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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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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3년 사이에 쓴 글인 듯하다. 6월 19일 올린 ⟪뉴미디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고대 그리스의 연극, 공적 공간> 부분은 아래 글의 일부만을 떼다 놓은 것이다. ⟪뉴미디어 탐구⟫란 큰 제목으로 이리 저리을 끌쩍대면서 시간을 보내고, 이것 저것을 찾아보던 때이다. 따로 제목도 없다.

이 글을 쓰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첫 세 단락에 있다. 세번째 단락은 '박홍규,⟪플라톤다시보기❯, 필맥, 2009년, pp.129~130'을 보면서 갖게된 의문을 써놓은 것이다.
 
플라톤 다시보기 - 10점
박홍규/필맥
 
시간이 되면 참고/인용된 책과 논문들에 대한 주석을 업데이트해 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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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관람 수당

30년 가까이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년 B.C.)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8개월이 지난 다음 해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이 부활한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결성해 50년 간 지속된 페르시아전쟁(499 ~ 449년 B.C.)에서 승리했을 때와 비교하면 과거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을 때이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우리 시대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이 지급됨으로써 참여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민주정이 부활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됐다.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 연극관람이 민주정에 참여하는 방식의 하나로 중시됐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생각엔패전 해결할 다른 문제들도 많았을텐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아테네 민주정은 연극관람 수당을 지급했을까?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국가 재정에서 연극 관람료를 지불한 것은 페리클레스(Perikles, 495? ~ 429 B.C.) 시대부터이다. 농번기의 일손 부족 때문에 축제 참가가 어려운 농촌 시민들의 참가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에서 시민들의 입장권과 일비(日費) 지불하기도 했다. 페리클레스는 배심원, 500 평의회 의원, 추첨에 의해 임명된 공직자 등에게 국가가 수당을 제공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시민들이 협의회와 재판소에 나가도록 하기 위해 국가는 법으로 일당과 급식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가난한 시민들도 생업을 일시 중지하면서 공직에 나갈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테네인들은 연극관람을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시했다 것을 있다.

고대 그리스의 극장의 크기 보면 몇십 정도 들어가는 소극장에서 연극을 우리의 경험을 압도한다. 5세기 후반 아티카(Attica, 아테네를 포함한 주변 지역)에는 20만명의 시민이 살았다. 이들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소유한 30 이상의 남성은 대략 2만에서 3만명 정도였다. 장소에서 10분의 1 정도의 시민이, 참정권자 대부분이 함께 공연을 있었다. 디오니소스 극장의 석조 객석은 14,000명에서 17,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과장이었겠지만 플라톤(Plato, 429 ~ 347 B.C.) 향연에서 기원전 416 축제에 3만명의 관객이 참석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이런 거대한 극장에 모여 연극을 보았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연극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다시 묻게 된다.

아테네에서 모든 드라마 번만 공연되었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 신에게는 오직 최초의 수확물만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연은 축구 경기처럼 일회적이었다. 극장은 축구 경기장처럼 한번에 수만 명의 관람자를 수용할 만큼 커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연된 작품의 재공연이 허용되긴 했지만 장기 공연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재공연을 위해서는 민회의 결정이 필요했고, 아테네 아닌 주변 농촌지역에서 열린 다른 축제에서 상연되었다. 하지만 공연의 일회성도 거대한 극장의 필요성을 바로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함께 모여서 연극을 보아야 사회적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아테네인들이 “<박코스의 여신도들>, <페니키아의 여인들>, <오이디푸스> 메데아 혹은 엘렉트라의 불행을 공연하는데 제국을 유지하고 페르시아인들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드는 비용보다 많은 돈을 지불했다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이 크게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3 진행된 연극 경연인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를 위해서는 대략 노동자 100가구 정도가 4 생활할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테네가 일년 해군을 유지하는 비용의 10분의 1 달하는 돈이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이 연극에 이렇게 사회적 비용을 투자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직접적인 연구는 없지만, 우리는 당시 연극이 가졌던 사회적 중요성을 추론해 수는 있다.


 폴리스

폴리스(polis) 공동체를 뜻한다. 폴리스는 정착지의 물적 구조(material structures) 아닌 정착지를 이루어 사는 사람들, 시민을 가리킨다. 이들은 종교적 일체감으로 묶여져 있었다. 농촌 공동체들, 촌락들의 기본 구성은 노예가 포함된 대가족인 오이코스(oikos, , 가족)였다. 오이코스들은 경작에 의존하는 자급 자족 생산단위였다. 따라서 오이코스가 생산하지 않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농장의 잉여 생산물을 교환해야 했다. 이런 배경으로 교역이 고대 그리스 사회의 원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폴리스는 몇몇 촌락들이 합병되는 촌락집주(村落集住, synoikismos) 과정을 거쳐 형성된 도시다. 처음에는 제단, 다음에는 신전으로 이어지는 장소, 공통의 예배소를 중심으로 뭉쳐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고, 이런 의례가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주었다. 거주민들은 서로 만나 물물 교환을 하고, 공동체의 운영을 논의할 있도록 중심에 위치한 개발된 장소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장소가 아고라(agora, 광장)였다. 독립적인 가족들은 통일된 경배장소,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라는 강력한 상징과 아고라에서의 모임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러한 물적 구조를 중심으로 방어벽이 처지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방어벽은 동양에서는 수천 동안 있었지만 폴리스에는 처음 도입된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아테네는 아테나 여신에 대한 경배의 중심지인 아크로폴리스와 회의와 행정의 중심지인 아고라를 중심으로 통일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후 아티카의 발전과 함께 각종 축제와 행사, 의식이 추가되었고 이런 것들은 시민들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강화시켰다. 처음에는 왕이, 다음에는 정해진 기간 동안 법에 따라 봉직했던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執政官, archon) 행사했던 집행권을 통해 시민은 연맹(koinon, 코이논)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폴리스는 서양 최초의 법치국가라 있다.


연극, 백과사전적 교육 매체

고대 그리스에 문자가 보급되고 폴리스가 확립되는 것은 기원전 8세기 전후에 일어난 일이다. 기원전 800~750년경 호메로스(Homeros)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썼고, 기원전 750~650년경 헤시오도스(Hesiodos) 신들의 계보, 일과 나날 썼다.

아테네의 시민들을 이어준 것도 종교였다. 하지만 종교는 지금처럼 공통의 신념을 바탕으로 했다기보다는 올림포스산에 살고 있는 여러 신들을 위한 의례(儀禮, ceremony)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서사시와 연극은 이런 공동체적 의례축제에서 발생했고, 초기 예술들은 그곳에서 가장 효과를 발휘했다.

더욱이 서사시와 연극은 아주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비극 시인들의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시민의 삶과 사생활을 영위하는 필요한 정보나 지침을 담은 방대한 백과사전이었다. 극의 소재는 축제에 모인 시민들의 공동 경험과 지식이었다.

기원전 5세기까지도 그리스는 아직 (記錄)보다는 (口誦) 중심의 사회였고, 시나 연극에서 채용한 음악적 형식과 상투적 문구의 반복은 지식의 전달과 기억에 효과적이었다. 따라서 시와 연극은 공동체의 경험과 지식을 전달하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되었다. 민회에서는 정치적 논쟁이, 법정에서는 변론이, 시장이나 레슬링학교에서는 철학적 대화가, 축제가 열리면 극장에서는 드라마가 상연되고 서사시가 낭송되었다. 현재는 책으로 읽는 문학(文學) () 드라마(drama) 당시에는 모두 사람의 목소리로 전달되었다. 학교에서의 교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423년경에 씌어진 구름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수금 연주자가 교장을 맡은 소년학교의 수업 광경을 묘사한다.

그럼 그 옛날 내가 정의의 대변자로서 번창하고 절제가
존중되었을 때, 소년들의 교육방법이 어떠했는지 말하겠소.
첫째, 소년한테서는 절대로 투털거리는 소리가 들려서는 안되었소.
그 다음, 한 구역의 소년들은 함께 거리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음악교사의 집으로 걸어갔소. 함박눈이 내려도 외투를 입지않고.
그러면 음악교사는 먼저 양다리를 꼬지 않고 얌전히 앉아
“두려운 도시의 파괴자 팔라스여”, 또는 “멀리 울려퍼지는 뤼라 소리” 같은 노래를
부르도록 가르쳤소. 그들의 아버지들이 부르던 선율에 맞춰서.
그리고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돌출하거나 전조(轉調)를 시도하여
요즘 유행하는 프뤼니스 조(調)의 장식음을 달면
무사 여신들을 모독한 자로 몰매를 맞았소

구름에서 교사가 먼저 선창한 노래는 시인 람프로클레스(Lamprokles) 케데이데스(Kedeides) 디오니소스 찬가(디튀람보스: dithyrambos) 첫부분이다.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제사 사용되었던 이런 시의 내용은 공동의 경험과 지식들로 채워져 있었고, 운율에 맞춘 음악적 형식을 띠고 있었다. 아테네의 학교에서는 이런 시를 음악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다. 따라서 학교의 교사는 시인이자 수금 연주가였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있었던 기원전 5세기의 60년간은()-읽고 쓰기 단계 구송에서 문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쓰기 능력은 상당히 부족해도 전체 주민들 사이로 점차 퍼져 나갔지만, 읽기 능력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왜냐하면 독서를 가능케 해줄 책자나 두루마리 파피루스 따위를 손쉽게 구할 없었기 때문이다. 문자 사용의 증가라는 기술적 진보 속에서도 전통적인 구두 교육이 여전히 우세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걸쳐 철학과 역사서가 출판되고 새로운 매체들이 이것을 대체할 때까지 시와 연극의 교육적 역할은 계속되었다.


정치 참여의 한 방식, 연극

축제에서 상연된 연극들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리스 공동체의 경험이 응축된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비극보다 희극에서 이런 측면이 뚜렷히 나타난다. 희극은 주제와 소재, 장인물, 작가의 메시지 등에서 아테네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희극은 관객이자 민주적 의사결정의 주체인 시민들이 함께 공연을 보며 중요한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했다. 공연에서 제시된 문제 해결 방식은 단선적이지 않고 열려있었다.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며 뤼시스트라테 좋은 예이다.

기원전 411, 이십여 년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르던 때이다. 남자들은 전쟁터를 떠돌았고 여인들은 하염없이 기다렸다. 싸움이 벌어지면 수많은 과부와 고아들이 생겨났다. 이때 희극의 주인공인 뤼시스트라테는 발칙한 생각을 한다. 섹스 파업! 여자들이 섹스를 거부하면 욕정을 견디다 못한 남자들이 전쟁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오리라. 뤼시스트라테와 아테네의 여인들이 섹스 파업을 맹세한다.

그 누구도, 애인이든 남편이든,
빳빳이 세우고 나에게 다가오지 못할 것이며,
난 집에선 황소처럼 씩씩대는 남정네와 몸 안 섞고 살면서도,
야사시한 빛깔 옷을 입고 요염하게 분칠하여,
남자가 나에게 후끈 달아오르게 할 것이며,
절대로 내 남자에게로 자발적으론 안 넘어갈 것이며,
만약 내가 싫다는 데도 힘으로 덤벼든다면,
정말 재미 하나도 없게 해주고 적극 호응하는 동작은 결코 취하지 않을 것이며,
천장을 향하여 다리를 들지도 않고,
강판에 새겨진 암사자처럼 엎드려서 엉덩이를 내밀지도 않을 것임을,
엄숙히 맹세하며, 이에 이 술잔을 비우는 바입니다.
만약 이것을 어긴다면, 맹물이 이 술잔을 가득 채우리라.

이성을 가졌다면, 분별력이 있다면, 선조들의 교육을 받았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어리석은 짓이다. 둘은 같은 동족으로 올림피아의 제우스 축제, 퓌토(델포이의 옛이름) 아폴론 축제를 함께 치룬 종교적 공동체였다. 테르모필라이 근처에 있는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에서 모였던 12부족 동맹의 일원이었고, ‘야만족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함께 싸웠다. 하지만 지금은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고 있다. 연극에서는 이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얼마나 돈독한 관계였는지를 말하고, 각각의 잘잘못 따져 묻는다.

나는 한낱 여자지만 이성은 갖고 있어요.
나는 원래 분별력이 없지 않지만
아버지와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많이 듣고
나쁘지 않은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대들을 똑같이 꾸짖으려는 것이며,
그것은 당연한 일예요. 그대들은 동족(同族)으로서
하나의 그릇에서 제단에다 성수(聖水)를 뿌렸던 것이오.
올림피아에서, 테르모필라이에서, 퓌토에서.
(그 밖에 다른 많은 제단들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대들은 야만족의 적군이 상존하고 있는데도
헬라스의 사람들과 도시들을 파괴하고 있어요.
여기까지 논리는 양쪽 모두에 해당돼요.

 뤼시스트라테 파업이 성공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종전하면서 끝이 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연극을 통해 적과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다. 적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하자는 일반적 결론에서 벗어나 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다만 여자들의 섹스 파업이란 기발한 상상 속에서 이런 것을 제시하기 때문에 희극적이다.

▸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고있는 일본(아베)과의 전쟁(무역전쟁) 속에서 불매운동으로 대응하는 애국주의 물결을 생각할 때, 이천여년이 지난 그리스의 연극은 얼마나 '이성적'인가! (2019.7.9 추가) 

이처럼 고대 그리스 희극은 비상식적 주제를 선택했고 여러 입장들을 드러냈다. 여러 사람들 간의 이데올로기 투쟁은 외설스런 농담들과 뒤섞여 정신적 자유공간을 만들고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했다. 축제에서 상연된 연극을 보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스스로 반성하고, 공동체와 자신의 관계를 곱씹었다. 공동체 안에 있던 현안들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 등을 세울 있었다. 따라서 희극에서 반영된 규범의 확인과 해체는 전사회로 확산되어 시민들 사이의 직접적 토론거리가 되었다. 연극은 종교적 일체감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등과 연결된 민주주의 구조의 일부였다.  

플라톤 국가政體에서 이상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희극, 비극 작가들을 나라 밖으로 추방해야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연극은 아테네 공동체에 종교, 교육, 정치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연극을 통해 공동체의 현안을 이야기하고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이끌어내려한 것은 고대 그리스만의 일은 아니다. 화가 고야(Francisco Goya, 1746 ~ 1828) 살았던 에스파니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1789) 일어났고, 그에 따른 프랑스 혁명 전쟁(1792 ~ 1802) 연이은 나폴레옹 전쟁(1803 ~ 1815)으로 유럽이 격랑에 휩싸였다.  


--- 에스파니아 이야기를 쓰려고 찾아놓은 글 ---
페르난도가
살아있는 시대에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발발하였고, 그에 따른 프랑스 혁명 전쟁 연이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을 거대한 격랑에 휩싸였다. 전란은 체제의 부패와 노화가 진행되고 있던 스페인에 비극을 초래했고, 오랫동안 국제무대에서 벗어나 있던 스페인을 유럽에서 가장 관심사로 만든다.
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 왕위계승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부왕과 그들이 총애하는 마누엘 고도이(모친의 애인)에게서 따돌림을 당하는 괴로운 입장에 내몰려, 원한을 가슴에 품고서도, 자중하고 있었다. 약화된 정부에 대한 전국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1805에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정정 불안이 계속된 1807 10, 페르난도는 〈에스코리알 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음모는 정부의 자유주의적인 개혁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도움을 받아 카를로스 4 등을 추방하고 페르난드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것이다. 개혁파의 희망의 별이라는 입장에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도는 음모가 발각되자 그들을 재빨리 배신하고, 부모님의 지시에 따랐다.


천 개가 넘는 폴리스, 소피스트

그리스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일찍부터 해외무역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9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 그리스 본토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지중해 주변 지역인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소아시아, 멀리 현대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 지역인 갈리아(Gallia) 남부 스페인 해안까지 이주하여 식민지를 세웠다.

그리스 주변지역의 식민지화는 쟁기가 도입되면서 이어진 전면적인 농업혁명에 따라 인구 성장했기 때문이다. 인구 성장과 함께 군주정은 귀족정으로 전환되었고 폴리스 내부의 정치적 긴장이 발생하였다. 이에 귀족 대가족들은 재산 분산을 막기 위해 장남에게 전재산을 물려주게 된다. 이제 나머지 형제는 다른 곳에서 재산을 일으킬 밖에 없었다. 척박한 그리스의 자연 환경 때문에 필요한 것을 교역을 통해 얻어야 했고, 이를 위해선 새로운 시장 개척이 필요했다. 이민 현상이 끝난 기원전 6세기 무렵 본토에 200개가 넘는 폴리스가 있었고 지중해 일대의 식민시까지를 합치면 1,000개가 넘었다.

▸   그리스에, 연극에 관심을 둔 이유 중의 하나가 200개가 넘는 폴리스, 아니 1,000개가 넘는 폴리스 문제였다. 이것을 어떻게 하나로, 즉 정치적 공통체로 묶어낼까! 이런 것이 당대의 문제의식이 아니었을까! 비슷한 일이 다시 근대로 들어서는 독일에서, 신구교 간에 종교전쟁을 치르는 독일에서 일어난다. 나는 다시 우리시대가, 내전에 빠져드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일(인쇄술, 책의 대량보급과 정보전달/범위 속도의 가속화)과 현재의 우리(인터넷)는 매체의 변화, 공동체를 묶던 제도의 변화 속에서 이런 상황에 빠져든 것인 아닌가! 이런 생각 속에서 분열된 공동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매체, 그것을 묶어내는 콘텐츠(연극, 소설, 신문, 드라마 등)와 그것의 전달형식 등등에 관심이 갔다. 2007년 이후 계속 이 문제를 붙들고 있다. (2019.7.9 추가)

그리고 모든 시민이 들어와 볼 수 있는 정도의 극장, 이것도 중요하다. 동시에 한장소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집단적인 정서적 공감, 전염병과 상태에 빠져야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빠뜨리는 제도적/기술적 장치로서 우리 문명이 발명한 것은 텔레비전이다. 연극에 대한 관심은 텔레비전을 인터넷이 대체할 수 있을까하는 것에 있다. 기술적 가능성이 아닌, 텔레비전이 맡은 역할, 사회적 기능에 대한 질문이다. 개인의 수준까지 점점 파편화되는 인터넷이 이런 역할/기능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지역에 모여사는 개체(개인)를 공동체의 성원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 말이다. (7.10 추가)


그리스 세계인 식민시와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해상무역은 더욱 발전하였다. 기원전 6세기 아테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잇는 지협에 있었던 코린토스(Corinth; Korinthos) 주요한 해운 상업 강국으로 부상했다. 기원전 449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기원전 461년부터 429년까지 지속된 페리클레스 치하에 귀족정치는 민주정치로 바뀌었다.

민주정 신화적, 혈연적 신분 질서에서 맹목적 교조주의를 배격했고 귀족과 부자만이 아닌 전체 자유 시민들에게 지도력이 부과되었다. 모든 시민들이 참여한 정치적 토론을 통해 정책이 결정되었다. 개인의 독립적 의사 표시를 보장한 민주정의 출현과 함께 시정(市政) 대한 지식 전달 방식인 변론술이 급속히 요청되었다. 상호 설득을 통하여 견해의 일치를 구했으므로 설득술이 중요한 출세의 도구였다.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 토론 참여를 장려하려고 민회에서 말을 사람에게는 면세의 특권까지도 부여되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지중해의 중심지가 아테네에는떠돌이 교사 외교관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그리스 세계에서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서로 관습이 다른 나라들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여행을 통해 다양한 문화 현상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을 소피스트(Sophist) 불렀다. 개개 문화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얻어진 지식은  소피스트에게 어떤 절대적 진리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였다. 따라서 소피스트들은 사회적 제도가 금기나 마술적인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으로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이라고 주장했다. 전통적인 종교적, 도덕적 규약들은 인간이 만든 규칙과 관습들일 뿐이다.  

이들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1?~411 B.C.), 고르기아스(Gorgias, 483~375 B.C.), 트라시마쿠스(Thrasymachus, 459~400 B.C.) 등이 가장 유명하다. 프로타고라스는 현재 그리스, 불가리아, 터키에 걸쳐 있는 트라키아(Thrace)에서, 고르기아스는 이탈리아 시실리섬의 레온티니(Lentini)에서, 그리고 트라시마쿠스는 현재 터키 이스탄불 근처의 캘세돈(Chalcedon)에서 아테네로 왔다.

이런 소피스트들의 사상은 혈연에 기반했던 아테네의 귀족정치가 민주정치로 대치하는 과정에서 힘을 발휘했다. 소피스트들의 명료한 표현과 설득력이 깃든 화술(話術), 호메로스적 운문에서 벗어난 산문과 문법 등에 대한 실용적 기술들, 새로운 사고 방식이 시대 상황에 들어맞았다. 이들은 민주적 아테네의 시민들을 교육시킬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시적 구송(口誦) 통해 전승된 신화적 지식과는 다른 형태의 지식 새로운 생활양식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에서 정치적 교양을 가르쳤다. 소피스트는 대부분 다른 도시국가 출신의 직업적 교사였으므로 당연히 돈을 받았다. 상공업활동을 통해 부를 쌓은 신흥중산계급에 속한 시민들은 이들에게 국가 지도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비싼 수업료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들(소피스트들)이 항상 말하고 있는 덕(Arete)은 덕(德)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며, 말의 원래적인 뜻으로 새기자면 숙련(熟練)이라고 번역됨직한 말이다. 즉 이 때에 중요한 것은 정치적 숙련이다. 시대는 바로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시대였다. 새로운 땅을 점령하고 이용하는 사람들과, 의지를 관철하고, 그 무엇인가를 실행하고, 또 그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였다. 소피스트들의 학문은 거듭 말해지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교양이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의 교양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들을 양성해내는 것이었다.


소피스트가 있기 전에는 전통적인 토지귀족의 자녀들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교육 대부분은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견해와 관습이라는 가계적 전통 위에서 이루어졌다. 교육 내용이 혈통에 따른 도그마와 신화, 전설, 인습 등의 신비주의 위에 있었다. 이런 교육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요구를 만족시킬 없었다.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1911~1980) 미디어의 이해에서 문자의 출현과 함께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을 교육 매체, 정치 참여의 방식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추어리즘

3만여명의 아티카 시민들은 모두 민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말할 있었다. (말할 자격이 있었다가 맞을 것이다. 2019.7.9) 민회 광장(agora)에는 1 4 명이 동시에 앉을 있었고, 한달에 서너 정도, 일년에 40 모여 회의를 했다. 아테네의 민회에는 보통 번에 5 명에서 6 정도가 모였다. 민회에서는 법안 의결, 전쟁 선포, 조약 인준, 공직자에 대한 통제, 매년 10명의 군사령관 선출 국정에 대한 거의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민회 이외에 아테네의 법에서 요구하는 시민들의 공적 참여는 아주 많았다. 해마다 1 2천에서 1 4 명의 아티카 시민들이 공직에 참여했다.
 
현재의 행정부격인 평의회는 시민 5 명을 추첨하여 구성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평의회의 의장은 매일 아침마다 다시 뽑았고 민회의 의장도 겸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의장과 대통령의 임기가 하루였던 셈이다. 법관은 시민 3 6 명에 이르렀다.  2년간은 군대에 복무해야 했고 60세까지 징집상태에 있었다. 공무원도 추첨으로 뽑혀 1년씩 근무했다. 공직은 일년 내내 디오니소스 축제의 코러스 공연을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마을 행정 업무, 최고 공직자, 국경 수비대나 해상 동맹 부대에 배치된 군인,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 다양했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코러스 노래 경연 클레이스테네스가 토지 귀족의 혈연 중심 지역경제 단위인 부족을 10개의 순수 행정 단위로 재조직하는 민주 개혁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추측된다. 코러스 노래 경연(디튀람보스 경연)에는 아티카의 10 부족에서 각각 50인으로 구성된 성인 남자 코러스와 소년 코러스가 구성되어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합창곡을 상연했다. 1,000명이 노래 경연에 부족을 대표해 참여했다. 부족 합창대들은 오로지 아티카의 순수 시민들로만 구성되었다.
 
어떤 기능은 종종 전문지식과 숙련도를 요구했지만 이것을 위한 교육도 직업 공무원 제도도 없었다. 노동자 임금 수준보다 낮은 약간의 손실 보정 이외에 어떤 보상금도 없었다. 따라서 국가 행정은 시민들의 손에 의해 집행되었고 아테네인들은 시민이었지 신민(臣民) 아니었다.
 
특수 기술과 관련 기술 요하는 군사령관(스트라테고이)만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행정관들은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제비뽑기는 당시 관습적으로 널리 쓰였던 공직자 선출 방식이었다. 오늘날의 총리나 대통령 또는 장관으로 있는 9명의 최상위 공무원인 집정관도 지원자 중에서 제비뽑기로 선출되었다. 집정관 선출 방식의 변화 (솔론, 페리클레스) 10명의 군사령관도 민회에서 선출되어 그들이 날마다 번갈아가며 지휘를 맡았다. 실제 페르시아와의 전쟁도 이런 방식으로 10명의 군사령관이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면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렇듯 고대 아테네에서 공무원의 자격 요건 전문성이 아닌 시민으로서의 덕성(arete)였다. 덕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낼 있는 정치적 숙련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나의 전문분야만 추구하는 장인의 작업하는 삶도 자유인이 해야 일이 아닌 노예적인 것으로 여겼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자유를지위, 인격적 불가침성, 경제활동의 자유, 제약받지 않은 이동의 권리로 구성되는 으로 이해했다. 장인은 작업 계약을 하면 자신의 자유로운 지위를 구성하는 요소 가지인 경제 활동의 자유와 제한받지 않는 이동의 권리를 일시적으로 포기하기 때문에제한적인 노예의 조건에서 살아간다 있다. 경제적으로 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의 탐욕적인 삶도 부끄럽게 여겼다. 그것은충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이기 때문이다.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인간의 조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삶(bioi)의 방식을 구별하였다. 그것은 삶의 필연성과 이것으로부터 비롯된 관계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었다. 이 선택의 필수적 전제조건인 ‘자유’는 자신의 생계에 기여하는 모든 생활방식을 배제한다. 여기에는 생존의 필연성과 주인의 지배라는 두 가지 강제에 예속된 노예적 삶의 방식인 노동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장인의 작업하는 삶과 상인의 탐욕적인 삶 모두가 배제된다. 간단히 말해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평생동안이든 일시적이든 간에 자유롭게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모든 사람은 제외된다. 이와 본질적으로 다른 나머지 세 가지 삶의 방식들은 ‘아름다운 것’, 다시 말해 필수적이지도 않고 또 단순히 실용적이지도 않은 사물에 관심을 가진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아름다운 것이 주어진 대로 소비되는 육체적 쾌락을 향유하는 삶, 폴리스의 국사에 관여하는 삶(폴리스에서는 탁월함이 아름다운 행위를 낳는다), 그리고 영원한 것의 탐구와 관조에 바쳐지는 철학자의 삶(영원한 것의 지속적인 아름다움은 인간의 개입에 의해 산출될 수도 없으며 그것들의 소비를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아래 단락은 위에 동일한 것이 있다 ---
 
이들(소피스트들)이 항상 말하고 있는 덕(Arete)은 덕(德)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며, 말의 원래적인 뜻으로 새기자면 숙련(熟練)이라고 번역됨직한 말이다. 즉 이 때에 중요한 것은 정치적 숙련이다. 시대는 바로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시대였다. 새로운 땅을 점령하고 이용하는 사람들과, 의지를 관철하고, 그 무엇인가를 실행하고, 또 그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였다. 소피스트들의 학문은 거듭 말해지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교양이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의 교양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들을 양성해내는 것이었다.

 
--- 아래부터는 단상/인용문만 써놓고만 부분 ---
 
권력의 분산을 위한 극단적 아마추어리즘의 수용
인간은 본래 잠재적으로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

▸   "제비뽑기는 당시 관습적으로 널리 쓰였던 공직자 선출 방식"을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린 너무 전문가주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아렌트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한다.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가나 전문가(관료)에게 맡길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군 부재자투표 부정을 양심선언한 이지문 중위는 <추첨 민주주의 이론과 실제: 직접 대의 민주주의를 보합하는 새로운 시민 정치 패러다임의 모색>이란 책을 썼다. 우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대통령을 제비뽑기로 뽑는다면 어떨까! 이렇게 하려면 이런 태도/전제가 필요하다. "인간은 본래 잠재적으로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그리고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그것이 발현된다고. (2019.7.10)

페리클레스 마라톤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며우리의 평범한 시민들은 비록 생업에 종사하기는 하지만 공무의 공정한 심판관들이다 주장하고 있다.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있다고 해도 우리 모두 그것을 비판할 있다. 우리는 논의를 정치적 행위에 대한 장애물로 보지 않고 현명한 행위를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예비행위로 본다. ... 요컨대 나는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학교이며, 아테네의 모든 개인은 적절한 재능을 기르고 위기에 대처하며 자립적일 있도록 길러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적 학습기관의 역할을 것이 바로 연극이 아닐까?

 
연극, 공적 공간
아렌트

 
 

심지어 시민 내에서도 혈통과 부에따라구분 있었다.

아티카 지역의 30 정도의 인구 도시 거주자는 15만이 안되었다. 지금으로 보면 중소 도시인 아테네에는 1 명이 넘는 수용인원을 가진 극장이 있었다. 극장에서는 연간 백편의 연극공연이 있었고 대다수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연극이 공동체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들이다. 연극은 아테네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중심요소였다. 

연극은 가장 중요한 하나의 사회적 교육기관 이었다.

 

 

... 이정린 ...

양피지에서 파피루스의 출현에 따라 운문에서 산문으로의 변화가 가능했다. (플라톤서설 .. 뒷쪽 파피루스 나오는 )

 

정점에 페리클레스

공동체의 생활방식과 경험이 연극, 코러스의 노래, 등에 반영되어 전체 시민들에게 전달되었다.

   

앞서 살펴본 뤼시스트라테처럼 연극은 이럴 아티카 시민들이 정치적 ...

 

 

연극공연은 아테네의 공동체의 전통과 사회문화적 규범, 기원전 492년부터 시작된 오랜 전쟁상태의 지속 등을 반영한다.

 

민주정과 연극을 바로 이어붙이기 어렵다. 스파르타에서는 연극이 없었을까? 확인 필요 ... 없는 같은데 ...

 

사회적 비용부담을 했을까? 여기에 투자를 했을까?

구어문화의 특징 .. 맥클루언 .. 문자문화에서 구어문화로 


 

[... 희극공연] 페이지86 주석74 애국주의적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594 솔론이, 80여년 후인 508~507년에는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주개혁을 실시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독재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도자기 파편에 6,000 이상을 얻은 사람은 10 이상 아테네에서 추방하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시민에게 완전히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했다.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 ~ 449) 고대 그리스는 경제적・문화적 발전을 거두었다. 중심지인 아테네에서는 노예제 기반의 민주주의적 공화제가 강화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수병으로 참가하게 아테네의 민중들은 자신들이 아테네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원전 461 페리클레스(기원전 495년경 ~ 429) 아테네 정계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관리의 추첨제, 유급 관리제를 도입했다. 국가 제전에 참가하는 자들에게 수당을 지급해 가난한 사람도 관직에 오를 있도록 했고, 민중들이 국가의 정치 활동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아테네에서의 이러한 민주정의 발전이 아니다. ‘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넘어서 동시에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했을까?’이다.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 연극관람이 민주정에 참여하는 방식의 하나로 중시됐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 문화 발전의 중심지는 아테네였다.



-------------- 참고 문헌 / 주석

 박홍규, 플라톤 다시보기, 필맥 2009, pp.129~130

200,000명의 시민 이외에 110,000명의 노예와 28,500명의 외국인이 있었다. 따라서 아테네는 35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시민 18 이상의 성인 남성은 대략 3~5만이었다. 이중 30 이상으로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소유한 사람은 3분의 2 정도 였다

 오스카 G. 브로켓프랭클린 J. 힐디, 연극의 역사 I, 연극과 인간 2005, p.72

 이정린, 아리스토파네스와 고대그리스 희극공연, 한국학술정보() 2006, p.47

 

 백경남, 민주주의론, 법지사 1989, p.73

  기원전 416 그리스 아테네의 비극시인 아가톤은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을 , 기쁨을 나누기 위해 향연(symposion) 연다.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초대되었는데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릭시마코스, 아리스토데모스 당대 최고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와 철학자 소크라테스 였다. 모두 당대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전날 우승의 기쁨과 축제의 피날레를 즐기며 술이 깼다고 너스레를 떨며, 오늘은 술을 조금만 마시자고 입을 맞춘다. 술을 강권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주량껏 마시면서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향연을 즐기기로 한다. 향연에서 이야기된 주제는 에로스(Eros), 사랑이다

  아가톤의 집에 도착한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의 지혜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한다. “∙∙∙ 자네의 지혜는 찬란하고 급속히 자라고 있어. 얼마나 환하게 그것이 아직 젊은 자네한테서 튕겨 나왔고 그저께(비극경연대회 우승일) 3만명 이상의 헬라스 사람 앞에서 과시되었던가!” 이때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54 쯤이었고, 아가톤은 31 쯤이었다.

 

 최명관 옮김, 플라톤의 대화 <향연>, 종로서적 1992, p.227

 플루타크(Plutarch), On the Glory of Athens, CAD 148f. 이정린, 같은 , pp.88~89에서 재인용. <박코스의 여신도들>, <페니키아의 여인들>, <메데아> 유리피데스의, <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소포클레스(497 ~ 406 B.C.) 작품이다.

 이정린, 같은 , p.9

 스테파노 마기, 그리스 -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생각의 나무 2007, p.56

 에릭 A. 해블록, 플라톤 서설 - 구송에서 기록으로, 고대 그리스의 미디어 혁명, 글항아리 2011, p.54

 해블록 교수는 전체에서 플라톤의 국가政體 분석하면서말하는 (구송)’에서쓴다는 (기록)‘으로의 변화, 이에 따른 사고 방식의 변화가 그리스 철학의 시작과 연관되어있음을 해명하고 있다

 

  () 시민들의 공동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백과사전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책의 1 <이미지의 사상가들> .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구름>, p.71

 에릭 A. 해블록, 같은 , pp.56~60

 김헌, <웃고 싶은가? 아리스토텔레스시학2 찾아라>, 한겨레신문 2010.11.20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뤼시스트라테>, 단국대학교출판부 2008, pp.223~225, pp.274~276

 

 섹스파업 맹세 부분은 외설스러워 논지를 잘살릴 있기에 김헌의 번역을 인용하였고, 단락 구분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따라 나누었다.

 이정린, 같은 , pp.22~28

 스테파노 마기, 같은 , p.56,  p.61

 박홍규, 희랍 철학 논고 <서양 고중세 철학사 개관>, 민음사 2007, p.229

 사무엘 E.스텀프, 西洋哲學史, 종로서적 1989,  pp.43~49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 철학사 - 상권고대와 중세, 이문출판사 1988, p.93
쿠르트 프리틀라인, 서양철학사, 서광사 1988, pp.50~54

 이정린, 같은 , pp.65~66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1, pp.61~62

 스테파노 마기, 같은 , p.106

 박홍규, 플라톤 다시보기, 필맥 2009, p.118

 

포퍼, 열리사회와 적들 ...  p.225 재인용

 이정린,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연구 1* -고대 아테네 공동체와 희극공연, 독일문학

2019/07/10 00:39 2019/07/10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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