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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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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2016년 어느날 ~

들뢰즈의 기계적 배치, 언표적 배치, 사건 개념을 연결
  • 기계적 배치 - machine / 제작. 내적 맥락
  • 언표적 배치 - 해석. 계열화 / Social. 서비스-소비적 맥락
  • 사건 - contents. story적 맥락
사건이 이렇게 따로 있을 수는 없다. 기계-언표-콘텐츠가 함께 교직되면서 어떤 사건/의미가 생겨난다. 기계-언표도 과도할 수 있다. 어떤 것(사업/전략)을 구조화할 때, 사용해보는 도구/개념 정도로 생각해보자. (2019.7.18)

콘텐츠나 사건을 어떻게 놓을까! 콘텐츠를 사건에 놓는 것은 category mistake이다. 콘텐츠는 기계적 배치 내에 내용이나 성질로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것이 놓여있는 미디어기계와 사람이 접속할 때, 어떤 의미와 사건이 일어난다.

그 내용(콘텐츠)에서 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나 그 콘텐츠의 제작자(감독,작가, 편성/투자자 등)의 의도에 따라 가는 사람들 .. 의미가 갈리는 방식) - 성상을 파괴하는 신교도와 그것을 만들고 신성시 하는 가톨릭교도

어떤 특정 의미나 사건을 지속하도록 만든 게, 가톨릭 종교개혁의 '아우라(벤야민)' 장치라고 한다면 우리 옆에는 그 보다 유연한 '페북/facebook 기계'가 있고, 그 안에서는 아주 다양한 형태의 '아우라' 장치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페북을 어떻게 쓰는지, 그 안에 어떤 peer들, 어떤 contents, context ... 기(氣)들이 우글대다 어떤 정향(개체화, 몰적 형태)이 발생하고/되고 고착될 것이다. (2019.7.1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래 글은 2019.7.23일 업데이트 --------------------

2014.5.22일, 2015.3.12일 메모 - 메타데이터, TMI


meta-data에서 meta는 변하지않는, 근원적인 것이다. 그래서 형이상학, meta-physica의 meta. meta를 뺀 data는 현상적인 것, 경험적인,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user-experience에 가깝다. 많은 철학자들이 data를 허상이나 환상에 가깝다고들 생각을 했다.

user의 입장에서 보면 search(function, thchnic)이라기 보다는 find다.
다른 곳이 검색으로 돈을 벌었으니 우리도 검색을 하자, 그것을 위해 데이터를 넣자가 아닌.

"meta-data가 아닌 사용법/범례"에서 사용법/용례는 잘못썼다. 사용과 용례가 맞다. 사용법은 meta-data에 가깝다. 말그대로 law(법/칙)이니.

data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변하는 콘텐츠의 맥락성, 의미, 사건과 관련된 우리의 판단과 관련된, 구체적인 글(클립에서 제목을 뽑거나, 댓글을 달거나, S짤방 같은데서 드립(!)치는 것이 된다. meta가 될 수 없는 일시적인 정감들/분위기와 관련된 정보(information)


meta-data는 칸트의 범례에 가깝다. 아래 메모에서 "meta-data가 아닌 사용/용례"에서 용례는 실제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을 파롤(Parole)'이다.

〈 칸트는 취미 판단에서 "우리가 명시할 수는 없는 어떤 보편적 법칙의 한 실례처럼 여겨지는 판단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필연성" 즉 범례적 필연성을 발견했다. 이 필연성이 도출되는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상호 주관적으로 보편적인 까닭에 (즉 그 근거는 자유로운 유희와 합목적성의 선험적인 원리이므로), 우리에게는 마치 그러한 규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칸트는 공통적인 느낌의 이념으로서의 공통감을 도입한다. (인용 사이트) 〉 이 인용문처럼 생각하면 칸트의 범례는 쿤의 패러다임이 범례와 가깝다. 둘이 다르다면 칸트는 범례의 '필연성(?)'을 이야기했다면, 쿤은 그 패러다임 마저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 정도일 듯 하다.


"환경을 만들다가 아닌 환경에 들어가 하나의 용례가 된다." 이게 '실제' 서비스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 메모다. 전략의 남발처럼 메타데이터의 남발 ... 어떤 존재론적 층위 없이 모두 넣고, 쌓아두자는 '실증주의적' 접근. 아니, 실증주의도 아닌 듯 하다. 실증주의는 현상을 가장 단순하게 description하는 것이니. 범례나 법칙성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naver 검색은 메타데이터가 아니라 용례이다." 용례=자연어 검색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 콘텐츠'쟁이'들은 모두가 메타데이터라 생각한다. 빠르게 용례를 찾을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검색.

결론. 내가 아는 메타데이터는 칸트적인 범례에 가깝다. 그런데 많은(대부분의) 경우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를 메타데이터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용자의 용례, 웹 활동보다 자신이 '쓰레기(현재의 상황에서만 의미있는 것)'까지 넣는 것을 좋아한다. 위에서 '환경을 만들다'가 아닌 '환경에 들어가다'를 이야기한 것은 이런 이유이다. 콘텐츠를 둘둘 감아 (저작권을) 지켜서는 서비스를 만들기 힘든 이유다. user들이 기억 속에 있는 콘텐츠를 찾아, 자기 맥락에 맞춰 놀 수 있어야 하는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

맥락에 따라 특이하게 쓰기 --> 소셜화 되기 



이런 것을 자신이 모두 직접 만들려고 하는 무모한 접근. walled-garden 증후군
자신은 모든 사람의 감정을 다알고 있다는 (제작자의) 당찬 자신감 .... 


이 메모는 지금은 다른 회사로 간 분이 메타데이터, 메터데이터 이야기를 해, POOQ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을 때, 쓴 메모이다. 그러다 장대익교수의 <빅 퀘스천>을 읽으면서 칸트 메모를 해 덧붙여놨다.


이 소셜화 되기는 플랫폼 되기, 부불노동자 고용하기와 연결된다. user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플랫폼 사업의 진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5년이 더 지난 메모를 자리 뒷편 기둥에서 떼내 버리며 ....
2019/07/17 18:27 2019/07/1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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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후 '기술지대'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술지대'에 관한 이해없이 '플랫폼(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술지대'에 대한 논의가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이란 점을 고려하면 플랫폼사업과 연결은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Marx의 <자본> 전체가 그렇지만 지대이론도 고전경제학자인 D. Ricardo에서 왔다고 생각하면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지대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사는 <방송과 통신정책, IPTV 융합정책의 지대추구론적 분석 : 지대추구의 효율성 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nvergence Policy of Broadcasting and Telecommunication in IPTV Convergence Service with Reference to Rent Seeking Theory> 때문이다. 이 논문의 저자는 이상호 교수/박사이다. 2007년, 나는 KT IPTV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박사는 KT에 근무하는 counter partner(차장)였다. 그가 지대이론에 근거해 플랫폼 사업자의 wining을 이야기했고, 우리가 추구했던(?) 'Digital Contents Platform'이란 허무맹랑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 있는 친구에게 예전에 서점에서 서서 읽었던 만델의 <후기자본주의>를 제본해 보내달라고 부탁했었다. 지금도 관심을 갖고 관련된 책과 논문들을 읽고 있고, 또 그 사이 기술지대와 플랫폼의 관계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정리해 <문화경제학> 시간에 짧게 강의를 했다.


기술지대는 기술(기술과 기술적 장치들, 그리고 지적 재산권 등의 법률적 제도 등도 포함된 기술)을 기반으로 부(가치)의 전유를 위한 회로 중 하나이고, 부불노동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이 구체화된 형태가 플랫폼, 또는 FAN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 알파벳)이란 것을 모른다면 그 '사업'의 경제적 핵심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자본>이 과학이거나 어떤 경제학적 진리를 담고있다면 객관적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적 회로/기계'에 대한 이론적 분석의 명확성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이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진리가 아닌 '인간적인 진실', 계급의 존재와 착취구조 그리고
그것의 철폐에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기술지대'에 대한 관심은 '양가적'이다. 한편이 새로운 착취구조에 관련된 것이 있다면, 반대편에는 '어떻게 하면 플랫폼 사업에 성공할 것인가'라는 측면이 있다. 우린 이런 모순 속에 살고 있다. 2007년부터 살펴보던 것들이지만 내 짧은 지식으로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지난 10년 사이 기술지대와 플랫폼에 관련된 논의들에 많은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 문화과학의 <플랫폼 자본주의> 특집호를 읽으면 '왜 플랫폼 사업자가 돈을 버는지'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문화과학 92호 - 2017.겨울 - 10점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지음/문화과학사


이 글은 <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빌렘 플루서, 그리고 기술적 복제 시대의 우리>(2008)와 <텔레비젼: 테크놀러지와 문화형식을 읽으며>(2013) 사이에 있던 글이다. 아래 글에는 정작 기술지대에 대한 내용은 없다. 기술지대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 '기술지대'로 검색하여 살펴보기 바란다. 2007년 <유비쿼터스 환경에서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한국정보처리학회지에 관련 내용을 발표했었다.

▸ 블로그에 게재된 내용 http://dckorea.co.kr/tc/28

또, 2009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나온 2009년 말 발간된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이란 책자를 읽다가 이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매클루언과 윌리엄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매클루언이 윌리엄스의 생각(비판)처럼 '기술결정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기술이 나온 사회, 경제적인 배경에 대한 관심보다 기술의 변화에 의해 변화된 미디어-인간의 '배치'와 그 '효과'에 관심이 켰다고 본다. 이런 그를 한국에서는 다시 호명해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과 같은 글들이 아전인수/침소봉대로 해석해, 뉴미디어를 위한 기술결정론자로 재탄생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어찌보면 윌리엄스 역시 그렇게 호명된 매클루언을 향해 당대에 기술결정론자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불려나온 면이 있다.

정부(정책기관)에서 세금을 써서 연구를 한다면 '미리 답을 정해놓고' 보다는, 열린 형태의 연구를 후원하는 형태가 맞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비전'에는 기술에 대한 맹신과 (방송통신융합을 위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기합리화만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미래 세대와 우리의 삶을 걱정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산업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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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지대


“싫어하는 것에 반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조절하기 위해 스위치를 끄는 곳이 어디인가를 알아두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
마샬 매클루언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미래(1966)>, 스테파니 매클루언 ․ 데이비드 스테인즈 편저, 『매클루언의 이해: 그의 강연과 대담』, 커뮤니케이션북스, p.139

 


테크놀로지와 문화, 그리고 우리의 삶


기술 발전과 문화


우리시대의 총체적인 삶의 경험, 이에 따른 감정과 생각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런 변화의 근원에는 공통적으로 놓여 있는 것은 기술이다. 테크놀로지(technology)는 기술을 생성하는 첨단 공학들과 이에 기반을 둔 기술 산업의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고, 이미 우리 삶 속에 구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 공학, 컴퓨터 공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은 기술의 영향이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등의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까지 미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시대의 문화는 ‘기술적 문화(Technische Kultur)’라 할 수 있다. 기술은 이제 삶의 형식의 총체이자 인간이 역사적으로 이루어낸 모든 내적 ․ 외적 산물의 총체로서 이해되는 문화라는 개념에 비견되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

* 문병호, 「테크놀로지 시대에서의 예술적 계몽력 - 전통적 표현 수단에 기초한 예술 작품들의 위기와 기회」, 『비판과 화해 - 아도르노의 철학과 미학』, pp.109 ~ 110을 참고함


최근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이 문화예술 ․ 인문사회등과 융합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문화 기술( Culture Technology)’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문화기술대학원을 설립했다. 문화기술은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하여 방송 ․ 영화 ․ 음악 ․ 애니메이션 ․ 게임 등의 문화예술 산업을 첨단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

** http://100.naver.com/100.nhn?docid=794689(2009.9.14)의 ‘문화기술(文化技術, culture technology)항목을 참고함

하지만 문화기술의 비약적 발전 때문에 문학, 회화, 음악, 영화와 같은 전통적인 문화예술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디지털화된 예술 작품들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즉 정보통신 수단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면서 전통적인 문화예술의 수용 형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디지털 음원에 대한 기사를 추가 인용할 것) 또 생산방식도 이에 영향을 받아 전통적 표현 수단을 따르는 예술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디지털화된 예술작품들이 새로운 소통 양식인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감에 따라 전통적인 문화산업의 시장 질서역시 무너졌고, 새로운 질서는 아직 생성 중에 있다. 이런 위기의 근저에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특징인 대량성・신속성∙복제성 등과 자본주의적 문화산업의 생존 논리인 상업성∙오락성∙소비성 등이 함께 놓여있다.


테크놀로지 발전의 효과(effect)


기술은 어떤 대상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이용하는 인간 행위의 방식이다. 사람들은 기술을 이용해 주어진 대상에서 무엇을 얻기도 하고, 대상을 자신의 필요나 욕구, 희망에 맞도록 변화시키기도 한다. 기술에는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와 소망이 깃들어있다. 이런 까닭에 기술은 인간이 손과 도구를 이용하고 지적 사고 능력을 갖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을 해왔다. ***

*** 문병호, 같은 책, pp.110~111을 참고 함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경험과 삶을 총체적으로 바꾸고 있는 현실을 빗대  매클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변화하는 것은 액자 속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액자 자체” ****라고 한다. 그에게 동시적이고 즉각적인 정보의 이동이 이뤄지는 전자기술시대는 특정 중심지역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이 중심에 해당되며 경계선도 없는 영역이다. 이 공간은 세계 전역에서 동시에 도착하는 전자정보(모자이크)에 의해 만들어지며, 정해진 연결성이 없는 접촉이 이루어지는 곳(우발성)이다.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의 정보환경을 떠받치는 동시성을 가진 정보들은 시각이 아닌 촉각이나 후각 등 여러 가지 감각에 어울리는 청각에 의존한다.

****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커뮤니케이션북스, p.253

▸ "전자기술시대는 특정 중심지역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이 중심에 해당되며 경계선도 없는 영역"이라는 표현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정말 그런가! 현실은 그 반대의 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즉각적인 정보의 이동 가능성이 실제적인 정보의 이동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기술의 영역 밖에 정보를 취사 선택하는 구조가 온존한다. 기술적인 층위와 그것을 전달하는 언론-미디어의 층위가 만난 지점에서 '정보의 이동'이 결정된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publishing(공개) 가능성이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경로를 벗어나 우발적으로 '이슈들'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맞지만 하나의 층위, 기술적 가능성의 층위만을 볼 때 우리는 현존하는 강고한 힘들을 읽어낼 수 없다. (2019.7.15일 추가)


하지만 19세기 이래 서구인들이 생각한 자신이 사는 공간은 정규적이고, 자연 그대로의 합리성을 지닌 시각적 공간이었다. 이 공간은 유클리드가 마련했던 기하학적 공간으로 연속적으로 균일하며 상호 연결적이고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공간이다. 이런  시각적 공간 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전자기술시대의 동시성을 가진 정보환경에서 쉽게 자리를 잃고 당황하기 마련이다. 이런 변화와 혼란은 테크놀로지, 특히 전자기술의 총화인 텔레비전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낙관론자인 매클루언은 만일 우리가 살고 있는 전자정보시대가 청각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나면, 새로운 환경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예상되지 않는 일들이 발생할 위험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감각들은 불빛이나 열, 소리의 강도에 대한 변화에 즉시 적응하며, 그래서 20세기 전자기술시대의 정보서비스에 의해 형성된 환경구조상 일어나는 변화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원인을 알기도 전에 우리의 감각들은 이런 변화에 먼저 적응하게 되고, 적응의 결과가 먼저 드러나기조차 한다.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 삶의 총체적 경험을 바꾸는 것이다. *****

 ***** 마샬 매클루언, <직업윤리의 종말(1972)>, 같은 책, pp.266~268을 참고 함


▸ 매클루언은 "인간의 모든 감각들은 불빛이나 열, 소리의 강도에 대한 변화"에서 '강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양화하기 어려운 상대적 위치. 유클리드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있는 인간의 감각(더나아가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기술에 의해 우리의 감각들이 '지각(의식적인 앎)보다 먼저' 적응한다고 이야기한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전개체적・전의식적인 신체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기술이 우리의 지각과 어떤 개념을 만들어낸, 자각하게 만드는 시발점이 된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이 때 불빛이나 열, 소리의 강도의 변화(환경의 변화)'는 우리 신체(몸)의 강도 변화를 수반한다. 다른 신체(불빛, 열, 소리)와 만난/접속한 인간 신체의 변화는 단순한 수동적 적응이 아니라 신체의 잠재성(역량, 힘)의 표현이다.

"역량은 하나의 양 이다. 그렇지만, 역량은 길이와 같은 양이 아니라 힘과 같은 양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반적이고 단순한 양, 곧 이른바 외연량(des quantités extensives)이 아니라 강도 단계(une échelle intensive) 를 갖는 강도량(des quantité intensives)이다. 그건 곧 이런 뜻이다. “실재들 은 다소간 강도를 갖는다. 그 자신인 실재의 강도, 그 본질을 채우는 실재의 강도, 그 실재를 그 자체로 정의하는 강도, 그것이 바로 그 실재의 강도이다.” " 김재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2013.2 (서울대학교 대학원), p.120 (2019.7.15일 추가)


따라서 매클루언은 테크놀로지에 의한 인간의 확장이 어떻게 인간의 지각 능력을 변화시키는가 하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 제기했던 문제,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내는 효과라는 문제의 연장선상에 서있다. 매클루언은 관심사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문제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기존 과정(旣存過程)의 진폭(振幅)을 증가시키거나, 속도를 빨리하는 방법, 혹은 그 표현 방법이 심리적 ․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라도 그 ‘메시지’가 인간에게 관계하게 되면 그것에 의해 인간의 척도(尺度)가 달라지고 혹은 진도가 달라지며 혹은 기준이 달라진다. 철도는 달리는 일, 수송하는 일, 혹은 바퀴, 선로(線路)를 인간 사회에 도입해 온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종류의 도시와 일과 레저를 낳게 하여 종래의 인간의 기능을 촉진하고, 또 규모를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 열대 지방이건 한대지방이건 마찬가지이며, 또한 철도라는 매체가 운반하는 물건이나 내용이 무엇이든 조금도 상관없다. 한편, 비행기도 그 사용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이 운송 속도가 빨라짐으로써 철도형의 도시 ․ 정치 ․ 인간관계를 해소하려 하고 있다.” ******

 ****** 마샬 맥루한, 같은 책, p.8에서 인용


▸ "어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라도 그 ‘메시지’가 인간에게 관계하게 되면 그것에 의해 인간의 척도(尺度)가 달라지고 혹은 진도가 달라지며 혹은 기준이 달라진다"고 매클루언은 말한다. 왜 인간의 척도, 진도, 기준이 달라질까? 그것은 인간의 역량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재인박사는 "
유한 실존 양태는 그것을 규정하는 다른 유한 실존 양태와 외적으로, 연장적 부분에 의해 관련된다"고 하면서 아래 글을 주석으로 달았다.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몸들이 다른 몸들 에 의해 제약되어(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몸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몸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몸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분된다.”(Spinoza E II P13 이 하 「자연학 소론」. 강조는 원문, 밑줄은 필자) 김재인, 같은 책, p.121

스피노자의 말에 기대어 살펴보면 인간의 몸이 '어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의 메시지'와 연합되어 다른 몸(개체)이 된 것이다. 이때 메시지는 '고양이의 웃음'이 고양이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의 전달형식(표현방식?, 기계적 배치?, 또는 인간 몸과의 접속방식/interface)이라고 생각해보자. (2019.7.15일 추가)


그런데 이런 접근 안에는 증기기관・철도・텔레비전, 그리고 지금의 인터넷과 같은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일반적인 명제가 들어있다.



'빛나는' 효과에 눈이 멀어버린 기술결정론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바꾼다’는 명제의 현재적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1973년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텔레비전 분석을 위해 사용했던 틀을 그대로 현재의 인터넷에 적용한다 하여도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1)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그후 뉴스와 오락을 제공하는 매체로서 인터넷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이전에 존재했던 뉴스와 오락 매체를 대체하게 되었다.

(2)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인터넷이 갖는 힘이 너무 커져서 제도와 사회적 관계의 틀을 상당 부분 변화시켰다.


(3)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정보통신매체로서 인터넷이 가진 고유한 성질은 실재에 관한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을 변화시켰고, 이어 개인과 개인의 관계 및 개인과 세계에 대해 갖는 관계까지 변화시켰다.


(4)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성과로 발명되었다. 커뮤니케이션과 오락의 강력한 매체로서 인터넷은 물리적 유동성의 증가 등 다른 테크놀로지의 발명으로 초래된 요인들과 함께 사회의 규모와 형태를 변화시키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5) 인터넷은 과학기술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발명되었으며 오락과 뉴스 매체로 발전했다. 이어 예기치 않은 결과로 텔레비전은 다른 뉴스와 오락 매체의 생명력과 중요도를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가정, 문화, 사회생활의 핵심적인 과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6) 인터넷은 과학기술 연구에 힘입어 하나의 가능성으로 개발되었다. 이 가능성이 새로운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것이라는 잠재력을 인정받아 투자와 개발의 대상으로 선택되었으며, 특히 분권적 의사 소통과 민주적 견해 형성 및 행동양식 형성에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7) 인터넷은 과학기술 연구에 힘입어 하나의 가능성으로 태어났으며, 새롭고 수익성 있는 전자적인 상거래, 콘텐츠 전달, 커뮤니케이션 및 커뮤니티 서비스의 면모를 인정받아 투자와 장려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인터넷은 특징적인 디지털 가전 기기들과 결합되어 확산되었다.


(8)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특징과 사용이 발전함에 따라 능동적 참여성, 집단지성 등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사람들에게 항상 잠재되어 있던 것인데, 인터넷이 보다 구체적으로 발현하게 만들었다.


(9) 인터넷은 과학기술적 연구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의 고유한 특징과 사용에 따라서 새로운 종류의 사회, 곧 분산되어 있고 복합적이면서도 세분화되어 있는 사회의 요구를 야기했으며 동시에 충족시켰다. 새롭게 창출된 롱테일(long tail)경제가 그 예이다.


이런 견해들은 윌리엄스에게는 텔레비전, 우리에게는 인터넷과 같은 어떤 테크놀로지가 우리 세상을 바꾸었다는 익숙한 명제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 중 일부일 뿐이다. 많은 경우 여러 해석들이 동시에 혼합되고, 중복되어 나타난다.

윌리엄스는 (1)~(5)와 같은 형식으로 설명할 경우 테크놀로지를 순전히 우연적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라 지적한다. 이런 입장은 어떤 기술적 발명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이유를 그 자체의 내적 발전에서 찾는다. 따라서 그 발명에 따르는 결과는 테크놀로지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우연적이다. 인터넷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그에 따르는 특정한 사회적 ․ 문화적 사건들도 생겨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을 기술결정론이라 부른다.


“이 관점은 현재 사회변화의 성질을 밝히는 정설로 자리잡을 만큼 그 기세가 매우 강하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본질적으로 내적인 연구개발의 과정에 따라 개발되며, 그에 따라 사회적 변화와 진보의 여건이 조성된다. 진보란 특히 이러한 발명의 역사이며, ‘근대세계를 창출해 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예견된 것이든 예기치 못한 것이든, 테크놀로지의 효과는 역사적 산물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텔레비전론』, pp.49~50


(6)~(9)의 입장도 인터넷을 테크놀로지의 우연적 산물로 본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만 인터넷의 사용을 그 중심에 두고, 그 사용이 다른 맥락에서 결정되는 어떤 사회적 질서나 인간 본성의 몇가지 특징에 대한 징후로 여길 뿐이다. 따라서 인터넷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특정한 어떤 매체에 의해 참여적 질서를 만들었거나 세분화되고 협업적인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현재보다는 좀 더 영향력이 적은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을 수 있다. 앞의 입장보다 덜 결정론적인 이런 입장을 윌리엄스는 징후적 기술론(symptomatic technology)라 한다.


“이 관점은 특정 테크놀로지 외에 사회적 변화의 동인이 되는 다른 조건들도 강조한다. 또한 특정 테크놀로지나 테크놀로지 집단이 다른 어떤 징후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테크놀로지는 그것과는 별개로 결정되는 사회과정의 부산물로 여겨진다. 이미 드러나 있는 사회과정의 목적들을 위해서 어떤 테크놀로지가 사용된다면, 그것은 단지 효과 차원의 위상만을 가질 뿐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책, p.50


테크놀로지와 사회적 제관계


우리가 1970년대의 윌리엄스에 의지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살펴본 것은 이런 견해가 지금도 여전히 테크놀로지와 사회에 관한 우리의 사고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말 발간된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은 이런 사고를 대표한다. 이 책에서는 매클루언의 이론을 정리하며 “매체가 단순한 정보 전달의 수단을 넘어서 인간의 의식 패러다임과 의사소통의 구조, 그리고 사회구조 전반의 성격까지도 재편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방송통신 융합의 철학적 출발점으로 삼기 적절한 이론가”라고 주장한다. 또  “그의 매체론은 커뮤니케이션의 물질성에 따라 문명의 성격까지도 바뀔 수 있다는 관점에서 ‘문명의 미디어론’으로까지 명명될 수 있다”며, 이를 기반으로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을 제시한다. *********

********* 황성주 외,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2008.12), p.59, p.110을 볼 것. 강조는 필자. 우리는 매클루언의 통찰을 기술이 만들어낸 사회적 효과라는 차원에서 이후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이렇듯 현재의 뉴미디어에 대한 입론들은 대부분 기술결정론에 서있다. 테크놀로지와 사회의 관계를 살필 때 “기술을 고립적인 요인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기술은 “자율적인 힘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출하거나, 또는 자율적인 힘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루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책, p.51

 

그런데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은 기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조성하는 것, 담론과 대화, 방송과 통신의 균형과 조화 속에서의 융합, 공급자중심에서 이용자의 참여와 협력을 중심으로 한 융합을 방송통신융합의 추진방향으로, 자유, 참여, 다양성, 창의성을 그것의 가치로 제시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일반적 당위론과 보편적인 가치,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사회적 효과를 적당히 버무린 몇 가지 트렌드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뉴미디어의 철학과 가치를 대변할 수는 없다. ***********

*********** 황성주 외, 같은 책, pp.110~113을 볼 것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테크놀로지는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와 소망이 깃든 기술이라는 일반적 특성을 넘어선 기술,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작동하여 인간을 종속시키고 장악해버린 기술, 자본주의적 상황 아래에서 특수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미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위험사회’ ************* 에 살고 있고, 테크놀로지 자체가 새로운 삶과 더 나은 문명이 만들어낼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갖을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지 않다.

윌리엄스의 통찰에 따르면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과 같은 입장이 갖는 강조점을 바꾸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공동의 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근대 이후 사회관에 깊이 뿌리박힌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다른 관점에 서서 테크놀로지, 구체적으로 텔레비전을 살펴 볼 것을 권유한다.

************   문병호, 같은 책, pp.111~113을 참고 함
*************
울리히 벡,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새물결을 볼 것, 이 책에서 울리히 벡은 기술에 의해 구조적으로 조작되고, 통제되는 산업사회는 더 이상 인간의 의지에 따라 조종될 수 없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의 역사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것의 여러 가지 사용까지 살펴볼 수 있다. 텔레비전과 관련한 이 관점은 연구개발의 과정에 의도라는 요인을 되돌려 놓는다는 점에서 기술결정론과 다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상정된 어떤 목적이나 실천을 실현하기 위해 테크놀로지가 추구되고 발전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목적과 실천이 직접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징후적 기술론과도 다르다. 곧, 드러나 있는 사회적 요구, 목적, 실천 등에 대해 테크놀로지가 주변적인 요인이 아니라 중심적인 위상을 갖는다는 뜻이다.”
**************


**************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책, p.51, 강조는 필자


따라서 우리시대의 총체적인 삶의 경험, 이에 따른 감정과 사고 양식의 급격한 변화 양상을 살피기 전,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이끄는 사회적 요구, 목적, 실천을 살펴보아야한다. 



비판적 기술사(技術史) ․ 기술학(技術學)


‘쟁기를 끄는 황소가 경제적 범주가 아니듯이 기계 ․ 기술도 경제적 범주가 아니다. 기계 ․ 기술의 현재와 같은 적용은 우리의 현재 경제체제의 제관계에 속한다. 기계 ․ 기술이 적용되는 방식은 기계 ․ 기술 자체와는 전혀 다르다. 화약을 사람들이 인간을 해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든,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사용하든 언제나 화약인 것과 같다.’ + 사회적 제관계 속에서 기술 발전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은 일반적 당위론과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자의적인 가정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테크놀로지의 실제적인 발전과 그 ‘철학적 가치’는 모순될 수밖에 없다.

+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중원문화, p.55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기술의 본질은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기술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그것에 매몰되거나 그것을 회피하는 한, 기술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결코 경험할 수 없다.

기술에 대해 누구나 알고 있는 대답은 기술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과 기술은 인간의 행동의 하나라는 것이다. 기술에는 연장, 기구, 기계 등의 제작과 사용이 속하고, 이때 제작된 것과 사용된 것 자체도 기술에 속한다. 더 나아가 욕구와 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들도 기술에 속한다. 이러한 장치 전체가 곧 기술이고, 기술 자체 또한 장치이기도하다. 하지만 이렇게 기술을 중립적인 것으로 고찰할 때가 최악의 경우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기술에 내맡겨지고, 이것이 옳다고 신봉하며 기술의 본질에 대해 맹목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볼 때 기술을 하나의 수단이며 인간 행동의 하나라고 보는 현대인의 통념은 기막힐 정도로 올바르다. 하지만 이 통념의 올바름이 현대 기술의 본질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

++
  마르틴 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강연과 논문』, 이학사, pp.9~11을 볼 것


“따라서 현대 기술도 목적을 위한 도구라는 말은 올바르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념이 인간을 기술과 올바르게 관계 지으려는 모든 노력을 규정하고 있다. 모든 것은 기술을 도구로서 적당한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듯이 기술을 “정신적으로 장악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기술을 자유자재로 다루려 한다. 이처럼 기술을 지배하려는 의지는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절박해질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에도 그것을 지배하려는 의지가 가능할까?” +++

+++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책, p.11에서 인용, 강조는 필자


현대의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버린 기술이다. 19세기 중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경제학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기계의 발명이 어떤 인간의 매일매일의 노고를 가볍게 했는가는 참으로 의문이다.” ++++

++++
칼 마르크스, 『자본론 I-2』, 이론과 실천, p.427에서 재인용, 원문 <Of the Stationary State - from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John Stuart Mill (1848)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왜냐하면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기계의 목적은 이러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적 조건하에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그 밖의 모든 노동생산력의 발전이 그러하듯이 상품을 저렴하게 하는 것이며,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필요로 하는 부분을 단축하여 그가 자본가에게 무상으로 주고 있는 다른 부분을 연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 칼 마르크스, 같은 책, pp.427~443을 볼 것. 마르크스는 기계와 대공업을 논하면서, 자본주의적 조건하에서 ‘기계의 발달’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살펴볼 때 개념적 ․ 도구적 정의 ++++++ 에서 벗어나 그것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즉 ‘비판적인 기술사(技術史)’ 입장에 서야한다. 1735년 존 와이엇(John Wyatt)가 방적기계를 발명했고, 그것이 18세기의 산업혁명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불완전한 것이지만 방적기는 이미 그보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영국과 같은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비판적인 기술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어떤 기술 발명의 사회적 맥락과 그 사용 방식을 살핀다. 이런 입장에서 18세기 산업혁명 시대를 보면 한 개인에 의해서 발명이 이루어진 경우가 얼마나 적은가를 알게 될 것이다.

++++++ 하이데거는 이를 “기술에 대한 도구적 ․ 인간학적 규정”이라고 부른다.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책, p.11을 볼 것

또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 및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이때 기술이 인간 노동 과정과 관련을 맺고 있다면, 기술학(技術學)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태도와 인간 생활의 직접적인 생산과정을 밝혀줄 수 있다. 인간 생활은 사람들이 맺고 있는 온갖 사회적 생활관계와 거기서 생겨나는 정신적 관념들을 포함한다. +++++++

+++++++   칼 마르크스, 『자본론 I-2』, p.428~429를 볼 것

기술에 의한 사회적 효과, 즉 기술에 따른 경험과 지각을 포함한 삶의 총체적 변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기술의 사회적 성격을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술 자체가 아닌 기술의 사회적 이용방식에 따라 우리의 생활 방식과 경험들이 달라지고 거기서 정서와 지각, 정신적 관념들・가치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  메모들 ----------

하지만 이 모순은 우리가 미리 상정한 고정 관념과 실제적 운동 사이의 모순일 따름이다.


먼저 테크놀로지 발전의 원인을 살핀 후 이에 따라 문화산업, 방송통신융합의  내에서의 변화를 기술지대(技術地代)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 볼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른 예술 작품의 생산과 수용 형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원인 :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논의를 살필 것

기계에 대한 프루동의 주장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자본론 서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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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자본주의와 자유노동의 보상 - 독점지대, 4차 산업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 이항우, 한울(2017.8) 정동자본주의는 감정노동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인지자본주의, 인지와 자본 등과도 공명한다. 그리고 좀 더 관심이 있다면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의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렙소디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2019.7.16일 추가)

2019/07/15 23:48 2019/07/15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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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도 2012~13년 사이에 썼을 것이다. '짐승같다'는 말이 있다. 잔악함이나 못된 정도가 '사람'의 도(선)를 넘어섰을 때 사용한다. 나쁜 쪽으로 '되기(becoming, 들뢰즈)가 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방향이라면 '~되기'가 아니라 '~이기'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스피노자가 던졌던 질문.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왜 같은 물건을 보고 서로 다른 정서(정동/감응)이 일어날까? 그런 상황이 지속될 때, 해부학이나 분류학의 기준으로 같은 종이라 할 수 있을까? 종을 구별하는 다른 차원, 강도적 차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맹자도 했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가 종교전쟁(네덜란드의 내전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면, 맹자는 전국시대의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 다만 스피노자는 차이에, 역량/능력과 감응의 차이를 말했다면, 맹자는 그 와중에 감응/정서의 동일성(?)을 말했다. 그런데 맹자의 단(端, 실마리)을 동일성이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사물이나 사람의 규정성인 정체성, 동일성을 의미할 정도로 본질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의 길과 짐승의 길이 나뉠 수 있다. 현대의 진화생물학적 설명에 따르면 유전자에 새겨진 사회성을 실마리라 할 수 있을까!

6월 19일 올린 뉴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강한 정서적 연대감>부분은 아래 글을 써보려고 하면서 읽은 책/논문들에서 흄과 관련된 부분을 좀 정리한 것이다. 스미스와 흄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이 기억이 맞을 것이다).

이 글은 <상상력, 우리 자신을 초월하도록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 같다. 스토리(이야기, 드라마, 특히 TV 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에 빠져 있었고, 그 아래 있는 것으로 상상력을 살펴보았었다.

근대 초기 철학자들, 스피노자 등에게 상상력(imagnation)은 창의성(creation)과 관련성보다는 감각작용(이미지 작용 - 이미지가 감각기관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에 더 가깝다. 이런 감각작용-감응/정서(정신작용이라 할 수 있는 것) 등이 어떻게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가, 그 결과/효과들에서 스토리/드라마까지 연결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싫어했던/비판했던' 흄을 읽기 시작했다. 또 스미스도 ....  어떤 기사(news)보다도 드라마(연극, 소설 등)이 사회를 묶어내는데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이런 가설 위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BBC의 전략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강한 정서적 연대감"이란 키워드를 보았다. 어떤 우연들이 만나 이런 저런 것들을 공부하게 만들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읽기


연민과 동정심, 사람과 사람을 사이를 잇는 마음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는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연민(憐憫: pity)과 동정심(同情心: compassion) 역시 ‘타고난 성품(天性: principles)’이라고 말한다. 연민과 동정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때 드는 감정이다. 또 이런 감정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 감정이다.
 성인(聖人)과 무도한 폭도(暴徒) 또는 냉혹한 범죄자의 차이는 이러한 감정을 얼마나 예민하게 느끼는가, 둔감하게 느끼는가에 있지 않을까?


맹자(孟子, BC 372? ~ 289?)는 “타고난 바탕을 따른다면 선하게 될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말하는 본성이 선하다는 의미이다. 선하지 않게 되는 것은 타고난 재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즉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덕(德)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실마리(端, 가능태) 정도가 본성에 있다고 한다.


“누구나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이다.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에 빠지려는 것을 보게 된다면, 깜짝 놀라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서 어린아이를 구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 아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짊(仁)의 단서이다. 이러한 인은 밖에서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 뿐이라고 맹자는 지적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남의 불행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는 연민의 마음이고, 그 불행을 내 일처럼 느끼는 마음, 즉 동정심이다.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의 예처럼 이해타산이 개입하기 전에 순간적으로 드는 마음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 어린아이를 구하지만 어떤 사람은 외면해 버릴 수도 있다. 맹자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잇는 마음을 동정심이라고 생각했다. 동정심을 갖고 있어 나는 다른 사람의 느낌을 공감하고, 나와 내 가족처럼 타인을 보살필 수 있다.


그런데 맹자가 볼 때 이 공감의 능력은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어 세상 전체로 확대된다. 우물 속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남의 불행]를 가까이서 볼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공감의 가능성과 TV

익사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시신이 터키 해변에서 발견(2015.9.3일) 같은 일이다. 신문, 인터넷 등 모든 매체가, 그리고 그 생생함에 있어 TV가 합심해 불러일으킨 것이 '어린아이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이다. 거리감은 감각의 강도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매클루언은 TV가 만들어낸 효과를 보면서 '지구촌'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2019.7.11일 추가)

tele-vision, 원격 현전은 거리감을 줄이고(없애고) 장소성에 얽매인 관계를 풀어헤쳐 놓는다. 텔레비전의 해상도, 흑백 < 컬러 < SD < HD < UHD 등으로의 발전은 '생생함'에 대한 추구의 결과이다. 영상을 보여주면서 그곳에 있는 것처럼 또 그들과 만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우리의 정서(신체와 정신)를 흔들어놓고 싶어한다. 상상력이 아닌 상 그 자체가 눈 앞에 펼쳐지고 우리의 몸이 그 안(화면 안)으로 침몰되길 원하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가 커다란 원색의 그림을 그린 이유이기도 하다. 눈을 한 가득 채운 색면(추상) 속에서 우린 경이를 느끼고, 숭고미에 빠져들듯이 현재의 기술은 그런 효과/미학을 추구한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색채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비극, 아이러니, 관능성, 운명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만 훙미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와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텔레비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로스코 채플(Rothko Chaple)에서 우린 벤야민이 '죽음을 선언'했던 '아우라 장치-제의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2019.7.12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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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크 로스코 그림 앞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15.5.15

따라서 가장 가까이 있는 자기 부모를 가장 ‘사랑[동정하고 공감]’할 것이고, 친척 어른은 그 보다 덜 절실한(切實: 느낌이 뼈저리게 강렬한 상태) 마음으로, 동네 어른은 그 보다 더 엷은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다. 사랑의 영역은 점점 엷어지긴 해도 감각의 강도적 차이(强度的 差異) 나부터 시작하여 이 세상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 이런 사랑과 관심을 통해 내가 확대[확장]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세상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

절실함,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서 말한다면 강렬함과 생생함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맹자는 이런 과정을 “동정심을 느끼는 마음을 느끼지 않는 부분까지 이르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맹자는 이런 마음의 단서를 키워서 연민이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원칙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인(仁)하다고 말한다. 이제 사람들은 이 잠재적인 것을 길러내야 하고, 또 잘 길러내면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



감각의 강도적 차이, 신체에 부딪히는 물질의 힘


지금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에 빠지려 한다. 그것을 본 모든 사람이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며 동정심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세기(强度)는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은 예민하게[강렬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둔감하게[더 엷은 마음으로] 느낀다. 이런 감정을 마음으로 느끼는데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감정의 세기 차이는 감각의 세기 차이에서 온다.


사물로부터 오감(五感: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감각자료(sense data)들은 순식간에 다른 감각자료로 대체된다. 그에 맞춰 여러 감정들도 순간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어떤 감정은 시간의 흐름 속에 점점 강화되기도 한다. 감각과 감정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우리 몸 속에서 평행하게 생기고 사라진다. 우리는 어떤 것을 봄[감각]과 그것에 대해 느낌[감정]을 따로 떼어 분석할 수 있지만 그것의 선후를 나눌 수 없다. 심신평행론


“모든 감각은 줄어질 수 있고 따라서 감각을 없애서 점차로 소멸케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에서의 실재성과 부정성 사이에는 많은 가능적인 중간적 감각들의 연속적 연관이 있다.”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한 말이다. 가능적인 중간적 감각들의 연속적 연관이란 말은 감각이 없음(無, 否定性)에서 감각이 어느 양에까지 점차로 올라갈(上昇) 수 있음을 말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는 사물 자체(실재성)에 더 가깝게 갈 수 있다.


“지각에 있어서 모든 실재는 도(度, degree)를 가지며, 도와 부정성(零, zero) 사이에는 점점 감소하는 「도」의 무한의 단계가 있다면, 그리고 또 모든 감관이 감각의 수용성(受容性)에 대한 일정한 도를 가져야 한다면, 현상 중에서 모든 실재적인 것이 없음을 증명하는 어떠한 지각도 불가능하고, 따라서 어떠한 경험도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경험으로부터는 공허한 공간 또는 공허한 시간에 관한 증명이 끌어내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감성적 직관에서 실재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첫째로 그 자신 지각될 수 없고 둘째로 그런 「없음」은 어떠한 유일한 현상으로부터도 결과될 수 없고, 「현상의 실재」의 도(度)의 구별로부터서도 결과될 수 없으며, 또한 현상의 설명을 위해서 가정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공간이나 시간의 전직관(全直觀)은 어디까지나 실재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의 어떤 부분도 공허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실재는 현상의 불변적 외연량을 변경함 없이 무한한 단계를 거쳐서 없음(공허)에까지 줄어질 수 있는 도(度)를 가진다. 이 때문에 공간이나 시간을 메우는 무한히 서로 다른 도(度)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직관의 외연량은 동일하더라도, 서로 다른 현상들에 있어서의 내포량은 보다 적거나 보다 클 수가 있다.” 모든 경험 자체에 이미 실재적인 것[사물, 사건]에 대한 일정한 도를 내포한다. 사회적 실제 뒤르케임


감각이 없음과 물아일체[사물 자체를 앎] 사이에는 무한한 앎의 단계가 있다. 이 하나 하나의 단계가 도(度, degree)이다.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는 순간 예민하고 강렬하게 느끼거나, 둔감하고 엷게 느끼는 것을 사람들 사이에 「강도(强度)」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달리는 기차를 타고 지나며 그런 일이 일어난 곳을 멀리서 아주 짧은 순간 지나쳤다 해도 강도가 영(零, zero)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어떤 것에 대한 감각과 감정[그 어떤 것에 대한 기쁨(좋음)과 슬픔(싫음)]이 평행하게 동시에 존재한다면, 둘 다 훈련이나 교육을 통해 그 보고 느끼는 강도를 강화, 또는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일이면 기쁜 것을 원하고 슬픈 것을 피하려고 하는 반면 남의 일은 기쁜 것보다 슬픈 것에 더 관심[동정심]이 가는 것이 사람인 듯 하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살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이다.)


▸ "감각의 강도적 차이, 신체에 부딪히는 물질의 힘"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자극, 물질의 힘도 있지만 이것을 느끼는, 신체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 이 신체의 능력에 의해 종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불변하는 '종'이라기 보다는 개체군정도가. (2019.7.11일 추가)


상상력(想像力), 우리 자신을 초월하도록 하는 것


우리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없고,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연민과 동정심을 갖고 공감할 수 있는가? 애담 스미스는 상상(想像)이라고 말한다. 상상을 통해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하는 것이다.


“상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인이 처한 상황에 놓고 우리 자신이 타인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는 방식은 마치 우리가 타인의 몸 속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 그와 동일인(同一人)이 되고, 그럼으로써 타인의 감각에 대한 어떤 관념을 형성하여, 비록 그 정도는 약하다 할지라도, 심지어는 타인의 것과 유사한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 상상력을 스토리라고 읽자! (2019.7.11일 추가)


---- 단상들 ----


물아일체에 도달하는 힘은 상상력에 있다.
▸ 아우라, 장치 등과도 관련될 수 있다. (2019.7.11일 추가)

이것은 어린아이가 우물 속에 빠지려 할 때 느끼는 것의 무한

마음에는 예민함이나 둔감함에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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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우물이라는 경험의 발생적 구성요소 (라이프니츠의 주름처럼 잠재적인 것) 파랑과 노랑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진다는 관계 – 요소들 사이에 성립하는 변별적 관계 파랑과 노랑이 섞인다


그것을 보는 나 … 관계로부터 강도적 크기로서의 경험 .. 특정성들 초록으로 보인다.

▸ 장소성을 만들어내는, 어떤 감응을 끌어내는 장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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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상을 하나로 묶은 전 세계인을 밥상머리에 올려놓는 TV가 나왔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동정심의 폭발 … 상대적으로 강한 동족애)


가까이서 본다는 것 생생하다는 것 … 절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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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사랑을 통해 나의 존재가 확대되는 것 … 미디어 인간의 확장이란 매클루언의 말  인간의 확장 = 정서적 확장, 공감적 확장 = 애견에까지 확장되는 공감 능력 ..


“동정심을 느끼는 마음을 느끼지 않는 부분까지 이르도록 하는” 과정  이과정에서 미디어의 역할 그리스 축제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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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 프레임에 의해 조작된, 편집된 동정심과 공감의 세계에 대한 야유
▸ 발터 벤야민의 사촌, 한나 아렌트의 첫 번째 남편 (2019.7.11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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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하게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한 동정심과 같은 감정을 예민하게 혹은 둔감하게 느끼는 것을 ‘강도적 차이(强度的 差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측은지심 인지단야


https://vimeo.com/262754814 (2019.7.12)

Rothko Chapel, 2018 from Catherine Edelman Gallery on Vimeo.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마크 로스코 전시회, 2015.3.28

2019/07/11 23:37 2019/07/1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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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3년 사이에 쓴 글인 듯하다. 6월 19일 올린 ⟪뉴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고대 그리스의 연극, 공적 공간> 부분은 아래 글의 일부만을 떼다 놓은 것이다. ⟪뉴미디어 탐구⟫란 큰 제목으로 이리 저리을 끌쩍대면서 시간을 보내고, 이것 저것을 찾아보던 때이다. 따로 제목도 없다.

이 글을 쓰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첫 세 단락에 있다. 세번째 단락은 '박홍규,⟪플라톤다시보기❯, 필맥, 2009년, pp.129~130'을 보면서 갖게된 의문을 써놓은 것이다.
 
플라톤 다시보기 - 10점
박홍규/필맥
 
시간이 되면 참고/인용된 책과 논문들에 대한 주석을 업데이트해 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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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관람 수당

30년 가까이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년 B.C.)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8개월이 지난 다음 해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이 부활한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결성해 50년 간 지속된 페르시아전쟁(499 ~ 449년 B.C.)에서 승리했을 때와 비교하면 과거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을 때이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우리 시대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이 지급됨으로써 참여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민주정이 부활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됐다.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 연극관람이 민주정에 참여하는 방식의 하나로 중시됐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생각엔패전 해결할 다른 문제들도 많았을텐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아테네 민주정은 연극관람 수당을 지급했을까?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국가 재정에서 연극 관람료를 지불한 것은 페리클레스(Perikles, 495? ~ 429 B.C.) 시대부터이다. 농번기의 일손 부족 때문에 축제 참가가 어려운 농촌 시민들의 참가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에서 시민들의 입장권과 일비(日費) 지불하기도 했다. 페리클레스는 배심원, 500 평의회 의원, 추첨에 의해 임명된 공직자 등에게 국가가 수당을 제공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시민들이 협의회와 재판소에 나가도록 하기 위해 국가는 법으로 일당과 급식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가난한 시민들도 생업을 일시 중지하면서 공직에 나갈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테네인들은 연극관람을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시했다 것을 있다.

고대 그리스의 극장의 크기 보면 몇십 정도 들어가는 소극장에서 연극을 우리의 경험을 압도한다. 5세기 후반 아티카(Attica, 아테네를 포함한 주변 지역)에는 20만명의 시민이 살았다. 이들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소유한 30 이상의 남성은 대략 2만에서 3만명 정도였다. 장소에서 10분의 1 정도의 시민이, 참정권자 대부분이 함께 공연을 있었다. 디오니소스 극장의 석조 객석은 14,000명에서 17,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과장이었겠지만 플라톤(Plato, 429 ~ 347 B.C.) 향연에서 기원전 416 축제에 3만명의 관객이 참석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이런 거대한 극장에 모여 연극을 보았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연극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다시 묻게 된다.

아테네에서 모든 드라마 번만 공연되었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 신에게는 오직 최초의 수확물만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연은 축구 경기처럼 일회적이었다. 극장은 축구 경기장처럼 한번에 수만 명의 관람자를 수용할 만큼 커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연된 작품의 재공연이 허용되긴 했지만 장기 공연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재공연을 위해서는 민회의 결정이 필요했고, 아테네 아닌 주변 농촌지역에서 열린 다른 축제에서 상연되었다. 하지만 공연의 일회성도 거대한 극장의 필요성을 바로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함께 모여서 연극을 보아야 사회적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아테네인들이 “<박코스의 여신도들>, <페니키아의 여인들>, <오이디푸스> 메데아 혹은 엘렉트라의 불행을 공연하는데 제국을 유지하고 페르시아인들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드는 비용보다 많은 돈을 지불했다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이 크게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3 진행된 연극 경연인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를 위해서는 대략 노동자 100가구 정도가 4 생활할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테네가 일년 해군을 유지하는 비용의 10분의 1 달하는 돈이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이 연극에 이렇게 사회적 비용을 투자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직접적인 연구는 없지만, 우리는 당시 연극이 가졌던 사회적 중요성을 추론해 수는 있다.


 폴리스

폴리스(polis) 공동체를 뜻한다. 폴리스는 정착지의 물적 구조(material structures) 아닌 정착지를 이루어 사는 사람들, 시민을 가리킨다. 이들은 종교적 일체감으로 묶여져 있었다. 농촌 공동체들, 촌락들의 기본 구성은 노예가 포함된 대가족인 오이코스(oikos, , 가족)였다. 오이코스들은 경작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 생산단위였다. 따라서 오이코스가 생산하지 않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농장의 잉여 생산물을 교환해야 했다. 이런 배경으로 교역이 고대 그리스 사회의 원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폴리스는 몇몇 촌락들이 합병되는 촌락집주(村落集住, synoikismos) 과정을 거쳐 형성된 도시다. 처음에는 제단, 다음에는 신전으로 이어지는 장소, 공통의 예배소를 중심으로 뭉쳐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고, 이런 의례가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주었다. 거주민들은 서로 만나 물물 교환을 하고, 공동체의 운영을 논의할 있도록 중심에 위치한 개발된 장소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장소가 아고라(agora, 광장)였다. 독립적인 가족들은 통일된 경배장소,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라는 강력한 상징과 아고라에서의 모임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러한 물적 구조를 중심으로 방어벽이 처지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방어벽은 동양에서는 수천 동안 있었지만 폴리스에는 처음 도입된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아테네는 아테나 여신에 대한 경배의 중심지인 아크로폴리스와 회의와 행정의 중심지인 아고라를 중심으로 통일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후 아티카의 발전과 함께 각종 축제와 행사, 의식이 추가되었고 이런 것들은 시민들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강화시켰다. 처음에는 왕이, 다음에는 정해진 기간 동안 법에 따라 봉직했던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執政官, archon) 행사했던 집행권을 통해 시민은 연맹(koinon, 코이논)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폴리스는 서양 최초의 법치국가라 있다.


연극, 백과사전적 교육 매체

고대 그리스에 문자가 보급되고 폴리스가 확립되는 것은 기원전 8세기 전후에 일어난 일이다. 기원전 800~750년경 호메로스(Homeros)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썼고, 기원전 750~650년경 헤시오도스(Hesiodos) 신들의 계보, 일과 나날 썼다.

아테네의 시민들을 이어준 것도 종교였다. 하지만 종교는 지금처럼 공통의 신념을 바탕으로 했다기보다는 올림포스산에 살고 있는 여러 신들을 위한 의례(儀禮, ceremony)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서사시와 연극은 이런 공동체적 의례축제에서 발생했고, 초기 예술들은 그곳에서 가장 효과를 발휘했다.

더욱이 서사시와 연극은 아주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비극 시인들의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시민의 삶과 사생활을 영위하는 필요한 정보나 지침을 담은 방대한 백과사전이었다. 극의 소재는 축제에 모인 시민들의 공동 경험과 지식이었다.

기원전 5세기까지도 그리스는 아직 (記錄)보다는 (口誦) 중심의 사회였고, 시나 연극에서 채용한 음악적 형식과 상투적 문구의 반복은 지식의 전달과 기억에 효과적이었다. 따라서 시와 연극은 공동체의 경험과 지식을 전달하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되었다. 민회에서는 정치적 논쟁이, 법정에서는 변론이, 시장이나 레슬링학교에서는 철학적 대화가, 축제가 열리면 극장에서는 드라마가 상연되고 서사시가 낭송되었다. 현재는 책으로 읽는 문학(文學) () 드라마(drama) 당시에는 모두 사람의 목소리로 전달되었다. 학교에서의 교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423년경에 씌어진 구름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수금 연주자가 교장을 맡은 소년학교의 수업 광경을 묘사한다.

그럼 그 옛날 내가 정의의 대변자로서 번창하고 절제가
존중되었을 때, 소년들의 교육방법이 어떠했는지 말하겠소.
첫째, 소년한테서는 절대로 투털거리는 소리가 들려서는 안되었소.
그 다음, 한 구역의 소년들은 함께 거리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음악교사의 집으로 걸어갔소. 함박눈이 내려도 외투를 입지않고.
그러면 음악교사는 먼저 양다리를 꼬지 않고 얌전히 앉아
“두려운 도시의 파괴자 팔라스여”, 또는 “멀리 울려퍼지는 뤼라 소리” 같은 노래를
부르도록 가르쳤소. 그들의 아버지들이 부르던 선율에 맞춰서.
그리고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돌출하거나 전조(轉調)를 시도하여
요즘 유행하는 프뤼니스 조(調)의 장식음을 달면
무사 여신들을 모독한 자로 몰매를 맞았소

구름에서 교사가 먼저 선창한 노래는 시인 람프로클레스(Lamprokles) 케데이데스(Kedeides) 디오니소스 찬가(디튀람보스: dithyrambos) 첫부분이다.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제사 사용되었던 이런 시의 내용은 공동의 경험과 지식들로 채워져 있었고, 운율에 맞춘 음악적 형식을 띠고 있었다. 아테네의 학교에서는 이런 시를 음악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다. 따라서 학교의 교사는 시인이자 수금 연주가였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있었던 기원전 5세기의 60년간은()-읽고 쓰기 단계 구송에서 문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쓰기 능력은 상당히 부족해도 전체 주민들 사이로 점차 퍼져 나갔지만, 읽기 능력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왜냐하면 독서를 가능케 해줄 책자나 두루마리 파피루스 따위를 손쉽게 구할 없었기 때문이다. 문자 사용의 증가라는 기술적 진보 속에서도 전통적인 구두 교육이 여전히 우세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걸쳐 철학과 역사서가 출판되고 새로운 매체들이 이것을 대체할 때까지 시와 연극의 교육적 역할은 계속되었다.


정치 참여의 한 방식, 연극

축제에서 상연된 연극들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리스 공동체의 경험이 응축된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비극보다 희극에서 이런 측면이 뚜렷히 나타난다. 희극은 주제와 소재, 장인물, 작가의 메시지 등에서 아테네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희극은 관객이자 민주적 의사결정의 주체인 시민들이 함께 공연을 보며 중요한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했다. 공연에서 제시된 문제 해결 방식은 단선적이지 않고 열려있었다.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며 뤼시스트라테 좋은 예이다.

기원전 411, 이십여 년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르던 때이다. 남자들은 전쟁터를 떠돌았고 여인들은 하염없이 기다렸다. 싸움이 벌어지면 수많은 과부와 고아들이 생겨났다. 이때 희극의 주인공인 뤼시스트라테는 발칙한 생각을 한다. 섹스 파업! 여자들이 섹스를 거부하면 욕정을 견디다 못한 남자들이 전쟁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오리라. 뤼시스트라테와 아테네의 여인들이 섹스 파업을 맹세한다.

그 누구도, 애인이든 남편이든,
빳빳이 세우고 나에게 다가오지 못할 것이며,
난 집에선 황소처럼 씩씩대는 남정네와 몸 안 섞고 살면서도,
야사시한 빛깔 옷을 입고 요염하게 분칠하여,
남자가 나에게 후끈 달아오르게 할 것이며,
절대로 내 남자에게로 자발적으론 안 넘어갈 것이며,
만약 내가 싫다는 데도 힘으로 덤벼든다면,
정말 재미 하나도 없게 해주고 적극 호응하는 동작은 결코 취하지 않을 것이며,
천장을 향하여 다리를 들지도 않고,
강판에 새겨진 암사자처럼 엎드려서 엉덩이를 내밀지도 않을 것임을,
엄숙히 맹세하며, 이에 이 술잔을 비우는 바입니다.
만약 이것을 어긴다면, 맹물이 이 술잔을 가득 채우리라.

이성을 가졌다면, 분별력이 있다면, 선조들의 교육을 받았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어리석은 짓이다. 둘은 같은 동족으로 올림피아의 제우스 축제, 퓌토(델포이의 옛이름) 아폴론 축제를 함께 치룬 종교적 공동체였다. 테르모필라이 근처에 있는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에서 모였던 12부족 동맹의 일원이었고, ‘야만족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함께 싸웠다. 하지만 지금은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고 있다. 연극에서는 이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얼마나 돈독한 관계였는지를 말하고, 각각의 잘잘못 따져 묻는다.

나는 한낱 여자지만 이성은 갖고 있어요.
나는 원래 분별력이 없지 않지만
아버지와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많이 듣고
나쁘지 않은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대들을 똑같이 꾸짖으려는 것이며,
그것은 당연한 일예요. 그대들은 동족(同族)으로서
하나의 그릇에서 제단에다 성수(聖水)를 뿌렸던 것이오.
올림피아에서, 테르모필라이에서, 퓌토에서.
(그 밖에 다른 많은 제단들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대들은 야만족의 적군이 상존하고 있는데도
헬라스의 사람들과 도시들을 파괴하고 있어요.
여기까지 논리는 양쪽 모두에 해당돼요.

 뤼시스트라테 파업이 성공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종전하면서 끝이 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연극을 통해 적과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다. 적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하자는 일반적 결론에서 벗어나 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다만 여자들의 섹스 파업이란 기발한 상상 속에서 이런 것을 제시하기 때문에 희극적이다.

▸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고있는 일본(아베)과의 전쟁(무역전쟁) 속에서 불매운동으로 대응하는 애국주의 물결을 생각할 때, 이천여년이 지난 그리스의 연극은 얼마나 '이성적'인가! (2019.7.9 추가) 

이처럼 고대 그리스 희극은 비상식적 주제를 선택했고 여러 입장들을 드러냈다. 여러 사람들 간의 이데올로기 투쟁은 외설스런 농담들과 뒤섞여 정신적 자유공간을 만들고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했다. 축제에서 상연된 연극을 보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스스로 반성하고, 공동체와 자신의 관계를 곱씹었다. 공동체 안에 있던 현안들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 등을 세울 있었다. 따라서 희극에서 반영된 규범의 확인과 해체는 전사회로 확산되어 시민들 사이의 직접적 토론거리가 되었다. 연극은 종교적 일체감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등과 연결된 민주주의 구조의 일부였다.  

플라톤 국가政體에서 이상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희극, 비극 작가들을 나라 밖으로 추방해야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연극은 아테네 공동체에 종교, 교육, 정치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연극을 통해 공동체의 현안을 이야기하고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이끌어내려한 것은 고대 그리스만의 일은 아니다. 화가 고야(Francisco Goya, 1746 ~ 1828) 살았던 에스파니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1789) 일어났고, 그에 따른 프랑스 혁명 전쟁(1792 ~ 1802) 연이은 나폴레옹 전쟁(1803 ~ 1815)으로 유럽이 격랑에 휩싸였다.  


--- 에스파니아 이야기를 쓰려고 찾아놓은 글 ---
페르난도가
살아있는 시대에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발발하였고, 그에 따른 프랑스 혁명 전쟁 연이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을 거대한 격랑에 휩싸였다. 전란은 체제의 부패와 노화가 진행되고 있던 스페인에 비극을 초래했고, 오랫동안 국제무대에서 벗어나 있던 스페인을 유럽에서 가장 관심사로 만든다.
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 왕위계승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부왕과 그들이 총애하는 마누엘 고도이(모친의 애인)에게서 따돌림을 당하는 괴로운 입장에 내몰려, 원한을 가슴에 품고서도, 자중하고 있었다. 약화된 정부에 대한 전국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1805에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정정 불안이 계속된 1807 10, 페르난도는 〈에스코리알 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음모는 정부의 자유주의적인 개혁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도움을 받아 카를로스 4 등을 추방하고 페르난드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것이다. 개혁파의 희망의 별이라는 입장에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도는 음모가 발각되자 그들을 재빨리 배신하고, 부모님의 지시에 따랐다.


천 개가 넘는 폴리스, 소피스트

그리스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일찍부터 해외무역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9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 그리스 본토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지중해 주변 지역인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소아시아, 멀리 현대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 지역인 갈리아(Gallia) 남부 스페인 해안까지 이주하여 식민지를 세웠다.

그리스 주변지역의 식민지화는 쟁기가 도입되면서 이어진 전면적인 농업혁명에 따라 인구 성장했기 때문이다. 인구 성장과 함께 군주정은 귀족정으로 전환되었고 폴리스 내부의 정치적 긴장이 발생하였다. 이에 귀족 대가족들은 재산 분산을 막기 위해 장남에게 전재산을 물려주게 된다. 이제 나머지 형제는 다른 곳에서 재산을 일으킬 밖에 없었다. 척박한 그리스의 자연 환경 때문에 필요한 것을 교역을 통해 얻어야 했고, 이를 위해선 새로운 시장 개척이 필요했다. 이민 현상이 끝난 기원전 6세기 무렵 본토에 200개가 넘는 폴리스가 있었고 지중해 일대의 식민시까지를 합치면 1,000개가 넘었다.

▸   그리스에, 연극에 관심을 둔 이유 중의 하나가 200개가 넘는 폴리스, 아니 1,000개가 넘는 폴리스 문제였다. 이것을 어떻게 하나로, 즉 정치적 공통체로 묶어낼까! 이런 것이 당대의 문제의식이 아니었을까! 비슷한 일이 다시 근대로 들어서는 독일에서, 신구교 간에 종교전쟁을 치르는 독일에서 일어난다. 나는 다시 우리시대가, 내전에 빠져드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일(인쇄술, 책의 대량보급과 정보전달/범위 속도의 가속화)과 현재의 우리(인터넷)는 매체의 변화, 공동체를 묶던 제도의 변화 속에서 이런 상황에 빠져든 것인 아닌가! 이런 생각 속에서 분열된 공동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매체, 그것을 묶어내는 콘텐츠(연극, 소설, 신문, 드라마 등)와 그것의 전달형식 등등에 관심이 갔다. 2007년 이후 계속 이 문제를 붙들고 있다. (2019.7.9 추가)

그리고 모든 시민이 들어와 볼 수 있는 정도의 극장, 이것도 중요하다. 동시에 한장소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집단적인 정서적 공감, 전염병과 상태에 빠져야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빠뜨리는 제도적/기술적 장치로서 우리 문명이 발명한 것은 텔레비전이다. 연극에 대한 관심은 텔레비전을 인터넷이 대체할 수 있을까하는 것에 있다. 기술적 가능성이 아닌, 텔레비전이 맡은 역할, 사회적 기능에 대한 질문이다. 개인의 수준까지 점점 파편화되는 인터넷이 이런 역할/기능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지역에 모여사는 개체(개인)를 공동체의 성원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 말이다. (7.10 추가)


그리스 세계인 식민시와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해상무역은 더욱 발전하였다. 기원전 6세기 아테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잇는 지협에 있었던 코린토스(Corinth; Korinthos) 주요한 해운 상업 강국으로 부상했다. 기원전 449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기원전 461년부터 429년까지 지속된 페리클레스 치하에 귀족정치는 민주정치로 바뀌었다.

민주정 신화적, 혈연적 신분 질서에서 맹목적 교조주의를 배격했고 귀족과 부자만이 아닌 전체 자유 시민들에게 지도력이 부과되었다. 모든 시민들이 참여한 정치적 토론을 통해 정책이 결정되었다. 개인의 독립적 의사 표시를 보장한 민주정의 출현과 함께 시정(市政) 대한 지식 전달 방식인 변론술이 급속히 요청되었다. 상호 설득을 통하여 견해의 일치를 구했으므로 설득술이 중요한 출세의 도구였다.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 토론 참여를 장려하려고 민회에서 말을 사람에게는 면세의 특권까지도 부여되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지중해의 중심지가 아테네에는떠돌이 교사 외교관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그리스 세계에서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서로 관습이 다른 나라들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여행을 통해 다양한 문화 현상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을 소피스트(Sophist) 불렀다. 개개 문화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얻어진 지식은  소피스트에게 어떤 절대적 진리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였다. 따라서 소피스트들은 사회적 제도가 금기나 마술적인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으로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이라고 주장했다. 전통적인 종교적, 도덕적 규약들은 인간이 만든 규칙과 관습들일 뿐이다.  

이들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1?~411 B.C.), 고르기아스(Gorgias, 483~375 B.C.), 트라시마쿠스(Thrasymachus, 459~400 B.C.) 등이 가장 유명하다. 프로타고라스는 현재 그리스, 불가리아, 터키에 걸쳐 있는 트라키아(Thrace)에서, 고르기아스는 이탈리아 시실리섬의 레온티니(Lentini)에서, 그리고 트라시마쿠스는 현재 터키 이스탄불 근처의 캘세돈(Chalcedon)에서 아테네로 왔다.

이런 소피스트들의 사상은 혈연에 기반했던 아테네의 귀족정치가 민주정치로 대치하는 과정에서 힘을 발휘했다. 소피스트들의 명료한 표현과 설득력이 깃든 화술(話術), 호메로스적 운문에서 벗어난 산문과 문법 등에 대한 실용적 기술들, 새로운 사고 방식이 시대 상황에 들어맞았다. 이들은 민주적 아테네의 시민들을 교육시킬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시적 구송(口誦) 통해 전승된 신화적 지식과는 다른 형태의 지식 새로운 생활양식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에서 정치적 교양을 가르쳤다. 소피스트는 대부분 다른 도시국가 출신의 직업적 교사였으므로 당연히 돈을 받았다. 상공업활동을 통해 부를 쌓은 신흥중산계급에 속한 시민들은 이들에게 국가 지도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비싼 수업료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들(소피스트들)이 항상 말하고 있는 덕(Arete)은 덕(德)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며, 말의 원래적인 뜻으로 새기자면 숙련(熟練)이라고 번역됨직한 말이다. 즉 이 때에 중요한 것은 정치적 숙련이다. 시대는 바로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시대였다. 새로운 땅을 점령하고 이용하는 사람들과, 의지를 관철하고, 그 무엇인가를 실행하고, 또 그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였다. 소피스트들의 학문은 거듭 말해지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교양이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의 교양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들을 양성해내는 것이었다.


소피스트가 있기 전에는 전통적인 토지귀족의 자녀들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교육 대부분은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견해와 관습이라는 가계적 전통 위에서 이루어졌다. 교육 내용이 혈통에 따른 도그마와 신화, 전설, 인습 등의 신비주의 위에 있었다. 이런 교육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요구를 만족시킬 없었다.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1911~1980) 미디어의 이해에서 문자의 출현과 함께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을 교육 매체, 정치 참여의 방식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추어리즘

3만여명의 아티카 시민들은 모두 민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말할 있었다. (말할 자격이 있었다가 맞을 것이다. 2019.7.9) 민회 광장(agora)에는 1 4 명이 동시에 앉을 있었고, 한달에 서너 정도, 일년에 40 모여 회의를 했다. 아테네의 민회에는 보통 번에 5 명에서 6 정도가 모였다. 민회에서는 법안 의결, 전쟁 선포, 조약 인준, 공직자에 대한 통제, 매년 10명의 군사령관 선출 국정에 대한 거의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민회 이외에 아테네의 법에서 요구하는 시민들의 공적 참여는 아주 많았다. 해마다 1 2천에서 1 4 명의 아티카 시민들이 공직에 참여했다.
 
현재의 행정부격인 평의회는 시민 5 명을 추첨하여 구성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평의회의 의장은 매일 아침마다 다시 뽑았고 민회의 의장도 겸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의장과 대통령의 임기가 하루였던 셈이다. 법관은 시민 3 6 명에 이르렀다.  2년간은 군대에 복무해야 했고 60세까지 징집상태에 있었다. 공무원도 추첨으로 뽑혀 1년씩 근무했다. 공직은 일년 내내 디오니소스 축제의 코러스 공연을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마을 행정 업무, 최고 공직자, 국경 수비대나 해상 동맹 부대에 배치된 군인,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 다양했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코러스 노래 경연 클레이스테네스가 토지 귀족의 혈연 중심 지역경제 단위인 부족을 10개의 순수 행정 단위로 재조직하는 민주 개혁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추측된다. 코러스 노래 경연(디튀람보스 경연)에는 아티카의 10 부족에서 각각 50인으로 구성된 성인 남자 코러스와 소년 코러스가 구성되어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합창곡을 상연했다. 1,000명이 노래 경연에 부족을 대표해 참여했다. 부족 합창대들은 오로지 아티카의 순수 시민들로만 구성되었다.
 
어떤 기능은 종종 전문지식과 숙련도를 요구했지만 이것을 위한 교육도 직업 공무원 제도도 없었다. 노동자 임금 수준보다 낮은 약간의 손실 보정 이외에 어떤 보상금도 없었다. 따라서 국가 행정은 시민들의 손에 의해 집행되었고 아테네인들은 시민이었지 신민(臣民) 아니었다.
 
특수 기술과 관련 기술 요하는 군사령관(스트라테고이)만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행정관들은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제비뽑기는 당시 관습적으로 널리 쓰였던 공직자 선출 방식이었다. 오늘날의 총리나 대통령 또는 장관으로 있는 9명의 최상위 공무원인 집정관도 지원자 중에서 제비뽑기로 선출되었다. 집정관 선출 방식의 변화 (솔론, 페리클레스) 10명의 군사령관도 민회에서 선출되어 그들이 날마다 번갈아가며 지휘를 맡았다. 실제 페르시아와의 전쟁도 이런 방식으로 10명의 군사령관이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면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렇듯 고대 아테네에서 공무원의 자격 요건 전문성이 아닌 시민으로서의 덕성(arete)였다. 덕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낼 있는 정치적 숙련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나의 전문분야만 추구하는 장인의 작업하는 삶도 자유인이 해야 일이 아닌 노예적인 것으로 여겼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자유를지위, 인격적 불가침성, 경제활동의 자유, 제약받지 않은 이동의 권리로 구성되는 으로 이해했다. 장인은 작업 계약을 하면 자신의 자유로운 지위를 구성하는 요소 가지인 경제 활동의 자유와 제한받지 않는 이동의 권리를 일시적으로 포기하기 때문에제한적인 노예의 조건에서 살아간다 있다. 경제적으로 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의 탐욕적인 삶도 부끄럽게 여겼다. 그것은충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이기 때문이다.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인간의 조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삶(bioi)의 방식을 구별하였다. 그것은 삶의 필연성과 이것으로부터 비롯된 관계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었다. 이 선택의 필수적 전제조건인 ‘자유’는 자신의 생계에 기여하는 모든 생활방식을 배제한다. 여기에는 생존의 필연성과 주인의 지배라는 두 가지 강제에 예속된 노예적 삶의 방식인 노동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장인의 작업하는 삶과 상인의 탐욕적인 삶 모두가 배제된다. 간단히 말해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평생동안이든 일시적이든 간에 자유롭게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모든 사람은 제외된다. 이와 본질적으로 다른 나머지 세 가지 삶의 방식들은 ‘아름다운 것’, 다시 말해 필수적이지도 않고 또 단순히 실용적이지도 않은 사물에 관심을 가진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아름다운 것이 주어진 대로 소비되는 육체적 쾌락을 향유하는 삶, 폴리스의 국사에 관여하는 삶(폴리스에서는 탁월함이 아름다운 행위를 낳는다), 그리고 영원한 것의 탐구와 관조에 바쳐지는 철학자의 삶(영원한 것의 지속적인 아름다움은 인간의 개입에 의해 산출될 수도 없으며 그것들의 소비를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아래 단락은 위에 동일한 것이 있다 ---
 
이들(소피스트들)이 항상 말하고 있는 덕(Arete)은 덕(德)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며, 말의 원래적인 뜻으로 새기자면 숙련(熟練)이라고 번역됨직한 말이다. 즉 이 때에 중요한 것은 정치적 숙련이다. 시대는 바로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시대였다. 새로운 땅을 점령하고 이용하는 사람들과, 의지를 관철하고, 그 무엇인가를 실행하고, 또 그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였다. 소피스트들의 학문은 거듭 말해지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교양이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의 교양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들을 양성해내는 것이었다.

 
--- 아래부터는 단상/인용문만 써놓고만 부분 ---
 
권력의 분산을 위한 극단적 아마추어리즘의 수용
인간은 본래 잠재적으로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

▸   "제비뽑기는 당시 관습적으로 널리 쓰였던 공직자 선출 방식"을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린 너무 전문가주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아렌트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한다.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가나 전문가(관료)에게 맡길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군 부재자투표 부정을 양심선언한 이지문 중위는 <추첨 민주주의 이론과 실제: 직접 대의 민주주의를 보합하는 새로운 시민 정치 패러다임의 모색>이란 책을 썼다. 우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대통령을 제비뽑기로 뽑는다면 어떨까! 이렇게 하려면 이런 태도/전제가 필요하다. "인간은 본래 잠재적으로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그리고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그것이 발현된다고. (2019.7.10)

페리클레스 마라톤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며우리의 평범한 시민들은 비록 생업에 종사하기는 하지만 공무의 공정한 심판관들이다 주장하고 있다.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있다고 해도 우리 모두 그것을 비판할 있다. 우리는 논의를 정치적 행위에 대한 장애물로 보지 않고 현명한 행위를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예비행위로 본다. ... 요컨대 나는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학교이며, 아테네의 모든 개인은 적절한 재능을 기르고 위기에 대처하며 자립적일 있도록 길러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적 학습기관의 역할을 것이 바로 연극이 아닐까?

 
연극, 공적 공간
아렌트

 
 

심지어 시민 내에서도 혈통과 부에따라구분 있었다.

아티카 지역의 30 정도의 인구 도시 거주자는 15만이 안되었다. 지금으로 보면 중소 도시인 아테네에는 1 명이 넘는 수용인원을 가진 극장이 있었다. 극장에서는 연간 백편의 연극공연이 있었고 대다수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연극이 공동체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들이다. 연극은 아테네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중심요소였다. 

연극은 가장 중요한 하나의 사회적 교육기관 이었다.

 

 

... 이정린 ...

양피지에서 파피루스의 출현에 따라 운문에서 산문으로의 변화가 가능했다. (플라톤서설 .. 뒷쪽 파피루스 나오는 )

 

정점에 페리클레스

공동체의 생활방식과 경험이 연극, 코러스의 노래, 등에 반영되어 전체 시민들에게 전달되었다.

   

앞서 살펴본 뤼시스트라테처럼 연극은 이럴 아티카 시민들이 정치적 ...

 

 

연극공연은 아테네의 공동체의 전통과 사회문화적 규범, 기원전 492년부터 시작된 오랜 전쟁상태의 지속 등을 반영한다.

 

민주정과 연극을 바로 이어붙이기 어렵다. 스파르타에서는 연극이 없었을까? 확인 필요 ... 없는 같은데 ...

 

사회적 비용부담을 했을까? 여기에 투자를 했을까?

구어문화의 특징 .. 맥클루언 .. 문자문화에서 구어문화로 


 

[... 희극공연] 페이지86 주석74 애국주의적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594 솔론이, 80여년 후인 508~507년에는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주개혁을 실시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독재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도자기 파편에 6,000 이상을 얻은 사람은 10 이상 아테네에서 추방하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시민에게 완전히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했다.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 ~ 449) 고대 그리스는 경제적・문화적 발전을 거두었다. 중심지인 아테네에서는 노예제 기반의 민주주의적 공화제가 강화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수병으로 참가하게 아테네의 민중들은 자신들이 아테네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원전 461 페리클레스(기원전 495년경 ~ 429) 아테네 정계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관리의 추첨제, 유급 관리제를 도입했다. 국가 제전에 참가하는 자들에게 수당을 지급해 가난한 사람도 관직에 오를 있도록 했고, 민중들이 국가의 정치 활동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아테네에서의 이러한 민주정의 발전이 아니다. ‘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넘어서 동시에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했을까?’이다.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 연극관람이 민주정에 참여하는 방식의 하나로 중시됐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 문화 발전의 중심지는 아테네였다.



-------------- 참고 문헌 / 주석

 박홍규, 플라톤 다시보기, 필맥 2009, pp.129~130

200,000명의 시민 이외에 110,000명의 노예와 28,500명의 외국인이 있었다. 따라서 아테네는 35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시민 18 이상의 성인 남성은 대략 3~5만이었다. 이중 30 이상으로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소유한 사람은 3분의 2 정도 였다

 오스카 G. 브로켓프랭클린 J. 힐디, 연극의 역사 I, 연극과 인간 2005, p.72

 이정린, 아리스토파네스와 고대그리스 희극공연, 한국학술정보() 2006, p.47

 

 백경남, 민주주의론, 법지사 1989, p.73

  기원전 416 그리스 아테네의 비극시인 아가톤은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을 , 기쁨을 나누기 위해 향연(symposion) 연다.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초대되었는데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릭시마코스, 아리스토데모스 당대 최고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와 철학자 소크라테스 였다. 모두 당대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전날 우승의 기쁨과 축제의 피날레를 즐기며 술이 깼다고 너스레를 떨며, 오늘은 술을 조금만 마시자고 입을 맞춘다. 술을 강권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주량껏 마시면서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향연을 즐기기로 한다. 향연에서 이야기된 주제는 에로스(Eros), 사랑이다

  아가톤의 집에 도착한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의 지혜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한다. “∙∙∙ 자네의 지혜는 찬란하고 급속히 자라고 있어. 얼마나 환하게 그것이 아직 젊은 자네한테서 튕겨 나왔고 그저께(비극경연대회 우승일) 3만명 이상의 헬라스 사람 앞에서 과시되었던가!” 이때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54 쯤이었고, 아가톤은 31 쯤이었다.

 

 최명관 옮김, 플라톤의 대화 <향연>, 종로서적 1992, p.227

 플루타크(Plutarch), On the Glory of Athens, CAD 148f. 이정린, 같은 , pp.88~89에서 재인용. <박코스의 여신도들>, <페니키아의 여인들>, <메데아> 유리피데스의, <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소포클레스(497 ~ 406 B.C.) 작품이다.

 이정린, 같은 , p.9

 스테파노 마기, 그리스 -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생각의 나무 2007, p.56

 에릭 A. 해블록, 플라톤 서설 - 구송에서 기록으로, 고대 그리스의 미디어 혁명, 글항아리 2011, p.54

 해블록 교수는 전체에서 플라톤의 국가政體 분석하면서말하는 (구송)’에서쓴다는 (기록)‘으로의 변화, 이에 따른 사고 방식의 변화가 그리스 철학의 시작과 연관되어있음을 해명하고 있다

 

  () 시민들의 공동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백과사전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책의 1 <이미지의 사상가들> .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구름>, p.71

 에릭 A. 해블록, 같은 , pp.56~60

 김헌, <웃고 싶은가? 아리스토텔레스시학2 찾아라>, 한겨레신문 2010.11.20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뤼시스트라테>, 단국대학교출판부 2008, pp.223~225, pp.274~276

 

 섹스파업 맹세 부분은 외설스러워 논지를 잘살릴 있기에 김헌의 번역을 인용하였고, 단락 구분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따라 나누었다.

 이정린, 같은 , pp.22~28

 스테파노 마기, 같은 , p.56,  p.61

 박홍규, 희랍 철학 논고 <서양 고중세 철학사 개관>, 민음사 2007, p.229

 사무엘 E.스텀프, 西洋哲學史, 종로서적 1989,  pp.43~49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 철학사 - 상권고대와 중세, 이문출판사 1988, p.93
쿠르트 프리틀라인, 서양철학사, 서광사 1988, pp.50~54

 이정린, 같은 , pp.65~66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1, pp.61~62

 스테파노 마기, 같은 , p.106

 박홍규, 플라톤 다시보기, 필맥 2009, p.118

 

포퍼, 열리사회와 적들 ...  p.225 재인용

 이정린,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연구 1* -고대 아테네 공동체와 희극공연, 독일문학

2019/07/10 00:39 2019/07/10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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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쓰던 글이다. 2007년 <미디어2.0> 서문에서 벤야민의 아우라의 부활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했었다. 벤야민, 맥루한(매클루언), 플루서, 뒤르케임 등에 관련된 책을 읽었나보다. 지금도 벤야민 읽는 것을 계속하고 있고, '아우라의 부활'에 대해 심혜련교수가 쓴 책도 나왔다.

좀 되었지만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를 읽고, 벤야민-푸코-들뢰즈를 이어붙여 볼 수 있는, 어딘가 연결되는 것 같은데 하는 지점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아우라를 '장치-배치'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다. 반종교개혁, 또는 카톨릭혁명을 통해 바티칸이 만들어내려고 했던 '성스러운 장소성'-제의적 효과, 정말 그것을 만들어낸 '종교적' 장치의 작동 결과/효과로 아우라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 10점
조르조 아감벤.양창렬 지음/난장

어떤 하나의 배치가 우리의 몸을 변양(옷 매무새를 바로하게 하는 등의 mode의 변화)시키고, 어떤 감응(성스러운 느낌, 신과 합일된 듯한 느낌 등)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다. 르네상스의 예술과 건축술은 이렇게 종교와 결합된다/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전 글들에서 언표적 배치에 의한 '비물체적 변환 (또는 비물질적 변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우린 당연하게도 기계적 배치에 의한 '비언표적 변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사물(물질, 관계, 구조 등)의 배치/질서(특히 장소적 위치)가 바뀌면서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이론(의미) 없이 먼저 의미가 만들어져버렸다고 해야하나! 비물체적 변환에 대한 유비적인 표현이다. 물질운동의 표면효과/사건으로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면 이론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기에. (하지만 인간 자체가 의식(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론/전략은 여전히 중요하다.)

교회-성화(성서화)-예술 등으로 연결된 카톨릭적 배치가 기술적 복제물인 사진이 나오면서, 그 예술품(사진)의 위치가 바뀌면서 의미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효과가 제의적인 것에서 전시적인 것으로 바뀐다고 벤야민이 말했다고 생각한다.예술/종교의 층이 그것과 별개로 발전한 기술의 층과 만나면서 예술은 탈영토화되고 다른 것으로 재영토화 된다. 벤야민은 그것을 '비평적'으로 발견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해보자! 사진기의 발명에 의해 전통적인 예술품은 다양체가 되었다.  (사진-기술적 복제품인) 예술품은  다양한 장소에 위치해 그 숨겨진 의미나 효과가 (또는 역량/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보면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으로 짓눌려있더 TV(방송 프로그램, 콘텐츠)가 기술의 발전에 의해 하나의 다양체가 되어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결과 어떤 사건이, 의미나 효과가 나타날지 ...

아래 게재한 문서를 보면 검정색과 붉은 색 글씨로 되어있다. 먼저 쓴 것이 검정이고, 쓴 것을 보면서 다시 덧붙인 부분이 붉은 색이다. 아래 옮겨놓은 글에서는 붉은 색 대신 파랑색 글씨를 썼다. 그리고 가끔 나오는 붉은 색 글씨는 어떤 이유에선지 다시 덧붙인 것인데 본문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위의 붉은 색은 작은 글씨로 그때 그때 떠오른 생각이나, 다른 책에서 끌어왔으면 하는 부분에 대해 쓴 것이다.

이글 역시 쓰다가 말았다. 몇 권의 책을 들고 한달 이상을 궁싯거리며, 링크로 연결되 웹문서를 읽는 것처럼 어떤 책의 인용에서 그 인용된 책을 찾아읽고를 반복하면서 어떤 책을 찾아갔다가 그 책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
"나는 노상강도처럼 책을 읽는다. 이책 저책 띄엄 띄엄")  시작해야 할 외부적인 이유가 없는 것처럼 끝내야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고, 아마 또 다른 것에 관심이 갔을게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 이해가 끝났다고 생각했으니 더 이상 쓸 이유를 잃었을 수도 있다. 
 (아래 글에 '자기이해 부분: 논의의 핵심 단락의 시작-끝'을 찾기 쉽도록 녹색으로 표시해 둔다.)

관련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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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빌렘 플루서,  그리고 기술적 복제 시대의 우리, 2008.12.17일

여기 지금, 그리고 역사적 유일성과 진품성


발터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완벽한 복제에도 여전히 하나의 것이 결여되어 있다”• [가장 완벽한 복제도 원본을 대체할 수 없다. 결국은 원본을 대체할 수 없는 복제품이 스스로 하나의 위상을 가질 때 문제가 발행한다. 그리고 복제품이 원본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 원본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의 붕괴와 새롭게 나타난 복제품에 대한 존재론적 위상의 정립이 그것이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술작품이 놓여 있는 장소에서의 일회적 현존,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이다. 이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은 어떤 예술작품이 역사를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일회적 현존이 아닌 그 밖의 어디에서도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거니와, 예술작품은 그것이 존속하는 동안 그 역사에 종속되어 왔다.”

예술작품이 ‘그 역사에 종속되어 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예술작품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예술작품(the original)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예술작품의 역사성 때문이라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일회적 현존 안에서 예술작품의 역사가 이루어지며, 예술작품이 예술작품일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일회적 현존의 역사에 의해서이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역사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발생하는 작품의 물리적 변화, 소유관계의 변화, 그리고 어떤 예술작품에 대해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복사물의 종류와 수가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물리적 구조에서 겪은 변화의 흔적은 화학적 혹은 물리적 방식의 분석을 통해서만 추적될 수 있고, 복제에서는 수행될 수 없다.[수공업적 복제의 경우 이런 흔적을 추적할 수 있지만 이때는 이 작품이 복제가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될 때, 또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소유관계의 변화의 흔적은 전통에 관한 문제이며, 그것의 추적은 원작에 입각해야 한다. 그런데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에서 역사가 현실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이런 것보다는 복사물로부터 원본을 보호하기 위한 것 때문인 듯 하다.

“물론 예술작품의 역사는 그[물리적 구조, 소유관계의 변화] 이상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모나리자의 역사는 17세기, 18세기, 19세기에 모나리자로부터 만들어진 복사물의 종류와 수를 포괄한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고, 인간이 만든 것은 항상 인간에 의해 모방될 수 있었기 때문에 ‘변화의 흔적’들, 즉 어떤 예술작품의 역사는 추적되고 관리되어야만 했다. 배제의 역사, 복제를 원작과 구분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 관리의 불가능성, 또는 관리의 불필요성, 역사의 끝 <<이중섭의 빨래터 사건>> [역사의 상실 = 기술복제의 의미] 법적 제도적 관계만 남아 ... 저작권 같은

그는 “원작의 여기와 지금이 그것의 진품성의 개념을 결정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원작의 여기와 지금, 즉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이 그것의 진품성의 개념을 결정한다는 판단의 근거에는 역사가 있다. 즉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과 진품성을 관계 맺어주는 것은 역사성이다. 또는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어떤 예술작품이 진품인 것은 그것이 역사적으로 진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한다.

“사물의 진품성은 그 기원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물질적 지속으로부터 역사적 증거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의 총괄이다.”

“물질적 지속”은 예술작품의 현존성, 즉 여기에 지금 있는 예술작품이며, “역사적 증거물”은 앞에서 살펴본 물리적 변화, 소유관계의 변화, 수공적 복제물의 종류와 수 및 그 이상의 것을 포괄한다. 하지만 진품성은 어떤 사물의 물질적 지속에 근거를 둠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그것이 원작인지 모작(模作)인지의 여부는 역사적 증거물에 의해 보증 받아야 한다. 즉 진품성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 작품의 일회적 현존성과 역사적 유일성의 결합을 통해서이다.• [아우라, 탈맥락화, 역사 없음] {예술작품에서 역사로 향하는 발걸음과 역사에서 예술작품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원환을 이루면서 예술의 근거를 만들고 있다. 하이데거,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p.66} 이렇게 성립된 진품성의 개념은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를 맞아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 [사물의 진품성을 구성하는] 후자〔역사적 증거〕는 전자〔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전자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게 되는 복제에 있어서는 후자, 사물의 역사적 증거도 위협받게 된다. 물론 위협받게 되는 것은 역사적 증거 뿐이지만, 그러나 이처럼 위협받게 되는 것은 또한 사물의 권위〔진품성〕이다.”

문제의 핵심은 기술적 복제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게” 만드는 기술적 복제[이것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한다.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벗어난 것을 왜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을까? 두가지 차원에서 설명해야 한다.]이다. 벤야민도 기술적 복제가 “현존하는 예술작품을 훼손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과 이에 근거한 예술작품의 역사, 그리고 일회적 현존과 역사의 총괄로서의 예술작품의 진품성이라는 개념까지 도달한 후 이번에는 반대의 순환이 시작된다.

기술적 복제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도록 만들어내며 이를 통해 역사적 증거를 위협한다. 역사적 증거에 대한 위협은 다시 사물의 권위, 즉 진품성을 위협하고 결과적으로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벤야민은 복제의 고유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그것을 찾아 나선다. “진품성은 통상 모조로 낙인 찍힌 수공적 복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완전한 권위를 유지” 하지만 “기술복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기술복제에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도록 하는 것’[사람 능력의 변화, 또는 사람의 인지구조와 다른 기계적 인지구조, 그에 따른 효과 ... 아우라의 상실, 맥루한의 인간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현대적 지각의 특징-진중권 p.44’]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도록 만드는 기술적 복제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무엇일까? 역사, 담론이 진품성을 위협하는 속에서 우리는 담론의 물질성이란 개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아우라의 상실은 복제품에서, 원작에서는 아우라가 상실되지 않는다. 결국 이렇게 생각해 보자! 원작에 대해 자립적인 복제품이 아우라 없이 존재한다. 예술작품의 새로운 존재론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원작의 아우라가 상실되지 않는다. 원작의 지금, 여기의 가치가 더욱 올라간다. 왜냐 기술복제를 통해 사람들을 탈마법화(탈영토화) 시키면서 다시 영토화 한다. 예술의 장의 논리에 사람들이 끌려들어간다. 전시된 것을 보고 원작을 갈구한다. 등등


기술복제의 고유성, 사람의 능력을 벗어남


[역사적 유일성의 상실] 벤야민은 이것을 먼저 사진술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사진술은 사람의 자연적 시각, 즉 육안(肉眼)으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점(視點)의 선택이 가능하고 확대나 고속촬영 기법 등을 통해 자의적으로 시각(視角)을 변경할 수 있다. 이렇듯 기술적 복제는 수공적 복제와 달리 진품을 다양한 ‘봄(視)’의 방식을 통해 다시 세울 수 있다.[진열하는 것이 아닌 건립하다, 하이데거] 이런 방식을 통해서 기술적 복제는 수공적 복제보다 원본으로부터 자립적으로 될 수 있고, 자립적으로 된다.• [렘브란트전에서 LCD, 빔프로젝터 화면 앞에 모여있는 아이들] - 2008.12.27일 관람

수공적 복제에 대한 사진의 우월성, 하지만 탁월한 모작에 대한 르네상스인의 반응은 사뭇다르며, 모작이 하나의 예술작품, 즉 오리지널로 되기도 한다.

또 “기술적 복제는 원작의 모상을 원작 그 자체가 이를 수 없는 상황에 옮겨놓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술적 복제는 … 수용자들이 원작의 모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한다.[원격현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자]” “원작의 모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음반을 이용할 경우 수용자들이 음악당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음악을 자기 집의 방안에서건 자동차를 타면서건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사진을 이용할 경우에는 대성당이나 외국에 있는 미술관을 떠나 미술 애호가의 집에서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기술적 복제는 복제된 작품을 통하여 원본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 전시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기술복제가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도록 하는 것[인간의 확장, 맥루한]’은 원작의 모상에 더 가깝게 복제하면서도 원작에서 벗어나 자립성을 갖도록 하는 것, 또 이것을 대량으로 복제 가능하게 하여 여러 곳에 편재(遍在)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대중 시대에 널리 유포되는 한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품화될 수 있다. 기술복제의 대중적 유포, 또 이를 통한 무한한 전시 가능성이 다시 원작 전시에 대한 수요를 창출한다. 전시가치가 실제 자본의 증식,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벤야민이 말한 전시가치가 전개되면서 나타나는 ‘다른’ 효과, 예기치 않은 효과, 김상환,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pp.316~317의 내용에 대한 비평] 기술복제는 인터넷과 같이 시간, 장소의 극복을 위해여 존재했다. 처음 나왔을 때부터 ... 등등  기술/기계에 의한 창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자립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사고하는 기계를 최초로 생각한 누구?

주석 -----------------------------------------

• 이 인용문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가장 완벽한 복제도 원본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인용된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특별한 언급이 없을 경우 파시즘에 관한 문헌을 읽고 공부하는 CP Group(강유원, 김성열, 김재석, 박수민, 서민우, 신기철, 지주형)이 번역한 것을 사용하였다. 인용문 중 〔  〕 안의 말들은 역자들이 붙인 것이다. 필자가 추가하였을 경우에는 [  ]를 사용하였다. 이글에서 별도로 인용처를 밝히지 않고 “  ”로 표시했을 경우 모두 이글을 인용한 것이다.
   이 번역문은 http://allestelle.net/resources/2005/04/04/108 (2009.1.10)에서 볼 수 있다.  
   번역문은 


•• 어떤 예술작품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예술의 장(場)’이다. 이곳에서 예술작품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전기 작가, 문헌학자, 예술사가, 문학사 등이 활동하면서 전통, 운영 법칙, 모집 규칙 등 그곳에 필요한 역사를 갖춘다.

••• 쉽게 말해 역사적으로 진품이었기 때문에 진품이다. 또는 ‘여기, 지금’ 있는 어떤 예술작품이 진품임을 역사적으로 보증하기 때문에 진품이다. 진품임을 역사적으로 보증하기 위해 물리적 변화에 대한 분석부터, 전문가의 평가까지를 포함한 제도적 기술들이 만들어진다. KBS 방송 프로그램인 <TV쇼 진품명품>은 ‘예술의 장(場)’의 구성원인 고미술 전문가들이 출연하여 작품의 역사를 고증하고, 진품임을 보증하는 일련의 제도적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 안에는 TV(방송)이 가지고 있는 권위가 깊숙이 개입된다.

•••• 그 이상의 것, 즉 ‘예술의 장(場)’에서 생산된 어떤 예술작품에 관해 만들어진 담론(談論) 및 그것들 간의 역사적 관계, 또 이런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관계까지도 포괄한다.

••••• ‘일회적 현존성과 역사적 유일성’은 다시 ‘역사적 일회성과 실체적 유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김상환, pp317~318)

••••••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품이 처한 상황은 현존하는 예술작품을 훼손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여기서 훼손은 물리적 변화를 의미한다. (강조는 필자)

••••••• 여기서 ‘다양한 봄의 방식’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데 ‘봄(視)’은 단순히 보는 행위를 지칭하지 않는다. 한자에서 ‘視’는 어원상 똑똑히 보이다, 가만히 계속하여 보다, 자세히 보다 등의 뜻을 가진다.

•••••••• “수공적 복제”는 사람이 직접 보고 그린(또는 만든) 원작을 모사한 위조품을 말한다.

••••••••• ‘자립적으로 된다’는 것은 진품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시 진품이 가지고 있던 다른 잠재성을 풀어내 보여준다는 것은 아닐까?

•••••••••• 디지털 기술과 통신(Internet)의 발전에 의해 이제 미술작품과 음악, 영화 등을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웹 서버(web server)에 접속하여 볼 수 있다. 벤야민의 논의가 디지털 환경에서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대량’이란 측면에서 이제 ‘복제’가 하나씩 진행되는 모사가 아닌 ‘생산’이 된다.




기술복제와 대중문화의 출현


기술적으로 복제된 작품이 이처럼 원본에 대하여 더 많은 자립도를 갖고, 더 원작에 가깝게 대량으로 제작되어 유포될 수 있게 됨에 따라 예술작품의 사회적 성격이 앞선 시기와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기술복제 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를 비교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신앙과 관습에 기초한 집단적 사회”였던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 기독교적 전통에서 보면 예술작품의 수용자들(公衆)은 전체적인 사회공동체로 확장되어 있었다. 예술이 존재했던 장소들에는 문화적 공동체의 대다수가 함께 모여들었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예술작품을 받아들이고 채택된 약호(code)에 따라 이야기했다. 또 그 장소가 공동체의 만남의 장소로서 모든 수용자들에게 개방적이었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은 공적인 성격을 띠었다. 공동체적인 성격의 근본적인 균열이 존재하지 않고 유지되는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회에서의 예술작품들도 이런 형태로 사회적으로 수용된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만들어진 작품들 안에 드러나는 상징들의 의미는 사회 문화적 삶을 통해서 형성된 사전지식(pre-knowledge)에 의해 유식한 사람들만이 아닌 공동체 성원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경우 기독교적인 제도와 실천의 통합에 의해 그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사회적 환경과 대성당의 천정과 벽면을 차지했던 성화(聖畵)들 속에서 제시됐던 예술적 환경이 다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예술사적으로 보면 로마네스크와 고딕시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다음은 예술작품이 보다 제한된 방식으로 서로 다른 계급 또는 사회집단들에 의해 전유되는 시기로서, 균열되기 시작한 사회집단들, 또는 분화되기 시작한 계급들에 따라 다양한 예술형식들이 동시에 존재했다. 이때의 예술작품은 작가 개인의 천재성과 영감의 소산이라고 이해되면서 사회 전체를 위해 타당한 약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었다. 그보다 사회가 계급과 집단으로 분화되어 그 분화된 정도에 따라 각각의 계급 또는 집단에 맞는 약호가 다양하게 존재했다. 루이 14세는 통치 말엽에 그의 저택들에 걸려있었던 화란풍의 회화들을 가리키며 ‘이 끔찍한 것들을 치워버리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평화로운 중산층의 집안 장면이 군주에게는 대역죄(lèse majesté)의 범죄처럼 보였던 것이다. 주권자인 군주의 취미, 궁정의 취미 그리고 중산계급(bourgeois)의 취미 간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했다. 균열된 사회 속에서 전달자들의 약호들과 수신자들의 약호들 사이에는 언제든지 과도한 거리가 존재할 수 있었고 이로부터 절대적이고 해소되지 못할 오해가 발생 수 있었다. 절대주의 국가의 성립과 자본주의적 발전을 거치면서 사회집단이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이전 중세시대 수용자들(公衆)의 통일성은 다양성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했다. 벤야민이 그의 글에서 “전통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르네상스 이후의 시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은 문학, 미술 그리고 음악을 재생시키는 기계적 수단이 발전하는 시기로서, 작품들과 수용자들(公衆) 간의 관계, 작품들과 작품들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작품들과 수용자들 자체까지 변화가 시작된다. 기술적 방법들을 이용하면서 수용자들의 통일성이 다양성에 의해 대체되었던 이전 시기와 반대로 예술을 대중화함으로써 수용자들을 다시 통합한다. 예술은 대중문화로 대체된다. 대중매체는 예술을 기계적 방식을 이용해 대중적으로 생산하며 수용자들도 일정 정도의 교육을 받은 특별한 계층으로서의 교양인(敎養人)이 아닌 말 그대로의 대중이 그 주류가 된다. 대중매체를 통한 대중문화는 원본에 대하여 더 많은 자립도를 갖고, 더 원작에 가깝게 대량으로 제작되어 유포, 전시될 수 있다는 기술복제의 고유성에 위에서 성립한다. 벤야민은 아밸 강스(Abel Gance)를 인용하여 문학, 미술, 음악이 기계적 복제 수단인 영화를 통해 재생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화 될 것이다 … 모든 전설, 모든 신화 그리고 모든 신화적 인물, 모든 종교 창시자, 아니 모든 종교가 … 카메라 빛에 의한 부활을 기다리며 영웅들은 〔영화의〕 문 앞에 몰려든다.”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벤야민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의 논의 속에서 뒤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다.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권용선.. p.174를 볼 것

주석 -----------------------------------------

■ 여기서 언급하는 변화는 ‘예술작품의 사회적 기능’, ‘사회적 수용’ 방식의 변화이다.


■■ 최태만, 『미술과 도시, 예술가의 눈에 비친 도시와 삶』, 열화당, 1995, p.34

■■■ ‘상징들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채택된 약호(code)’이다.

■■■■ 예술작품의 사회적 기능, 또는 사회적 수용방식의 세 시기 구분은 『美學의 理解』(김문환 編, 문예출판사, 1989) pp.379~388을 참고할 것.
기계적 복제, 그것을 이용한 기계적 재생산 방식의 이용을 통한 대중매체의 발달과 대중문화의 등장, 이에 따른 예술분야에서의 변화 및 대중문화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등에 대해서는 심혜련, 「매체에 대한 미학적 접근 - 대중매체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고찰을 중심으로」(매체철학연구회 지음,『매체철학의 이해』, 인간사랑, 2005, pp.127~169)를 볼 것.

■■■■■ ‘영화를 통해 재생되는 것’은 ‘영화에 재매개(remediation) 되어 다시 살아나는 것'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다. 재매개를 통해 이른 예술 영역이 재조명되어 숨어 있던 의미가 더욱 부각될 수 있고, 영상을 이용함으로써 더욱 대중화될 수 있다.

■■■■■■ 문학이 기계적 수단을 통해 재생되는 것은 출판기술의 발달뿐만이 아닌 다른 미디어에 의해 재매개(remediation)되면서이다. 맥루한은 “영화의 내용은 소설이고, 극이며 오페라이다”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예술 영역 내에 있던 작품들이 하나의 새로운 작품 내에서 합쳐지며 이를 통해 작품들 사이의 관계가 변화된다.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p.10




기술적 복제품이 처한 상황


예술작품의 진품성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 작품의 일회적 현존성과 역사적 유일성의 결합, “물질적 지속으로부터 역사적 증거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의 총괄”이다. 그런데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게 되는 복제에 있어서는 사물의 역사적 증거도 위협받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함께하고 있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품이 처한 상황은 현존하는 예술작품을 훼손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사실 기술적 복제는 어떤 작품을 훼손할 수 없고 그 작품 자체의 “물질적 지속성”에 어떤 영향을 줄 수도 없다. 이것은 복제가 원작(the original)의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도록 만드는, 훼손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원작 자체보다도 먼저 “기술적 복제품이 처한 상황”●이 중요하고, 그것과 원작이 새롭게 관계를 맺음에 따라 원작 자체에서 일어나는 의미 변화가 중요하다.

“기술적 복제품이 처한 상황”은 수공적 복제품들이 처했던 상황과 비교할 때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술적 복제품의 고유성이란 수공적 복제품에서 발견되었던 특성에 대한 차별성이 듯 서로 다른 두시대의 복제품이 처한 상황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에 의해 벤야민이 복사물의 종류와 수까지도 예술작품의 역사에 포함된다고 말했던 시기와 “사물의 역사적 증거도 위협받게 된” 시기가 나누어진다. [사물의 역사적 증거도 위협받게 된에서 사물은 복제품이다. 벤야민은 원작을 상정하는 듯하지만 ... 나의 이해로는]

20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구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재현하는 것, 즉 복제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위작이 따라붙는 것은 어쩌면 미술이라는 예술의 타고난 운명인지 모른다. 모든 미술은 모방에서 출발했다. 세계를 모방하는 것, 곧 베끼기가 미술의 한 본령이다 보니 위작이라는 모방이 그 본령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원작의 개념이 없었던 옛날에는 이런 베끼기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방작(倣作)이라 하여 옛 대가의 그림을 임모하는 게 존경의 표시이자 창작의 한 방식이었다. 서양에서도 거장과 선생의 그림을 모사하는 게 중요한 배움이었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 조각을 수도 없이 베꼈다. 오늘날 실제 그리스 조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에도 그리스 조각의 성격과 특징을 깊고 광범위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상당 부분 이 모작들 덕분이다. 로마인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조각가로 하여금 이를 베끼게 해 그걸로 자신들의 빌라를 꾸몄다. 동일한 작품이 워낙 많이 베껴지다 보니 원작이 망실되고 모작이 다수 파괴되어도 끝내 살아남은 게 있어 그리스 조각의 특징을 오늘날까지 전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가가 도제들에게 그림을 가르칠 때 자신의 그림을 베껴 스타일과 기법을 익히도록 했다. 잘 베낀 그림은 스승이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그렇게 해서 번 돈은 가르침의 대가, 그러니까 수업료로 갈음됐다. 문제는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이런 모작들이 화가의 진작으로 전승되어 본의 아니게 위작이 되어버리곤 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스승의 그림을 베끼는 전통이 뿌리내린 한편으로, 진품에 대한 존중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 또한 르네상스 무렵이다. 르네상스 들어 고전 부흥의 바람을 타고 로마시대의 조각이 열정적으로 발굴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진품의 가치가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미켈란젤로가 몰래 가짜 로마 조각(<잠자는 큐피드>)을 만들어 팔았다는 일화는 당시 시장에 위작이 얼마나 많이 떠돌았는가 하는 사실과, 그에 반해 애호가들이 얼마나 진품에 목말라 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특히 예술가를 공방의 장인이 아니라 천재로 보는 관념이 생겨남에 따라 작품의 고유성과 원작성은 갈수록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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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란젤로(Michelangelo)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 스승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의 작품을 모방했다. <잠자는 큐피드(Cupid Asleep)>의 모조품은 1496년 훌륭한 조각품으로서 팔렸지만, 실제로 훌륭한 조각품인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있다  

조르조 바사리(1511-1574)는 《예술가 열전》에서 이렇게 썼다. 미켈란젤로가 실물대의 〈잠자는 큐피드〉를 조각하였다. 이것을 본 한 친구가 말하길,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이 조각 작품을 한동안 땅에 파묻었다 파낸 후 고대 조각 작품이라며 로마에 보낸다면, 아마 자네가 이곳 피렌체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을 걸세.” 미켈란젤로는 친구가 말한 대로 그 조각상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친구가 이 조각상을 로마로 가지고 가, 그곳에서 다시 땅에 묻었다. 그리고 이후 그 친구는 산 조르조 추기경(라파엘로 리아리오)에게 이것을 200크라운을 받고 팔았는데`―`몇몇 사람들이 하는 말이지만`―`이 친구는 미켈란젤로에게는 30크라운만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챙겼다. 그런데 추기경이 나중에 자기가 산 큐피드가 진짜 고대 그리스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돈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비웃음을 샀고, 심지어 조각 작품의 가치를 알아볼 줄 모른다고 비난받았다. 사실 그 조각상은 완벽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웃든 말든, 옛날에 만들어졌든 얼마 전에 만들어졌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략) 이런 일들로 인해 미켈란젤로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앞서 수공적 복제와 달리 기술적 복제품이 갖는 고유성에 대한 벤야민의 분석을 살펴보았다. 이곳에서는 “기술적 복제품이 처한 상황”을 조감하기 위하여 예술사 내에서 수공적 복제에 대한 접근을 살펴보겠다.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게 되는 복제의 2가지 의미 == 기술적 복제를 통해 동일한 것이 반복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이 보증받기 어려운 복제, 역사성이 사라진 복제  // 원작과 다른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받아 원작과 동떨어진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하는) 기술적 복제

대중매체의 특성이 역사로부터의 탈맥락화가 아닌가? 특정 부분을  딱 잘라 보여주기, 앞뒤 맥락 고려 없이 인용하기 등

---------------------------- (자기이해 부분: 논의의 핵심 단락) - 시작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품이 처한 상황은 현존하는 예술작품을 훼손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술적 복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런데 물질적 지속성의 유지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근거한 일회적 현존성의 가치는 떨어진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김상환은 아우라를 하나의 속성으로 본다. 속성은 어떤 존재 자체 내에 내재할 수도 있지만 외적인 관계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있는 어떤 것일까? 들뢰즈의 접속, 관계에 의해 어떤 사물의 양태의 변화 등등] [왜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 일회적 현존성의 가치가 떨어질까? 아우라의 상실 때문에 ... 등등 그런데 예술작품의 기술적인 복제에 의해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성이 약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여기와 지금”이라는 일회적 현존성 자체도 단순히 ‘예술작품의 존속’, ‘예술작품의 물리적 구조’, 그리고 ‘예술작품의 물질적 지속성’에만 근거한 것이 아닌 세계와 관계하기 때문에, 세계 내 존재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관계성을 아우라(aura)라고 표현한다.[아우라를 실체와 속성의 관계처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관계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아우라의 부활을 관계의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위 글에서 <관계성 중 하나를 아우라라고 표현한다>로 하는 것이 더 맞을 듯 하다.그리고 한동안 아우라를 정동/감응의 한 형식으로 이해했다. 교회-예술장치는 아우라(특정한 종교적 내용을 담은 정동)을 일으킨다. 지금도 이렇게 이해한다. 그 정동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어떤 경우 마음의 습관/습속(?)으로 체화된다.  최근 이야기되는 디지털 기기의 미학화 현상, 디자인의 중요성 등도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쉽게 와닿을 수 있다. 아이폰의 아우라! 스티브 잡스의 아우라! 폰(디자인)과 매체, 특정 인물의 인생 역정이 계열화된 '장치'가 심미적 차원에서 형성(코드화-언표적 배치)된 것이다. 2019.7.3일 추가)

---------------------------- (자기이해 부분: 논의의 핵심 단락) - 끝

“예술작품의 기술적인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는 것, 그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그 과정은 징후적인데, 그것의 의미는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복제기술은, 그것을 일반적으로 표현할 때,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으로부터 단절시킨다.”

벤야민이 “예술작품의 일회성은 예술작품이 전통의 맥락 안으로 편입되어 있는 것과 같다”(p.5)고 말했을 때 이미 일회적 현존성의 약화는 전통적 맥락 안에 서 있던 예술작품들이 이것을 비켜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지적한 전통의 영역은 “창조성 그리고 천재성, 영원한 가치 그리고 비의성(秘意), … 소유관계, … 전적으로 살아있는 어떤 것, 비범하게 변화 가능한 어떤 것, … 예배의식” 등과 관계있다. 이 전통의 영역은 부르디외가 “신앙의 세계, 즉 천분(天分)에 대한 신앙과,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는 창작가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계인 예술의 세계이다. 이 영역은 “공시적으로 파악할 때 입장들(또는 지위들)의 구조화된 공간”인 예술의 장(場)으로 “그 자체의 전통, 운영 법칙과 모집 규칙을, 결국 자체 역사를 갖추고 있는 예술 생산의 세계”이다.

그런데 기술적 복제 상황 속에서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위축된다는 벤야민의 주장 이전에 ‘복제기술에 의해 복제된 것은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전통의 영역으로부터 단절된다’는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벤야민의 논의를 정리하면 예술작품은 일회적 현존성을 가지며, 이 일회적 현존성 때문에 역사적 유일성을 가질 수 있다. 예술작품의 존재(창작) 이후, 이 일회적 현존성과 역사적 유일성은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서로의 근거가 되고 이 위에 다시 진품성이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기술복제가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 즉 예술작품의 존재 자체의 지속을 위협하면서 실체적 유일성과 역사적 일회성, 그리고 진품성도 위협받게 된다. 벤야민이 기술적 복제품에서 발견한 사물의 지속성에 대한 위협은 복제품 자체의 원작에 대한 강한 자립성과 복제를 통한 원작의 무한한 확대 가능성 속에서 원작이 가지고 있던 맥락(의미)의 상실 가능성이다. 이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복제된 것이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전통의 영역과 단절되는 까닭은 모든 것을 떠나 우선적으로 대량 복제 가능성 때문이다. 먼저 기술적 복제가 수공적 복제보다 더 많은 자립성을 가진다는 의미는 기술적 복제품이 ‘예술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 더욱 예술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복제의 자립성은 서로 다른 수공적 복제와 달리 동일한 복제품의 양산으로 인해 그 실체적 유일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실체적 유일성을 잃는다고 말할 때, 기술적 복제품의 그 물리적 존재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 기술적 복제품에 대한 역사 없음을 의미한다. 즉, 예술작품의 진품성이 서 있던 일회적 현존성과 역사적 유일성의 해석학적 순환에서 한 고리인 역사성이 깨져나감으로써 다른 고리도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역사성이 무너져 내리는 이유는 대량 복제 때문인데, 대량 복제는 “원작의 모상을 원작 그 자체가 이를 수 없는 상황에 옮겨놓을 수 있다.” 원작 그 자체가 이를 수 없는 상황이란 모상들이 원작의 역사 속에서 원작과 더 이상 관계 맺을 수 없는 상황[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제품들은 언제나 원작과 관계를 맺고 있다. 다만 원작이 이들과 관계 맺기를 거부할 뿐이다.]을 말하며, 관계 맺을 수 없는 이유는 “수 없는 상황”, 즉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전시가능성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기술적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는 무수히 많은 맥락을 무슨 수로 정리하여 원작의 역사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또 예술의 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이런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낄 수 있을까?


부르디외 - 예술의 장과 배제의 기술(푸코?)


부르디외는 벤야민이 추적되고 관리되어야 할 “흔적[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술의 장을 구성하는 몇 가지 징표들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한 작품에는 과거 혹은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 맺고 있는 객관적이고 때로는 의식적이기까지 한 “관계의 흔적들”이 나타난다. 이것은 벤야민이 “모나리자의 역사는 17세기, 18세기, 19세기에 모나리자로부터 만들어진 복사물의 종류와 수를 포괄한다”고 이야기한 것과 동일하다.

또 전기 작가처럼 생애를 보존하거나 초안과 밑그림, 필사본을 보관하고 그것을 수정하며 해독해나가는 문헌학자, 예술사가, 문학사가들과 같이 작품을 보존하는 데에 깊이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이들은 해당 장 안에서 생산되는 것을 보존하는 하고, 그러한 것을 보존하는 보존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 이익인 사람들이다. 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출현은 예술작품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도 이들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기술적 복제는 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원작의 역사 속으로,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기계복제의 대량 생산 가능성에 따른 무한한 전시가능성, 또 무한한 전시가능성에서 발생한 상황적 의미의 무한성 때문이다. 이제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품이 갖는 사회적 가치는 비평가들, 화랑 관리인들, 문예 학술 옹호자들을 통해서 보다 자본주의적 상품 속에서나, 예술작품에 대한 교육적 사용 속에서 찾아야 한다.

결국 우리는 기술적 복제가 수공업적 복제와 달리 예술의 장에서 배제되는 동기를 그 질(質)이 아닌 양(量)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벤야민이 말하고 있는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게 되는 복제”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또 추적되고 관리되어야할 어떤 예술작품이 그 양적 팽창에 의해 관리가 불가능해질 때, 즉 예술작품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없을 때 배제의 논리가 장(場 ) 안에서 자라나는 것 아닐까?

어떤 예술작품이 자기 자신의 일부인 기계복제와의 관계성(역사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 예술작품은 물질적 지속성을 보증하는 사회적 원천인 일회적 현존과 그것의 역사성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이런 상황에 직면한 예술이 다른 층위로 존재론적 이동을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 팝아트는 반대다. 무수히 많은 상품을 탈맥락화해 다시 예술작품으로 바꿔놓는다. 무수히 많은 맥락 - 역사 구성의 불가능성을 의미, 기의 없는 기표들의 난립(뒤르케임주의 문화사회학)

이 관계의 흔적들에는 “한 예술가와 다른 예술가들 사이의 관계(객관적이며 교류의 형태로 실행되는) 전체, 그리고 이를 넘어서 작품 생산에 참여한 동인(動因) 전체 혹은 최소한 작품의 사회적 가치 전체(비평가들, 화랑 관리인들, 문예 학술 옹호자들 등)”가 포함된다.●●●●●●●●●●●

한 것과 동일한 의미

아우라의 위축=장이 깨짐, 역사의 없어짐, 장이 없어짐, 역사적 맥락이 사라지고 개별적인, 영겁회귀(?, 차이적 반복)이 일어남, 벤야민은 장을 인식하고 있었다. 관중의 비판적 정신을 높이 사는 것은 장의 참여자가 아닌 관중이 새로운 예술을 정의한다는 ... 정의할 수 있다는 ... 복제기술이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으로부터 단절시키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능하다. 더 이상 예술이 아닌 ... 자에서 빠져나간 예술?, 반예술?

그런데 복제기술은 예술작품이 이런 전통적 개념들과 맺고 있던 관계들을 위축시켜 “전통의 영역으로부터 단절”(p.3)시키거나, “전통의 동요”(p.3)를 불러오거나, “전통가치의 청산”(p.3)을 야기하거나, “전통적 내용(을) … 무가치하게”(p.3) 하는 효과를 창출한다.

기술적 복제품들은 역사적 유일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원작의 역사적 유일성을 강화시켰다. 탈맥락화를 탈마법, 탈마술화로 읽자. 그러면 문자가 나오고 역사가 나온다. 빌렘 플루서로 이어져 나갈 수 있다. 처음 사진이 사용되던 방식은 무엇인가? 문자를 보완하는 용도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사진이 다시 문자를 넘어선다고 플루서는 지적하기는 하지만 ...
[복제품을 전통의 영역에서 단절시킨다는 의미는? 우선 전통의 영역에서 단절된다는 것을 그 예술작품의 역사에서의 추방 정도로 이해하고, 벤야민이 말하는 것은 역사의 추방이 아닌 전통적 맥락 안에서의 단절, 아우라적인 존재방식, 즉 종교적인 제의의식과의 단절이다] 위축된 아우라에 대하여 살펴보자. 벤야민은 역사적 대상인 예술작품에서의 아우라 개념을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를 먼 것 - 그것이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해도 - 의 일회적 현상으로 정의한다. 어느 여름날 오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지평선 너머의 산의 능선 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것 - 이것은 이 산의 아우라, 이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작품에서의 아우라를 자연적 대상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까닭은 "자연적 대상은 … 손상받을 핵심을 가지고 있지 않"(p.3)기 때문이다. 손상받을 수 있는 핵심이 예술작품의 진품성인 한 벤야민은 자연은 기술적으로 복제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연의 일회성, 자연 그 자체를 복제하지 못함에서 오는

주석 -----------------------------------------

● 
강조는 필자

●● 원작 자체의 의미 변화’는 ‘원작 자체의 사회적 의미 변화’, ‘원작 자체의 사회적 수용방식의 변화’, 더 나아가 ‘원작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의 변화’까지를 포함한다.

●●● 피에르 부르디외,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솔, 1994, p.232

●●●●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책, p.127

●●●●●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책, p.234

●●●●●● ‘예술작품의 존재(창작) 이후’라는 말에서 물리적 구조(예술작품이라 평가받는, 또는 평가받을 그림 자체)의 역사(또는 담론)에 대한 선차성(先次性)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서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되고, 또 그것의 진품성(예술작품 됨)을 인정받는다고 할 때 선차성이라는 개념은 점점 빛을 잃게 된다. 저자의 죽음 까지

●●●●●●● 벤야민이 예로 들었던 모나리자의 모상들도 그 시대를 지나 우리시대가 되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 수공업적 특성 때문에 모작들은 원작과 다른 특이성과 시간이 지나면서 자체의 역사(물리적 구조의 변화와 소유관계의 변화를 포함한)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책, p.131

●●●●●●●●●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책, p.131을 볼 것. ‘예술작품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연적인 것이다’는 다시 ‘예술작품이 존재하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이다’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또 예술작품의 대신 부르디외는 ‘장(場)’을 놓고 있는데 이를 ‘예술작품’으로 바꾸었다. 예술작품은 예술의 장을 통해서만 예술작품이 되며, 어떤 문화적인 장의 존재는 특정 입장에 선 지식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푸코의 권력-지식(앎)의 도식이 이곳에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한다.

●●●●●●●●●●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책, p.234

●●●●●●●●●●● ‘자기 자신의 일부인’을 ‘자기 자신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또는 플라톤식으로 ‘자기 자신을 분유(分有)한’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술복제된 사진은 원작과 적극적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원작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책, p.234

●●●●●●●●●●●●● 복제와 복사물(위조, 모사)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벤야민이 말하는 복제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동시 상영되는 영화, 디지털 사진기로 찍혀 전송되는 사진에는 원본이 없다. 진품성이라는 개념은 위조 앞에서는 힘을 발휘해도 복제 앞에서는 무력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은 (기술적으로) 복제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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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부재 - 플루서, 문자문화에서 다시 영상문화로
기술적 복재 - 원본의 사람짐은 역사의 사람짐, 아우라의 부재를 역사의 부재로 읽으면 ...

아우라가 맥락적 독해라면 역사는 어떤 비평가, 소유자(관계)의 사라짐으로 인해 역사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 .. 이때 우리는 다시 어떤 과거의 예술적 전통을 넘어 새로운 존재 관계 속에서의 아우라를 알게 된다. 일대일 관계가 아닌 일대다나 다대다(?)와 같은 관계 ...

아우라의 상실의 진보성은 결국 전통에 관한 문제를 흔들기 때문 ... 전통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우라는 담론의 물질성처럼 만들어지는 것, 구조화 되는 것 아닌가?

인간이 아닌 기계가 만들 것 플루서...

그런데 이 역사성이 요구되는 현실적 근거는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보다는 이것을 방해하는 복사물들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변화의 흔적들로 구성된 역사는 특별한 문화적 장(場)인 예술계가 원작을 지키기 위해 만든 담론적 실천의 산물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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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계적 유형들은 누진적이었다. 첫 유형에 이어 두 번째 유형이 나오더라도 첫 유형은 역사 속에서 고착화되어 그것을 유지했다. 하지만 세 번째 유형의 등장은 모든 것을 좀 더 급속하게 변화시킨다.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적 복제 이전의 예술을 전통적이라 할 수 있지만 기술적으로 복제된 예술작품의 경우 그렇지 않다. 존재론적 위상이 변한다.


복제에 의한 효과의 증폭


“하나의 미디어는 다른 미디어가 ‘내용’으로 주어짐으로써 그 효과를 높이고 강력해진다.” 아우라의 강화(원작에 대한). 복제에서 아우라는 없어도 전통적 의미에서 맥루한 p.20


이제 예술은 기술 복제에 의해 앞의 시기들과는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을 보면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미디어는 메시지이다. 내용이 아닌 형식의 변경에 따라, 기술에 따라 새로운 효과가 발생한다.]

주석 -----------------------------------------

■ 이것이 전통에 관한 문제와 이에 근거하여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사회적 실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2019/07/02 22:54 2019/07/02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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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TV 역할 중의 하나가 사회적 통일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종교(Civil Religion)였다 말한다면 루소(J. J. Rousseau) 동의할까? 1762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우리들 각자는 자기의 신체와 모든 힘을 공동의 것으로 하여 일반의지(一般意志) 최고 지도하에 맡기고, 우리 모두는 구성원을 전체 가운데 불가분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결합 행위가 성립하는 즉시 계약자인 개인들 대신에 하나의 정신적이고도 집합적인 단체가 형성된다. 단체는 집회가 가지는 투표권과 같은 숫자의 구성원으로 조직되며, 결합 행위로부터 통일과 공동의 자아 그리고 생명과 의지를 받는다. 이처럼 모든 개인들의 결합에 의하여 형성된 공적 인격(公的 人格) 오늘날에는 공화국(共和國)이라고 부른다 쓰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국가는 신( )이외에 왕을 가지지 않았던, 왕이 신이었던 신정정치(神政政治) 국가와 같이 배타적인 국교(國敎) 가질 없다. 왜냐하면 배타적 국교가 이미 존재하지 않았고**, 교의(敎義) 시민의 의무에 배치되지 않으면 다른 종교를 허용하는 종교는 모두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화국은 전통적 종교가 제공하던사회를 결합해 주는 강력한 유대 효과 사용하지 못한다.

이때 공화국의 ....

신이 정치사회의 통솔자였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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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J. 루소, 『사회계약론()(범우사, 1991), pp.27~28

 ** 1598 앙리4세가 발표한 낭트 칙령에 의해 개신교 신자들(Huguenots) 로마 가톨릭 교도와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고, 프랑스는 이를 통해 근대 유럽에서 처음으로 개인적인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나라가 되었다.

1562년에서 1598년까지 벌어진 프랑스의 종교전쟁인 위그노 전쟁의 종결과 함께 프랑스 국가 통일의 출발점이 되었다.

낭트 칙령의 주용 내용은 ①로마 가톨릭 이외의 이단을 탄압한다는 기존 조항이 삭제, ②파리 시내를 제외하고 개신교 예배가 기정사실로 인정된 지역에서의 허용, ③개신교 신자의 재산상속, 대학교 입학, 관리취임의 허용, ④개신교 신자가 장악한 요새가 종교의 자유를 위한 안전지대로 인정, ⑤파리 고등법원 지방의 고등법원에서의 분쟁기구에 개신교 신도 참여의 제도적 보장 등이다.

하지만 1685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통해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개신교를 불법화했다.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중심 국가로 되돌아갔고 이에 따라 가까운 개신교 신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국외로 떠나게 되었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시민종교 논하는 배경에는 프랑스 유럽에서 발생한 종교전쟁, 정치전쟁이 있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가 교회가 아니고 통치자가 교주가 아닌 , ‘교회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말하는 자는 누구나 국가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의는 오직 신정정치에만 적합한 것으로, 외의 정치에는 극히 유해한 것이다. 앙리4세가 로마의 구교를 받아들이면서 주장하고 있는 이유란, 실상 모든 정직한 사람들은 종교를 버려야 하고 특히 합리적으로 생각할 아는 모든 군주도 종교를 버려야만 이유인 것이다.”

루소는 공공의 이익을 첫째로 생각해야 군주인 앙리4세가 1593 개신교에서 다른 종교를 이단 시하는 불관용의 가톨릭을 선택하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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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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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20일 쓰던 글이다. 이 글에 이어서 쓴 글이 어딘가에 있을텐데, 그 글을 찾으면 업데이트 예정이다.(2019.7.2)

루소의 이야기는 매클루언이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미국에서 TV 중계와 함께 일어났던 '제의적'인 반응/효과들을 분석했던 글과 연결해서 써보려고 했었다. 그리고 뒤르케임의 문화사회학과도 연결하고 ... 
2019/07/02 09:07 2019/07/02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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