체가 근대 이후로 했던 일. 너무 많아진 사회적 사실들에 이들이 난감해 하고 있지만 ...

뒤르케임을 다시 생각한다 - 10점
한국사회이론학회 엮음/동아시아

 ---------------------------------

이 작품들은 1993년부터 최근까지 5년간 쓴 詩들이다. 나는 정확히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습작형태의 시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93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쓴 시들일 것이다. 그때의 시들은 “이론적인 성급함”과 “현실적 절망감”을 “신념”이라는 이름 아래 극복하고자 했던 때인 것 같다.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나는 전에 썼던 시들을 “감정의 군더더기”로 몰아 태워버렸었던(「문학일기 2 -대학」) 시를 졸업하자마자 허겁지겁 달려들어 정리되지 않은 감정으로 쓰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해 7월 군입대전까지 계속되었다. 그것은 아직 익지않은 주워들은 사상들의 잔해였고, 생경한 구호였다. 그때 쓴 시들을 모아 나는 『최종심급』이라는 이름으로 제본을 했고 그안에 들어있는 시들이 「서울풍경」,「무쇠똥」등이다.

  그리고 나는 93년 7월 군에 입대를 하였고 “下級武將”으로서 군대생활을 하였다. 군생활을 하면서 쓴 시들은 “현실과 의지의 괴리에, 모순에 가득찬/나에 대한 불만”이 가득찬 시들이었다. 나의 삶이 “용기없고” “현세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하면서(「“무장무장” 투명한 사회4」), 이상적 사회(“투명한 사회”)에 대한 열망과 처에 있던 환경(“나는 군인이다”) 사이의 “실존적 간극”(「혁명적」)에 대한 것들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면서도 과거에 대한 반성을 시도하면서 지난 날들을 넘어서려는 노력들을 했다(「넘어서」).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해명도 없이 “흐르는 시간에 모두 변해가는 시절”(「봄맞이」)이었고, 전국적인 마녀사냥이 공공연히 자행되고(「중세의 여름-1994년 한국」) 있었다. 이때 쓴 시들을 정리한 것이 『넘어서 - 투명한 사회』이다.

  나는 군생활을 경기도 전곡의 남계리와 장탄리 부근에서 했다. 그곳은 임진강 근처로 밤이면 안개가 무척 많이 끼었다. “임진강 자락 무럭무럭/안개만 피어난 장탄리”(「더딘 봄2-장탄리에서」)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날들을 보냈다. “내 지금 바라는 세상은 어디에, 도대체/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희망의 거처」)하는 懷疑의 물결과 함께 “살 길 찾아 앞으로 달려가다가도/너라면 그 소리 듣고 꿈쩍도 안할테냐?”(「자살바위1」)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그래서 “언젠가는 부푼 가슴도 세월이 좀” 먹는 것이(「존재2」), 무서웠다(“세상 무서운 건 시간이더라”, 「존재1」). 그래도 “몹 쓸 내 젊음 때문/봄은 희망이 없어도 지독”했고(「지독한 봄」), 그래서 “희망은 영원하고 내가 먼저 죽을”(「희망」, ‘95.7.19) 거라고 생각했다. 이 시들을 모은 것이 『더딘 봄 -장탄리 안개』이다.

  나는 언제나 시간이 흐르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을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언제나 나의 시들은 여기에 기반하는 것 같다. “이상적 사회”와 “현실”간의 괴리감이 나의 시의 근본적인 힘이다. 그 괴리감의 사이에는 언제나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서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바라보는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한다. “입에 발린 말들과 이젠 헤어”져야 하고(「불임의 세월-나의 시」), “온 힘으로 나를 힘껏 세상에 던”지고(「돌이 된다하여도 날을 수 있는」), “세상 밖으로 나가 세상 속에 있어야 한다”(「세상 속으로」, ‘96.11.29)고 말하는 것 이다. 하지만 이런 각오 속에서도 세상 속에서 “내가 먼저 흔들리며 주저하고 머뭇”대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겐 시는 언제나 “절망을 먹고 자라는 불안한 희망”(「불안한 희망-1997년 4월 30일」)이 된다. 불안해 하는 근원은 “이 절망의 벼랑에서/사랑을 저버릴까 두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는 변할 수밖에 없는 사람 자체-自身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시가 아닐까?  그래서 “시는 마지막 남은 투항하지 못한 존재의 찌꺼기다.”(「태생2」) 그것으로 나가는 과정이 들어있는 것이 『불안한 희망 -사람들』이다.

2011/07/28 01:19 2011/07/28 01:19
From. 지하련 2011/09/05 17:56Delete / ModifyReply
오랜만에 들렸더니, 시 이야기가 올라와있군요! 저도 얼마 전에 꽤 오랜만에, 장석남의 시집을 꺼내 뒤적거렸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시집 읽기가 곤혹스러운 일이 되었더군요. 한때 시인이 꿈이었던 이에게 시집 읽기마저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에 ... 신형철의 저 책을 사서 읽어야겠어요.
"인터넷은 개인적 감정, 심상을 사회적 사실(표상)로 만들어 내는 가장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 사실이 되는가? 그 구조를 알고 싶다." 강력하게 공감을 표합니다.
오랜만에 블로그에서 긴 호흡으로 글을 읽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 이전 페이지 : [1] : 다음 페이지 ▶
[로그인][오픈아이디란?]
A.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고 있다. "어떻게 해서 평등이 아메리카인에게 인간의 무한한 완전가능성이란 관념을 갖게 하는가"에 이런 귀절이 나온다.
공동체를 이루는 시민이 신분과 직업과 출생에 따라서 각 계급으로 나누어질 때, 그리고 모든 사람이 우연한 일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을 억지로 따라야 할 때는,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서 인간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됨으로써 아무도 더이상 자기 운명을 피할 수 없는 법칙에 저항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귀족사회의 주민들이라고 해서 인간의 자기향상의 능력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들은 그것을 무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은 '개선'은 구상할 수 있지만 '변화'는 구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의 사회상태가 개선되리라고는 생각하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성은 진보하며 또 앞으로도 진보할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리 그 진보에는 어떤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p.595)
미국의 민주주의 2 - 10점
A. 토크빌 지음, 박지동.임효선 옮김/한길사
기업도 마찮가지다. 구성원이 직급이나 직위,  직능(맡은 일), 나이(혈연,지연,학연이나 성별과 같은 자연적 요소 등)에 따라서 각 계급으로 나누어질 때 무력감을 느낀다. 무력감이 한계이다. 여기서 계급은 제도적으로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고, 다분히 조직문화와 관련있다. 문화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금기(taboo)이다.

(계급이 아닌 능력으로만 하자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적 논리처럼 보인다. 능력 보다는 어떤 사람의 덕arete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사람에게나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덕이 있다고 믿는다. 윤리적 신념이다.)

회사에서 전략이나 실행계획을 짜 연초의 사업목표보다 10% 더 성과를 내면 '개선'이고, 20%를 넘으면 '혁신'이라고 말한다. '개선'은 있어도 '혁신'은 없다. 그리고 '혁신'이 있다해도 '변화'는 없다. 20% 초과라는 혁신은 운에 따르는 것에 가깝다고 다수가 생각한다. 운은 우연에 따르는 것, 운명 같은 것이다. 때 아닌 "복"타령을 하기도 한다.

개선, 혁신, 변화가 없다고 밑에 직원을 탓할 이유가 없다. 계급적이고 위계적인 구조가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신분, 직업, 출생과 상관 없이 1인 1표라는 형식적 평등에 기초한다. 토크빌의 말처럼 자기 능력의 무한성에 대한 긍정에서 변화가 온다는데 동의한다면 개선해라, 혁신해라, 변화해라 말하면서 아랫 사람을 쪼을 일이 아니다.

윗 사람 스스로가 온존하는 위계적 구조를 흔들어야 한다. 스스로 내려앉지 못하면서 누구에게 내려앉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가공(架空)할 공력이다. 윗분들의 경험과 지혜를 존중하지만 변화가 어렵다면 그 길 가운데 그분들이 떡 버티고 말로만 변화를 부르짖기 때문이다. 변화는 말에서 오지않고 행동에서, 존중하고 들어주는 관용적 태도에서 온다. (이런 분의 또 다른 가공할 능력 중 하나는 바로 아래 문단에서 말한 '내 멋대로 꼴불견'을 높이 사면서 칭찬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이 '가공'의 뜻 속에 들어 있으니 새겨 들으시길!)
 
아랫사람에게도 자기절제와 절도가 필요하고, 자기연마와 숙고 과정도 필요하다. 부족한 줄 모르고 '내 멋대로'는 꼴불견이다. 이런 친구들 보면 '관용적 태도, 존중'이란 말을 물리고 싶다. 대놓고 뭐라고 안한다. 무섭기 때문이다. 담배 피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보고도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것과 같다. (이런 면에서 비겁한다.)

이런 태도와 문화를 쉽게 만들 수 없다. 이럴 때 하는 극약처방이 있다. '어린 놈'을 아주 위에다 올려놓는 것이다. 아니면 '윗분'을 아주 아래 내려놓는 것이다. 문화적 충격요법이다. 귀족사회가 갑자기 평민들의 민주정체로 바뀌는 것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 격어보지 못해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비인간적이지 않을까! 애에게는 어린시절이 필요하다를 평범한 말에 기대어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른은 그 반대다.)

이런 생각 거의 하지는 않지만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팀원들에게 걸림돌이 아닐까? 'another brick in the world'라 불릴 나이가 된 걸까? 120까지 산다면 아직 1/3밖에 못살았는데.

어째든 함께 있는 동료들(company)이 내가 보기에는 자기 능력의 무한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 공화국의 시민이 아닌 귀족사회의 농노나 평민이다.  확신이 없는 것이 모두 '외적 요인'과 관련있다면 나도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내적 요인과도 관련있다면 나에겐 조금 다행이지만 그 친구들이 걱정이다. 못참을 정도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이다. 입이 간지럽거나, 몸이 간지럽고, 머리가 간지럽지 않다.

하지만 '간지럽히지 못하는' 나에게 다시 책임을 묻는 밤이다. 결국 무능한 것이다. 귀족사회와 민주사회에 '낀' 중간관리자의 서러움이라고 애써 자위해보지만 이것 또한 허망한 빈말이다. 마음 속 한가득 욕이 나온다. 혼자 허둥대는 것은 아닌지 ...

그래도 포근한 바람 속에 책을 읽어서 좋고 행복하다.


2011/07/21 01:53 2011/07/21 01:53

위로
From. RSS로 들어온 이 2011/07/21 15:21Delete / ModifyReply
회사 발전에 대한 모티프를 공화정에서 가져오는 것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같긴 한데 근본적으로는 오류가 있겠네요.. 회사 법인의 발전은 사실 개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 않는지요? 스톡을 받는다면 모르겠네요 ^^ 주인의식을 갖게 하는 게 아니라 주인이 되어야 잘 할겝니다..

멋진 글 잘 봤습니다.
jjpark 2011/07/21 16:09Delete / Modify
지적 맞습니다. 이글 쓰면서 유명무실화된 "우리사주조합" 같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연기금"에 투자된 주식에 대한 사회적 통제로 확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식은 팔아버리기 때문에 공화정의 시민권처럼 양도불가능한데 그런 기능을 가진 제도가 필요합니다. 언듯 들었던 생각은 맞는지 모르지만 한겨레신문은 구성원들이 발행인(대표)를 투표 뽑지 않나요?

또 "공유지의 비극" 같은 것도 생각이 났었는데 ... 중요한 것은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사려깊은 구성원이겠지요. 공화국 시민의 책무처럼. 밸런스가 중요하겠지요.

도편추방제와 반대로 도편추첨제로 같은 것도 ... 평등성에 대한 급진적 해결책으로 말입니다. 회사는 사회보다 더 적용이 쉬울 수도 있습니다. 어째는 생득적이 아닌 필터링과정을 거쳐 입사를 하니까요. (이런 기본 능력을 교양으로, 또는 '민주시민의 소양'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주인의식을 가져라가 아니라 주인이 되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물질적 관계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꼭 주식(스톡)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한 자각은 모든(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양식아닌가요?

'회사 법인의 발전은 사실 개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에선 생각이 다르네요. 현재 제가 숨 쉬는 시간의 반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는데 관련 없다면 관련 있는 곳으로 가야 맞죠. 관련 있기 때문에 회사에 있고, 현재의 회사가 가정이나 국가를 지탱하는 축 중 하나입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낮엔 귀족정, 밤엔 공화정에 사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독재정권을 몰아내려하는 것처럼 회사에서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방식은 다르더라도 정신을 갖지않을까요.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를 분권화, 작은 결사/단체들에서 찾습니다. 회사가 민주적으로 된다면 사회도 바뀌고, 그 역도 성립하지않을까요.
RSS로 들어온 이 2011/07/21 16:50Delete / Modify
의문 해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회사 조직문화에 대해서는 저도 개인적으로 한계를 체감하는지라.. 올려주신 내용 대부분에 동의하면서도 몇 글자에 집착해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jjpark 2011/07/24 20:29Delete / Modify
좀 더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착은 제가 더 심하죠. ^^
◀ 이전 페이지 : [1] : 다음 페이지 ▶
[로그인][오픈아이디란?]
«   2011/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럽스타(Luv Star)와 L....
갈라파고스에 대한 단상.
풍수화의 시방시와 다....
여기, 슬픈 사람이 있다.
<Contents Evolution ....
민주적 전제정 : 토크....
황용엽 _ 인간의 길 :....
2007년 이후.
SBS 유튜브 한국 서비....
‘몸-경험’에서 매체로....
플랫폼 제국들을 가로....
방송통신 융합시대의 ....
미디어와 스토리텔링,.... 2
초저가 수신료 시장형....
콘텐츠연합플랫폼 - p....
N스크린 - 콘텐츠 유.... 5
IPTV 사업 예측 및 현황. 2
우공이산의 정신, 디....
나에게 던진 질문 - .... 1
"미국의 민주주의"를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