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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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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해당되는 글 17건

빗길을 따라 안개에 묻힌 산머리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미술관을 찾았다.

저수지 얼음은 작은 비방울을 받아
자기 몸을 보태어 이고 지고 나르기에 바빴다.

노래하는 사람은 비를 맞으면서도 노래를 불렀고
웅얼거림이 우산 위 비소리와 한몸으로 뒹굴었다.

미술관 건너 산 허리, 지난 봄 붉게 피었던
꽃자리 나뭇가지 끝 모두 붉게 보였고

어둑해지는 산, 등진 가로등은 보름이었다.
마주본 비 방울 방울 속에 천개의 달이 뜨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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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 한국화 소장품 특별전 : 멈추고 보다

- 2015.9.8 ~ 2016.3.6일까지
- 토요일에는 오전 10시 ~ 오후 9시까지 볼 수 있고
오후 5시부터 밤 9시까지는  
기획전시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멈추고 보다는 원래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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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개념적으로 더 익숙한
투사 원근법, 입체적 관찰(피카소적인)보다
전통 한국 산수화가 더 융합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해주고
자연/세계의 역동적인 변화상과
사람이 '세계 내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같다.


풍경화가 단순한 물리적 재현을 넘어
세계가 인간 경험 속에서, 인간-세계와 관계 속에서
인간의 심리적, 또는 내적 구성력(상상력)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 다양성들이 대립된다기보다
다질적 세계의 자기 표현이라는 것을
조선의 산수화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지금껏 본)
그 다양성보더 더 무한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 몸이 이미 알고있는
변화와 융합(물아일체!)에 대해 이해하고 싶다면
그런 기대에 찬 눈으로 그림을 봐야 한다.
내가 변해야 그림도 변한다.


들뢰즈의 차이-생성과 동양적 세계관/기철학에는 공통된 것이 많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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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송_움직이는 산-경주남산_흙벽화 기법에 천연안료_195×528cm_2003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답사와 여행체험을 통해 그린 겸재적 전통의 실경산수
2. 벽화기법과 민화적 도상처리가 맞물린 독특한 구성
(전통에 대한 이해와 재료, 기법, 형식의 어우러짐)
3. 동양화적인 시방식 (다원적이고 움직이는 시점)
참고: 벽에서 걸어 나온 그림 이종송 회화展 2004_0407 ▶ 2004_0413



오용길.서울_인왕산.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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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을 이종송의 <움직이는 산- 경주 남산>과 비교해 보면 한지에 묵을 쓰고 겸재가 그렸던 인왕산을 다시 그렸다고 해서, 시선/인식/접근방식까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양의 투시법/원근법을 써 시각을 탈육체화하고 권력화한다. 전통 동양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도 새로운 것이 된다/될 수 있다. 시선은 자연을 객관화하고, 지배하는 위치에 선다. (이전에 있던, 지금은 새로 졌는데) 한국일보 옥상에서 본 인왕산이다. 



김종억.변산 내소사.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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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변화/다양성을 더욱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우리는 변산의 내소사 길을 걷고 있다. 주관-객관적 시선이 아닌 다원적 시점을 통해. 그림 속에 끌려들어가 어떤 때는 매의 눈으로, 또 어떤 때는 고개를 치켜들고. 몸-마음이 그림과 함께 움직인다/경험한다/행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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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곳의 얼음 위에 물이 고일까? 고르게 보이던 얼음도 결코 매끈한 공간이 아닌, 홈들이 파여 있는 공간이었나 보다. 우리가 양화할 수 없는(물리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강도의 세계가 이 호수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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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스님의 법성게를 보면 <일미진중함시방>이란 구절이 나온다. 풍수화의 시방시는 어찌보면 <일념>이다.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 하나 중에 전체 있고, 전체 중에 하나 있어,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多卽一 /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 /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
일체진중역여시 一切塵中亦如是 /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해라.

무량원겁즉일념 無量遠劫卽一念 / 한 없이 머나먼 무량겁이 한 생각(일념)이요,
일념즉시무량겁 一念卽是無量劫 / 한 생각(일념)이 한량없이 오랜 겁이라.

 

2016.2.13

 
다면성에 대해서는 아래 책을 보면 된다.



세계의 모든 얼굴 - 10점
이정우 지음/한길사
세계의 모든 얼굴  소개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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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어온 정재호, <황홀한 건축 - 청계타워, 현대오락장, 종로빌딩, 용산병원>으로 바탕화면을 깔았다. '남루한 것'들이 예술을 통해 불멸의 세계로 들어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재호작가 홈페이지
2016/02/14 00:22 2016/02/1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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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후
media2.0, (2014/11/26 00:34)
2007년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을 쓴 후 한 일들은 넓게 보면 새로운게 없다.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이 가능하다는 주장에서 혼자는 어렵고 '어떤 연합'이 필요하다는 깨달음! 그리고 우회적으로 이것에 가는 과정이었다. 회사를 다녔고 그 일을 했다.

그리고 2008~2009년 몇명의 대학원생들에게 뉴미디어론을 강의하며,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을 읽고,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생겨난 '효과들/사례들'을 주워 모으며 지냈다. 그러다 박홍규 교수의 <플라톤 다시보기>를 읽었다. 그책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한 후 아테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패전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이 지급됨으로써 참여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민주정이 부활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됐다.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 연극관람이 민주정에 참여하는 방식의 하나로 중시됐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또 다른 책에서 연극 축제(디오니소스제)를 위해 "아테네가 일년 간 해군을 유지하는 비용의 10분의 1에 달하는 돈"을 썼다는 글을 읽었다. 아테네는 당시 지중해에서 현재의 미국과 같은 패권국가였고, 바다의 왕이니 당연히 해군이 강했다. 이후 왜 아테나는 연극에 이런 사회적 비용을 지불했을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아테네의 연극과 BBC의 뉴미디어 전략 중 "정서적 연대감"을 위해, 젊은 세대를 위해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연결되었다. 또 2500여년 전의 그리스와 현재의 영국, 그리고 우리나라를 보면서,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미디어의 본질'은 무엇일까? 본질이 형이상학적 용어라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효과'가 무엇일까? 뉴미디어에 의해 우리가 보고 겪는 일들 자체가 '하나의 효과'인데, 이런 것들, 새롭게 겪는 놀라운 사례들을 '주워 모으는 일'은 잊고 다른 관심 속으로 빠져들었다. 역사 속에 있던 미디어, 또는 인간(사회, 또는 공동체)에게 미디어는 어떻게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이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려(또는 두려움)'가 있었고, 또 그 세계가 걱정하는 것처럼 아주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도 했다. 생각지못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앉아서 당하지않을 만큼 현명하기 때문이다.

BBC가 던졌던 젊은 세대와 정서적 연대감은 '산업'이나 돈으로 측정되는 '경제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그 전략이 <미디어2.0>에서 봤던 돈을 위한 것도 아닌듯 하다. BBC 덕분에 내전 속에 살았던 영국의 16세기 철학자들이 직면했던 문제, 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가 만들어낸 '인간학(인간이란 무엇인가?)'과 그들이 생각한 감정(정서)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부딪쳤던 문제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인쇄술-책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였다.

푸코의 1976년 강의를 묶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책이 있다. 여기서 푸코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때 일군의 철학자들은 사회 구성하는 원리를 다시 만들려고 노력한다. 신이 아닌 인간 자체, 그 본질 속에서 신화적으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구체적으로는 영국 내전과 종교전쟁의 원인을 찾는다. 이들은 왜 그랬을까? 거칠게 말하면 '국가/공동체(commonwealth)'를 '보호/보전'하기 위해서인듯 하다. 새로운 기준(rule)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났다. 구술에서 문자로의 전환이 있었다. 해블록의 <플라톤 서설 - 구송에서 기록으로, 고대 그리스의 미디어 혁명>이 그런 내용이다. 이책 덕분에 철인왕의 전제와 시인을 추방하자는 플라톤의 과격한 책, <국가>를 읽었다.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 현재 겪고 있는 일들을 과거에도 겪었고, 이런 문제와 철학자들은 대결을 하지않았나하는 가설이 마음 속에 움텄고, 6~7년간 읽은 책 대부분은 이런 가설에 끼워마추기에 적당한 구절들을 찾는 것이었다. 현재의 사례 이전에 역사적 사례와 이에 대한 이론적 대응, 그 속에서 공동체의 바탕을 만드는, 공감의 산출이 미디어가 아닌가 생각했다. 부정적으로 보면 사회적 시멘트가 되는 이데올로기. 하지만 그것이, 그런 환상과 신화가 없다면 이 공동체가 존재하겠는가!


2014.2.6일에 쓰던 글이다. 콘텐츠연합플랫폼에서 스마트미디어렙으로 옮겨가기 직전 '왜 일을 하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질문하며. 답이야 있겠는가! 모르는 것에 침묵하며 삶이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수 밖에 ...
2014/11/26 00:34 2014/11/26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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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모자이크 - 10점
스티븐 홀츠먼 지음, 이재현 옮김/커뮤니케이션북스

학문적 관심이 없다면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나는 8장 디지털의 한계와 9장 모자이크를 재미있게 읽었다. "각기 동일한 것일지라도 다른 맥락에 있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게 된다."(p.180)

어제 쓴 글에서 현장성/가시성을 이야기하면서 참조하라고 말했던 책이다. 책을 들쳐보니 이 책 내용이 아니다.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와 <The World As Phantom And As Matrix>(Gunther Anders) 올해 읽은 책들의 내용이 범벅이 되어 만들어낸 '착각'이다.

작년말부터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계속해서 맴돌고 있는 생각/주제들이 있다. "매스미디어와 개인미디어의 결합/공생 관계", "현실/사건을 가지고 유령(Phantom)/가상을 만들어내는 미디어", "매스 미디어의 사회적 역할 - 공감, 정서적 연대 등의 관점에서", "개인미디어의 진보적 성격",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입장" 등

지난해부터 관심을 가진 벤야민의 맥락(aura)에 대한 관심이 생각과 독서를 여기까지 진전시켰다. <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귄터 안더스>에 대해서는 올초 강의를 하면서 진중권씨의 글을 참조했었고 최근 미국에 있는 선배에게 독일어의 영어 번역본을 받았다. 놀랍게도 11페이지 밖에 안되는 짧은 에세이였다! 아마 진중권씨의 주석이 더 긴듯하다.

미디어가 어떻게 사실/맥락을 왜곡하는지에 대해서는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를 읽으면 좋을듯하다.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게 본 것 중 하나이다. 돈벌이만 좇는 미디어가 사회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다른 한권은 박영욱의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라는 들뢰즈와 데리다에 관련된 책이다. '난해한'한 두 프랑스 철학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로 훌륭하다. 들뢰즈 책만 책꽂이 한칸을 넘게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다. 그를 읽는다며 혼자 앉아 '오해/오독'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 - 10점
W. 랜스 베넷 지음, 유나영 옮김/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미디어의 현재와 미래, 사회적 책임 등에 관심있다면 꼭 읽어볼 책. 미국에서 뉴미디어을 포함한 미디어산업에 투기적 자본이 들어와 어떻게 망쳤나를 알고 싶어도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10점
박영욱 지음/김영사

창의성/창조적 상상력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싶다면 세계/존재 자체가 다양체라는 것을 알면 된다. 쉽다고 말은 했지만 여전히 만만찮을 수 있다.

아래는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면서 7.14일 적은 메모가 있다. (메모는 책 내용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은 것임)

7.24일 메모

"미디어는 노상강도이다. 맥락에서 특정 장면을 빼앗아 온다"
"노상강도가 강탈적으로 만든 세계는 모자이크이다"
"나는 노상강도처럼 책을 읽는다. 이책 저책 띄엄 띄엄"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텔레비전론>,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남수영의 <이미지 시대의 역사 기억>, <디지털 모자이크>,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등과 김종철의 <텔레비전과 민주주의>등의 신문기사를 함께 읽으면서 나온 메모이다.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는 그 뒤에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이책 저책 읽다보니 아직도 읽고 있다. 매주 열댓장씩)

이즈음 메모들 사이에 "텔레비전은 상상력을 위축시키고, 아동의 정서적, 지적 능력의 정상적 발달을 가로막고,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김종철의 글(7.25일 한겨레신문)과  아마도 다른 란에서 백은하씨가 <찬란한 유산>을 평가하며 "허구적 매체는 ...... 새로운 문화적 대안을 제시한다"고 이야기가 쓰여있다.

2009.12.24. 17시 update --------------------------------------------------------

인용한 "문화적 대안"에 대한 이야기는 백은하의 글이 아니다. 백은하가 <찬란한 유산>을 칭찬하며 문화적 대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때 읽고 있던 <인권의 발명> 9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허구적 매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전부터 새로운 문화적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은 "드라마, 공감, 정서적 연대"라는 측면에서 읽고 있었다. 보편적 인권 관념이 어떻게 형성/구성되는가 하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TV라는 매스미디어가 어떤 진보성을 갖을 수 있는가로 고민을 하고 있다. 사회적 통합 기능(이전 같으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부숴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을게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개인미디어가 어떤 시각에서보면 사회적 분열을 극심하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매스미디어(객관적 관념론 경향을 갖음)과 개인미디어(주관적 관념론/유아론적 세계가 될 수 있음)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어떻게 만들까? 요즘 매달리는 화두 중 하나이다.)

"허구적 매체(TV)는 객관적 관념론을 만든다. 2가지 방향으로. 보도/뉴스는 현실을 관념화시켜 보수화하는대로, 드라마는 이상을 관념화시켜 급진화하는 대로. 역도 가능하다. 결국 TV는 보수화 또는 급진화될 수 있다." 어떻게 사용할지 용법/선택의 문제이다. 선택은 사회적(또는 개인적) 선택이며 구조적인 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아래 메모를 볼 것)
 
8.2일 메모

인권의 발명 - 10점
린 헌트 지음, 전진성 옮김/돌베개

나는 책을 읽으면 얼토당토 않은 방향으로 읽어댄다. 인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미디어의 논리, "미디어의 효과-경험-정서"라는 것을 읽으려 했다. 세계는 다양체이고, 일원론적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반영한다는 믿음 속에

인터넷/뉴미디어 관련된 일을 하면서 솔직히 백은하의 말보다 김종철의 말에 더 공감이 간다. “싫어하는 것에 반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조절하기 위해 스위치를 끄는 곳이 어디인가를 알아두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footnote]마샬 매클루언,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미래(1966)>, 스테파니 매클루언, 데이비드 스테인즈 편저, 『매클루언의 이해: 그의 강연과 대담』, 커뮤니케이션북스, p.139[/footnote] 나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다.

매클루언의 이해 - 10점
스테파니 매클루언.데이비드 스테인즈 지음, 김정태 옮김/커뮤니케이션북스

미디어 현상에 관심있다면 아래 책을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매클루언의 <미디어의 이해>보다 읽기 편하고, 내용주는 시사점도 더 많았다.

그런 까닭에 무엇보다 "이념(스위치 끄는 곳)"의 문제에 천착하려했었다. 그런데 벌써 1년이 다갔다. (SBS콘텐츠허브 입사 이래 가장 바쁘고 힘든 한해였던 것 같다.)

2008년 말 잡았던 에세이의 순서이다. 벤야민을 통해 다른 미디어 철학/사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몇가지 현상을 분석하기로 했었다.

벤야민
벤야민과 아도르노
벤야민과 매클루언
벤아민과 군터 그라스?
벤야민과 브루디외
벤야민과 플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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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함
미세지각
시민종교, 아우라
블로그, 신화적 사고
유동적 자아매몰
흐름, 체험
미디어와 정서
(개인 미디어가 만든) 유아론적 세계
(매스미디어가 만든) 객관적 관념론의 세계
모자이크와 퍼즐

연초에 <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빌렘 플루서, 그리고 기술적 복제 시대의 우리>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200자 원고지 100매 정도를 쓰다가 중단했다. 회사 일을 마치고 밤새 글을 쓸 열정도 식고,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또 여러 핑계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8~9월에 다시 <테크놀로지와 문화, 그리고 우리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50매 정도를 쓰다가 중단했다. 앞에 썼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이다. 이 글을 쓰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잉여가치학설사>의 지대 관련 장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미디어2.0>에서 이야기했던 기술지대 개념과 사례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비판적 미디어론으로의 초대>라는 제목으로도 긁적댔다.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이라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나온 글을 보고 열을 받은 상태에서였다. 박사들도 미디어를 연구하면서 (앞뒤 자르고 말하는) 공력을 쌓았나 철학자들의 주장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며 '용비어천가'성 이야기를 유포하는듯 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앞의 세이야기의 주제를 합쳐 <기술, 경험, 정서, 그리고 이념의 문제>라는 제목만 지어놓고 이 책 저 책 들척이면서 밤마다 놀고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올해 사 본 책들이다. 이것 저것 들고 띄엄 띄엄 웹서핑하듯이 읽었고, 또 읽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장 주관적인 매체라는 책"의 내용이 이리 저리 통접(연접+이접)되어 이상한 모습을 띄는듯하다. 한권의 책에서 주는 생각의 연속성이 깨지고 단절과 비약이 심해 비선형적인 웹서핑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11월 ----------------------------------------------
공간 속의 시간(도시사 연구 총서 1)(양장본) 외 3개
텔레비전과 동물원
미술사의 역사
기나긴 혁명 (문화사, 대중문화에 대해)
벤야민 & 아도르노(지식인마을30) 외 2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데리다 들뢰즈)

10월 ----------------------------------------------
미디어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는가 외 2개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 (<디지털 모자이크>에서 말한 '모자이크'에 대해 역사/예술 내에서 알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기술지대의 발생 동력인 기술혁신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9월 ----------------------------------------------
공론장의 구조변동: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외 3개 (부르조아 미디어/공론장의 생성과 발전에 대해 알기 위해)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비평정신1)
유혹하는 에디터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
군림천하. 21

8월 ----------------------------------------------
참회록(성 어거스틴의)
인권의 발명
디지털 모자이크

7월 ----------------------------------------------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외 3개
비판과 화해(아도르노의 철하과 미학)
미술의 불복종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군림천하. 20
강연과 논문 - 마르틴 하이데거 (이학문선 03)(양장본) 외 1개
비트겐슈타인(하룻밤의 지식여행 51)

6월 ----------------------------------------------
군중심리(완역본) 외 4개 (인터넷에서의 군중심리를 어떻게 이해할까 생각해 보기 위해)
사회학의 문화적 전환 (시민종교로서의 미디어, 공감과 연대에 대한 접근법을 보기 위해)
이미지시대의 역사기억
텔레비전론
생각의 탄생 (몸으로 생각한다는 것, 미세지각에 대한 사례를 보기 위해)

5월 ----------------------------------------------
진중권의 이매진 외 2개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촛불에 길을 잃다: 쇠고기 수입협상에서 정권퇴진 운동까지 (촛불반대 논리를 살펴보기 위해 구입한 책, 진보적이라 생각한다면 사보지 말것)

4월 ----------------------------------------------
몸의 역사(살림지식총서 274) 외 1개
휴대폰이 말하다(아로리총서 4)

3월 ----------------------------------------------
서양 미술사. 1 외 1개
일방통행로

2월 ----------------------------------------------
매클루언의 이해: 그의 강연과 대담 외 3개 (맥루한에 관심이 있다면 이책을 볼 것, <미디어의 이해>보다 더 재미있다고 생각됨)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자본주의적 문화, 예술론의 시발점을 이해하기 위해)
발칙하고 기발한 사기와 위조 행진 (예술에서 모작, 원본이 없는 기술적 복제 등에 대한 이해를 위해)
아빠의 몰락

1월 ----------------------------------------------
문화예술경제학 (예술, 문화의 경제학적 함의를 살피기 위해, 기술지대 관련)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폭력에 대한 성찰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다시 사회구성체론으로(부커진 R2)

--------------------------------------------------
주석

2009/12/24 01:26 2009/12/24 01:26
From. Jeremy 2009/12/29 09:32Delete / ModifyReply
철학과 아니랄까바. ㅋㅋ 30일 소주나한잔하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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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야만

한겨레신문을 보다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씨의 칼럼을 보았다. <문명사회는 아직 멀었다>라는 제목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글이다. 그는 문명사회의 척도를 예절과 법도에서 찾고 문화적으로 성숙한 문명사회의 예를 노일전쟁 때의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의 일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좀더 신중하고 지혜로워졌어야 했다고 아쉬워 한다. 그러면서 "대통령 하기 힘 들어서 그만두고 싶다" 등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발언의 예로 들고 있다.

지난 해부터 <문명>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문명은 강자가 만든 도덕심, 아니 형식화(의례화)된 어떤 사회적 행위의 절차인듯 하다. 이런 의례들을 익히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고 그에 걸맞는 부(문화적 자본을 포함한 부)도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것이 학연, 지연으로 묶인 엘리트집단 내에서 통용되는 '아비투스(Habitus)'일 수 있다. 이것을 습득하지 못한 노무현이란 사람이 대통령이 되자 그들은 야만인이 내뱉는 언사를 참지 못했을 법하다. (<꽃보다 남자>에서 천민과 귀족의 대조는 이런 사실을 희화화하여 보여준다.)
 
검찰 출신의 한 동기생은 연수원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판사 출신인 연수원 교수들이 수업하다가 ‘어이, 상고 출신 노무현이 대답해봐’ ‘나이 많은 노무현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 식으로 짓궂은 질문을 많이 했다. 시보를 나가서도 ‘(상고 출신이라서)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냐, 너 뭘 배웠냐’ 식의 구박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지나치게 경직된 법조계의 분위기를 못 견뎌 했고, 그래서 판사도 짧게 하고 말았다.”(한겨레신문, “이라크파병 반대 표명에 훗날 고마워해”, 2009.5.57)

한겨레의 기사에 나온 내용은 좋게 말해서 짓궂은 것이지 이야말로 하위계층 출신에 대해 '예의와 법도'를 지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 대다수 상층부의 정신적 미성숙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예의와 법도는 자신들 사이에 지켜지는 것이지 모두에게 지켜질 이유가 없다. 이들은 문명이라는 잣대를 이용해 자신들의 가식성에 대한 반성 없이 하층부의 '비속함'을 꾸짖고 정서적으로 못견뎌하고 또 역겨워하기까지한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과정>을 참고할 것)

예절과 법도라는 문명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진보적 지식인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던지는 말의 생경함[footnote]노 전 대통령은 초선 의원 시절인 지난 1989년 국회 5공 청문회 마지막날 "전두환 살인마"라고 외치며 전 전 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지는 등의 행동의 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와 법도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 듯 하다.
출처: 연세대 앞 굴다리에 '전두환 살인마' 등장[/footnote]에 스스로 부끄러워했거나 듣기싫어 했던 것 같다. 나 자신도 조중동, 또는 지배계급이 만든 문명의 영향을 받았든 아니면 다른 연유에서든 언제부터인가 그의 말이 '막가파'처럼 들렸다는 부인할 수 없다. (이성적으로는 좌파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조중동의 영향하에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젠 이성이 아닌 정서에 대해 좀 더 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진보적이라는 말이 전복적이라 말을 담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참여정부를 욕할 때, 나는 처음부터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들에 의해 우리나라가 다시는 (파시스트적)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지 못할 정도로 '갈 때까지 갔다'(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점에서 그 역사성을 높이 샀다. 지금보면 과거의 상태로 되돌아 가는데 1년도 안걸리는 듯 하지만 ... 그래서 그들이 구현한 시대정신이 더 값져보인다.

이런 '막가파'식 발언이 어쩌면 대다수 국민(민중, 서민)이 말하는 방식일게다. 그는 여기서 좀 더 정제된 말을 썼지만. 말이 의식의 표현이라면, 그가 이런 말투를 바꿔 엘리트집단들(전통적 권력집단들)이 쓰는 의례적이고 정중함으로 포장된 식으로 했다면 그나마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갔을까? 그런 말을 쓰는 순간 그 자신도 이러 저러한 기존의 관행(습속)에 끌려들어가 똑같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노무현은 어떻게 5공화국 청문회에서 '스타'가 되었을까?[footnote][영상] 5공 청문회에서 노무현 대통령[/footnote])

기존의 정치문화(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성으로 그가 그 자리에까지 올라왔고, 그 '야생'의 시각에 대한 지지였다면 우리는 그의 '예의없음'[footnote]한편 김동길 명예교수는 지난 29일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 내외에게 사죄를 요구하며 달려든 민주당 백원우 의원도 맹비난했다. 그는 “세상에, 저런 인간도 있는가”라며 “그런 무례한 자는 마땅히 당에서, 국회에서 추방되고, 사법기관이 중형에 처해야 옳은 것 아닙니까. 나라의 꼴이 이게 뭡니까”라고 했다. 김동길씨의 이런 글은 '예의없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전형적 예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출처: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언론의 편파적 태도 비난[/footnote]에 경의와 격려를 보냈어야 했다. 언제나 문명, 문화는 질서(rule)을 만들고 이것에서 벗어날 때 야만이라고 공격을 해댄다.

하지만 질서가 무너질 때도 이 야만성에 대하여 꼼짝 못할 때가 있는데 이 야만인들이 아주 우월한 폭력으로 그들의 문명을 비웃으며 장악할 때이다. 좀 비약인듯하지만 전두환이나 노태우, 박정희와 같은 압도적 폭력수단을 장악한 군사정권의 반문명적 행동(광주학살, 고문과 같은 인권침해 등)에 대해 조중동 및 지배계급이 보낸 것은 추파에 가까운 찬양이었다.

'노무현'을 보면서 어쩌면 문명이라는 저들이 쳐둔 함정에 우리 모두 빠져든 것은 아닌가? 자문한다. 이런 생각도 든다. 10년은 너무 짧다. 보수적인 엘리트집단이 만들어놓은 거미줄처럼 미세하게 사회를 감싸고 있는 습속(문명이란 이름의 야만)을 없애고 다른 '문명'을 만들기에는.

10년이면 강산은 변할 수 있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10년동안' 피트니스센터에서 몸을 만들고, 좋은 의료시설을 이용한 분들에겐 60, 70 나이가 고령도 아닌 듯하다. 적어도 한세대 이상이 지나 이들 자리가, 이들이 만들어 놓은 강고한 재생산 구조가 약해져야 '루비콘 강을 건넣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런 시간을 단숨에 넘어서려면 이 문명을 뒤흔들어 버린 무자비한 '야만성', 사람들의 몸 어느 구석엔가 흐르고 있는 분노들, 생존을 위한 욕구들이 필요할 수도 있다. 역사상 여러 문명이 있었듯이 지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명'도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

김종철씨는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엄혹한 상황에서, 게다가 자신의 아들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상대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정신적 기율이야말로 인간을 드높이는 소중한 자산이다. 그리고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인문적 교양과 문화적 축적의 결과라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

나는 그가 말한 정신적 기율의 위대함을 느끼면서도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인문적 교양과 문화적 축적의 결과"가 어떤 사회가 아닌 구체적인 개인들에게 어떻게 쌓이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작동하고, 사회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지 묻고 싶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정신적 기율을 요구한다면 결국 야만인을 몰아내고 지배계급이 만들어놓은 귀족적 정신에로의 귀의(투항?)가 아닐까?

김종철씨의 이야기를 문맥/상황 속에서 읽으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안하고 표적수사와 확정되지않은 사실을 언론에 흘리기 등에 대한 질타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문명집단(엘리트집단)이 요구하는 노무현식 막말이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으려 하기에 듣기 싫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더 야비하게 행동을 한다. 야비하게 행동해서 성공하면 그것이 맞고 실용적인 것이다.

이성과 야만은 결코 대립적이지 않다. 문명과 야만도 그렇다. 우리는 문명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야만의 얼굴(핵전쟁, 아우슈비츠 ...)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많은 야만 속에서 순수한 인간의 본성을 더 잘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일까?

비극의 원천, 성찰적 삶의 취약성

노무현 전 대통령 비극의 원천도 여기에 있다. 그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기존 지배질서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벗어난 야생성을 가진, 그래서 그 질서에 적응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또 그의 야만성은 (모순적이지만) 감정이 아닌 윤리적, 성찰적 이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야만성/야생성에 기반을 두고 그는 기존 질서(이 나라에 깊이 깔려있는, 학연, 지연으로 연결된 엘리트주의, 권위적 지배구조)에 도전했고, 그 도전의 근거는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경험적'이고 이성적인 성찰에서 출발한 것이다.

실용적, 도구적 이성이 아닌 성찰적 이성에 기반한 삶의 취약성은 여기서 발생한다. 성찰적 이성은 우리의 이념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대가 충족되고 우리의 행동이 성공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지속적으로 유보될지라도 적어도 언젠가는 .... 따라서 진리의 담지자로서 계몽의 사명을 갖게된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가는 것 같다. 결국 세상을 바꾸자면 국민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한겨레신문, 노 전대통령 "자책골 넣은 선수는 쉬는 것이 도리", 2009.5.28)

그런데 검찰의 최근 수사는 그 자신도 "another brick in the wall"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그가 서있던 도덕적 근거가 무화되었을 때, 그 자신이 이 운동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또 그의 선택이 '다른 벽돌 중 하나'가 아닌 이성적 근거를 다시 새움일 때 ... 실용적, 도구적 이성이 아닌 성찰적 이성의 취약성은 여기서 발생한다. "자책골을 넣은 선수는 쉬는 것이 도리일 것이고, 또 열심히 뛴다고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라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젠 제가 이 일을 책임감을 갖고 끌고 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적는다.(한겨레신문, 노 전대통령 "자책골 넣은 선수는 쉬는 것이 도리", 2009.5.28)

성찰적 이성은 어떤 과정이 잘못되었을 때 - 우리의 행동이 실패했을 때 그 목표가 진리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순교자의 지위"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반성의 진정성을 모두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성적 회고와 성찰이 없는 실용주의와 다른 점이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또 더 확대하여 이명박 정권)이라면 "우리의 기대가 충족되고 우리의 행동이 성공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념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1조에서 수천억원을 해먹고도 떳떳하게 살아 숨을 쉰다. 해먹었기 때문에 이것이 진리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반성적, 성찰적 이성의 취약성은 진리 앞에서 전두환씨처럼 '통장에 29만원 밖에 없다'고 이야기 하지 못하는, '뻔뻔하지 못함'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끄러워함'일 것이다. 그런데 양심과 수치심이야 말로 오랜 세월 문명이 만들고자 했던 더 중요한 정신적 기율이 아니던가!  감정을 속인 예의 섞인 말도 (귀족적 삶에서 그저 몸에 배인 형식주의가 아닌) 이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하여 죽음과 배를 맞대고 있는 성찰적 이성의 취약성 때문에 그 이성이 추구하는 진리는 생명력을 얻어 영원성을 획득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오래된 경구가 생각난다.

배제의 원리

요즘, '배제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한다. 적 앞에서 왜 분열되는가? 연구대상은 91년 강경대사건 전후에 있었던 김지하씨와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외유를 다녀온 황석영씨이다. 어떤 진보적인 지식인의 행동을 평가하면서 진보주의자들이 이들을 어떻게 밀어내고, 그 밀려나간 끝에서 이들은 어떻게 변하는지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권도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는 잡다한 구체(삶) 속에 박혀 있는 어쩔 수 없는 차이들에 좀 더 천착해야 하지 않을까? 그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추상적 이론(목표)의 힘과 필연성만을 믿을 때, 날선 칼끝에 함께 서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친다.
 
어떻게 보면 의례화된 문명이란 이런 것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사회의 지속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안전판일 수 있다. 이성화되고 야만성을 버릴수록 우리 스스로 관료화된 강철 새장(Iron Cage)에 갇혀지내야 한다. 강철 새장을 깨트리려는 사람들에게 의례화된 문명이란 없어져야 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막스 베버의 종교적 카리스마에 대한 분석을 보면 이런 운동 과정은 하나의 의례를 없애고 다른 의례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시지프나 오이디프스의 비극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예시한다.

저들의 구역질 나는 삶에 욕 한마디 못하고 삶의 윤리적 우위성과 성찰적 이성의 취약성, 배제의 원리를 논하는 내 자신이 ... 애닮다!  ... 다시 시를 써야겠다.

        문학일기2
         - 대학

처음엔 어떤 진실을 간직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1987년, 인천 어딘가에 있던 공사장은 아버지의 유배지였다
우리는 도망하듯 한달에 서너번 이사를 했었다
가족 모두 흩어져 어렵던 겨울 내내
눈화장이 묻어난 어머니의 눈물처럼
검게 흐르던 유등천 뚝방에 앉아 눈물을 흘리다
국문과에 원서를 썼다 그것이 타협처럼 보였었다
어머니는 時流에 따라 살아야한다고 말을 했고
철학은 때 늦은 방석 깔은 점쟁이나 때 이른 의식화된 데모꾼이었다
 
1989년, 재수를 해서 철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時流에 대한 시위라고 생각했다
1990년, 쌍문동 아파트들 사이에 낀 난쟁이 옥탑방에서
감정의 군더더기로 몰아 세워 썼던 시를 모두 태웠다
鐵의 規律로 武裝한 前衛가 되고 싶었다
쌍문동과 방학동의 고층 아파트 사이 여름 내내 썩은 내 나던
개울 옆 머리 흐트러진 판자집이 승리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해 오월 처음으로 광주엘 갔었다 검게 타고 부어올라서도
눈만 살아 빛나던 이철규의 얼굴은 그때 본 그림처럼 생생하다

1991년, 강경대가 죽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고 관료처럼 생각했다
정권의 유감처럼 분노는 수사였고 정세판단이 중요했다
구호는 사막의 삭막하게 부는 바람처럼 들렸다  놀라 울던 가슴,
감정의 군더더기가 더욱 인간적이었고 진리처럼 보였다
분노를 가진 이성이고 싶었다 다시 억제하던 감정에 빠지고 싶었다

초라하게 주져앉았던 1991년, 방황했던 1992년이 가면서 시적 감정은
도구적 합리성을 압도하는 합리적 이성의 뿌리라고 생각했다

                                                                            1996.1.16

2009.5.28 .. 아니 그 전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부터 났던 이런 저런 생각을 오늘(5.31)쓴다.

2009/05/31 14:20 2009/05/31 14:20
From. jaeuro 2010/09/17 14:35Delete / ModifyReply
정보 검색 하던중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인연은 참 오묘한 것 같군요.
아! 그 사람이네..다시 찬찬히 들여다 봅니다.

서정주의 자화상보다 더욱 강렬한 시구네요.
철학, 방송하지말고 시를 쓰셔도 될뻔 했군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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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6일 <뉴미디어론> 세미나를 하면서 마노비치의 "이런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라는 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글이다. 전체로서의 미디어의 역사 속에서, 다른 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 뉴미디어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이런 발제문을 쓰게 된 배경에는 학제(학문, 신문방송학과는 뉴미디어를 어떻게 생각할까? 정치학과는? 미학과는?)간 서로 다른 뉴미디어에 대한 정의가 있는데 이런 정의들은 모두 뉴미디어에서 어떤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노비치의 글 또한 어떤 입장 중 하나에 서서 '어떤 하나의 이데아(idea)로서의 뉴미디어'를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산업에서 보아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웹에서는 웹에서 정의한 뉴미디어가 있고, IPTV는 IPTV가 정의한 뉴미디어가 있다. 그리고 방송사는 방송사가 정의하는 뉴미디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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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의 언어> 중 “이런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 비판

이런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

레프 마노비치는 <뉴미디어의 언어>에서 뉴미디어와 과거의 미디어의 핵심적인 차이를 수적 재현(Numerical Representation)과 이에 근거한 모듈화, 자동화, 가변성, 부호 변환 등의 특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뉴미디어와 옛 미디어의 차이라고 믿는 정의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①뉴미디어는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전환된 것이고, 디지털 방식으로 기호화된 미디어는 분절적이라는 정의부터 ②컴퓨터라는 하나의 기계에서 디스플레이 되는 멀티미디어라는 정의, ③순차적(linear) 접근이 아닌 무작위적이고 동시적(non-linear) 접근이 가능하다는 정의, ④디지털화 정보손실(디지털화된 미디어에 담긴 정보의 유한성)을 초래한다는 정의, ⑤디지털화된 미디어의 훼손 없는 무한복사 가능하다는 정의, ⑥뉴미디어는 미디어가 객체와 이용자가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정의 등은 뉴미디어에 대한 잘못된 신화이다. 왜냐하면 전통 미디어의 양식에서도 이런 특성들을 찾을 수 있고, 따라서 “핵심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디지털 재현이 한정된 숫자의 샘플들로 구성된다”는 분절성이 뉴미디어의 특성이다라는 정의는 이미 영화가 사건을 기준으로 1초당 24프레임으로 샘플 추출한 것과 원리상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영화가 우리를 뉴미디어에 맞게 준비시켜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뉴미디어는 원리적으로 영화가 이룩한 “이러한 이미 단절적인 재현을 계량화하는 것”뿐이고, 영화가 “연속적인 것에서 단절적인 것으로의, 훨씬 더 어려운 개념적 전환”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앞서 이야기한 6가지의 “흔히 뉴미디어와 옛 미디어의 차이라고 믿고 있는 정의들”이 전통 미디어 역사 속에서 형식이나, 또는 기본적인 원리(내용)가 동일한 사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런 이유로 인해 “이런 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what new media is not)”라고 말한다. 결국 이런 특성들을 제외시키고 나면 그에겐 “수적 재현(Numerical Representation)“만이 뉴미디어의 핵심원리가 된다.

마노비치 비판에 대한 논리적 근거 검토

그런데 마노비치가 분절성, 상호작용성과 같은 개념들을 뉴미디어의 원리에서 배제하는 논리의 기반에는 반증주의(反證主義)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증주의는 “참인 관찰 언명의 어느 정도 유용성을 갖긴 하지만, 관찰 언명에 근거한 논리적 연역을 통해 보편 법칙이나 이론을 지지할 수 없다. 그 반면에 전제로서의 단칭 관찰 언명을 근거로 하여, 논리적 연역에 의해 보편 법칙과 이론이 거짓임을 밝히는 것이 가능하다”는 귀납적 비약(歸納的 飛躍)을 통해 성립된 과학이론(가설)이 성립되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기 위해 제안되었다.

마노비치는 “뉴미디어는 분절적이다”라는 명제(주장)에 대한 진위를 따질 때 반증주의자들이 ”보편 언명이 거짓이라는 것을 적절한 단칭 언명에서 연역해낼 수는 있다”는 논점을 철저히 활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다만 (과학철학에서의) 반증주의자들은 과학의 전제를 다루고 있기에 ‘반증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뿐인데, 마노비치는 미디어의 역사 안에서 보편 언명에 대한 적절한 반증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반증된 명제를 뉴미디어의 정의에서 배제한다.

반증주의자들이 “검지 않은 까마귀 한 마리가 x라는 장소에서 t라는 시간에 관찰되었다”라는 전제를 통해 “모든 까마귀가 검은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추론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노비치는 “전통 미디어인 영화는 시간을 1초당 24프레임으로 샘플 추출한 분절적인 것이다”라는 반증사례를 통해 “뉴미디어는 분절적이다”라는 명제를 기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뉴미디어는 수적 재현이다”라는 명제를 이런 방식을 통해 비판할 수 있지않을까? 이런 비판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전통 미디어가 “x라는 장소에서 t라는 시간”에 “수적 재현”이라는 이런 양식을 띄었음을 입증하면 된다.

미디어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수적 재현 양식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19세기 사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수학 특히 기하학과 관련 없이 미술을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400년부터 1250년 사이에는 열성적인 교회의 신부들에 의해 고대의 전통이 남아있던 모든 예술 작품들을 파괴되었고, 미술과 수학(물리학)에 대한 위대한 서양의 전통도 함께 파괴되었지만 말이다.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에서 가르치던 유클리드(BC 330? ~ BC 275?)는 <원론(Elements)>에서 공간에 대한 연구를 기하학이라는 학문분야로 성립시켰다. 그는 정신적 추상에 기초해 공간을 직선들의 상상적인 그물망에 의해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체계화하였다. 또 자연은 이러한 기하학적 접근을 확증시켜주었다.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가 직선이라는 명제는 유클리드의 공간이 단일하고, 연속적이면서 균등한 곳임을 함축한다.

또 피타고라스(BC 582~BC 496)와 그에 의해 창설된 학파는 수학을 통해 정화와 불멸이라는 신비적인 종교의 문제에 도달하고자 했고, 수학적 사유가 인간을 개별적인 사물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질서 있는 세계, 즉 수의 세계로 이끈다고 생각하였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만물은 수이다’라는 주장은 모양과 크기를 갖는 만물의 기초에는 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수로부터 기하로, 더 나아가 실재의 구조로 나아갔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를 이해함으로써 그들은 ‘형상(form)’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의 영향 속에서 고대인들은 수를 변덕스럽게 변화하고 있는 만물의 근저에 있는 고정불변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기하학적 공간과 수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플라톤(BC 428/427 ~ BC 348/347)이 “기하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는 문구를 자신의 아카데미 정문에 새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근원을 수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를 수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스의 미술가들은 완전성에 대한 추구를 통해 이러한 이상을 성취하였다. 우리가 쓰는 “합리적(rational)”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이성, 논리 그리고 인과성이라는 하부적인 뜻과 함께 비례라는 뜻을 의미하는 라틴어 ‘ratio’로 소급된다. 고대 건축 양식에서 발견한 직사각형의 이상적인 비례는 각면이 5:8의 비율이다. 그리스 신전들은 이 공식을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이러한 완전성의 모델이 지금 “황금비”로 알려진 것이다.

영화가 1초당 24개의 프레임으로 샘플을 추출하여 시간을 근거로 한 분절성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근원을 수라고 생각하면서 세계를 수적 질서로 해석하고, 또 자신들이 만들어낸 미적(미디어) 양식을 수적 비율을 통해 재현하였다. 이들의 접근이 뉴미디어의 수적 재현보다 더 급진적인 접근이고, 인류문명사에서 보면 “더 어려운 개념적 전환”이었다.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비너스

파르테논 신전은 BC 447년 기공하여 BC 438년에 완성되었다. 익티노스가 설계한 파르테논 신전은 각 부분이 정확하게 기하학적인 비율로 되어 있다. 신전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외부 윤곽은 완벽한 황금 사각형이다. 신전 기둥의 윗부분은 전체 높이를 황금 분할하고 있다. 왼쪽에서 네 번째 기둥은 가로 길이를 1 : 1.618로 황금 분할하고, 다섯 번째 기둥은 가로 길이를 1.618 :1로 황금 분할한다. 또 제일 아래 기단의 가로를 한 변으로 하고 기둥의 높이를 또 한 변으로 하는 직사각형은 황금사각형 두 개를 붙여 놓은 것과 같다.

그리스 말기에 만들어진 비너스(BC 2C ~ BC 1C초) 상에서 황금비로 이루어진 수적 재현의 문제를 살펴보면 배꼽을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가 1:1.618이고, 상반신만 놓고 보면 머리끝에서 목까지, 목에서 배꼽까지의 길이의 비도 그렇다. 또 하반신에서는 발끝부터 무릎까지, 무릎부터 배꼽까지 길이의 비가 1:1.618이다.

황금비에 대해 그리스 예술가들은 완전비례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시각예술에서는 이러한 특정한 비례가 보편적으로 인정받아 ‘카논’이라고 불리었다. 15세기의 유명한 수학자 파치올리(Luca Pacioli)는 이것을 ‘신성비례’라고, 17세기 초 케플러(Johannes Kepler)는 ‘귀중한 보석’이라고 불렀고 ‘황금비’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세기 때부터이다. 이때 페히너(Gustav Theodor Fechner) 같은 사람은 심리학적 방법을 통해서 황금비에 관한 실험을 행했다. 미를 비례나 조화로 보려는 견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고대 로마에서 꽃피고, 중세시대의 긴 침잠기를 거쳐 르네상스 이후 찬란하게 부활하여 지금도 미적 기준으로 작용한다.

꽃다발 만드는 법에 적용된 황금비율

<그림. 꽃다발 만드는 법에 적용된 황금비율>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perspective)이 발견되었다. 원근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그리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다. 시선의 법칙에 충실한 원근법은 중세 회화에서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동시에 드러내는 비현실적 공간을 배제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회화를 학예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고, 과학적인 탐구정신을 기반으로 대상을 탐구하고, 회화를 수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원근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벽, 마루, 천정에서 멀어지는 선들은 깊이를 나타내면서 그리스도의 머리 바로 위 한 점에 모아지도록 그렸다. 이 소점은 화면에서의 강조점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면서 동시에 화면 전체를 통일된 구도 속에서 파악하도록 한다.

16세기 원근법은 알프스를 넘어 북으로 퍼져 많은 미술가와 이론가들에 의해 발전되고 정교해 진다. 독일의 뒤러는 <측정법>(1525), <인체비례론>(1528) 등을 통해 원근법이론을 한다.

뒤러, <원근법 연구>

1525년 뒤러의 목판화 <원근법 연구>를 보면 비스듬히 놓여있는 류트의 손잡이 쪽에서 보면 화면에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연구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화가와 사물 사이엔 한 장의 투시화면을 세워 화면을 통해 오는 시선을 따라 화면에서 절단되는 단면을 그리면 정확한 화상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화면에서의 사물의 형상을 정하기 위하여 화가의 눈과 사물을 잇는 선이 화면 위치에서 만나는 점을 찾아내고 있다.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배운 미술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 원근법에 매료되어 있었다.

회화와 수학을 체계적으로 연결시킨 최초의 인물인 레오나르도는 “수학의 특성 중에서 증명의 확실성이야말로 탐구자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기 때문에, 원근법은 인간의 모든 지식체계와 학설 중에서 으뜸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예술(미디어) 형식에서 수적 재현의 문제는 음악에서도 발견된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은 음악에 하나의 정수비가 존재하면, 그 비율에 따라 각 음절들은 조화로운 음정을 이루기 위해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런 예를 통해 ‘만물은 수이다’라는 개념에 대한 개념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노비치가 뉴미디어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쓴 것처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많은 원칙들이 뉴미디어에만 유일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미디어 기술에도 역시 유효”했듯이 수적 재현의 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예들을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위에서 보인 예들이 부족하다면 마노비치가 “상호작용성의 신화”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문장을 인용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모든 고적적인 그리고 심지어 어느 정도 현대적인 예술작품들도 여러 가지 방식에서 ‘상호작용적’이다. 문학적 서사에서 생략, 시각예술에서 대상의 세부묘사의 생략, 그리고 또 그외의 재현적 ‘축도’ 등은 사용자가 잃어버린 정보를 채워 넣도록 요구한다. 연극이나 회화 역시 관람자의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연출이나 구성에 의존하며, 관람자가 디스플레이의 여러 부분들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조각과 건축에서 공간적 구조물을 경험하려면 관람자 자신이 직접 몸을 움직이며 돌아다녀야 한다.”

현재 존재하는 조각과 건축은 수학적 비례와 균제, 건축공학의 산물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미디어의 수적 재현은 고대 그리스 이래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문자 이후 가장 오래된 미디어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뉴미디어 개념에 대한 접근

이렇게 비판했을 때, 모든 뉴미디어에 대한 정의를 기각하고 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 ‘뉴미디어란 무엇인가?’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눈만 껌벅대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는 방식으로 <뉴미디어론 강의를 시작하며>에서 인용했던 맑스(K. Marx)의 <정치경제학 비판서문>과 나의 제안을 다시 ‘읽기로’ 하겠다.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수 많은 규정들의 총괄, 즉 잡다한 것의 통일이기 때문에 구체적이다. 따라서 사유 속에서 구체적인 것은, 비록 그것이 현실의 출발점이고 따라서 직관과 표상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총괄의 과정, 결과로서 나타나는 출발점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구체에서 추상으로, 또 다시 추상에서 구체로’의 사고의 운동과정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뉴미디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이런 과정을 거치자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리는 뉴미디어라는 어떤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에 대한 정의를 역사적 사례들과의 대조를 통해 완전하게 새로운 특성의 발견을 통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뉴미디어는 전 미디어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거나 발명되었던, 그리고 지금도 새롭게 발견되고 발명되는 것들 사이의 관계, 그 관계 속에서 어떤 특정한 형태(특성)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강해짐으로 전체가 변형되고,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어떤 것으로 ‘가정’하면서 이해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이 ‘어떤 것’을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고 싶다.)

만일 뉴미디어의 원리가 0과 1로 이루어진 수적 재현의 형식이 맞다 하더라도 이 재현의 형식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명될 수 있다. 앞에서 마노비치가 비판했던 6가지의 개념들을 생각하지 않고 뉴미디어를 그려낼 수 있을까? 우리가 이것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이런 개념들을 다시 가지고 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뉴미디어는 이러한 ‘잡다한 것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구체적인 층위에서 차이적/미분적(differential) 관계가 개체화되는 것을 다루기 위해 ‘강도(intensity)’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미분적인 관계는 강도적인 양을 통해서 개체적 차이로 구체화(분화)된다. 예를 들면 유전자는 뉴클레오티드들의 이웃관계(미분적 관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는데, 이러한 관계는 수정란 표면에 새겨지는 힘의 강도들을 통해 상이한 기관들로 분화된다. 이처럼 유기체는 차이적 관계가 작동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관계의 차이에 따라 다른 개체가 되는 것이다. 미디어에서도 이웃항과의 관계에 따라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동일한 어떤 것이 이웃과의 관계에 따라 뉴미디어가 될 수도 전통미디어가 될 수도 있다.

알뛰세르는 헤겔적인 ‘총체성’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를 사고하기 위해 ‘중층적 결정(overdetermin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프로이드는 이 용어를 수많은 꿈의 사유들이 단일한 이미지로 응축(condensation)되는, 또는 특별히 강력한 사유로부터 정신심리학적 에너지가 외관상 사소한 이미지로 대체(displacement)되는 과정에서 특권적 지위를 얻은 이미지로 꿈의 사유들이 표상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알뛰세르가 프로이드에 기대 이와 똑 같은 개념을 사용한 이유는, 사회구성체의 각 구성요소 내의 모순이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 위에 미치는 효과들을 묘사하여, 주어진 역사적 순간에 지배 내 구조에 있는 모순들의 지배와 종속, 적대성과 비적대성을 규정하기 위해서였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모순 A의 중층적 결정이란 그 복합적 전체 내에서 있는 모순 A 이외의 다른 모순들이 모순 A에 반영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사회과학에 있어 그것을 달리 말하면 모순 A의 불균등 발전이다.)

우리는 ‘중층결정’된, 또는 이웃관계들의 강도들을 ‘가족유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를 통해 ‘전체로서의 뉴미디어’에 접근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다음 시간부터 강의할 <미디어2.0,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에서 다루는 문제이다. (본질주의적 접근이 아닌 관계적 접근을 시도한다.)

참고문헌

1. 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생각의 나무(2004)

뉴미디어의 언어 - 10점
레프 마노비치 지음, 서정신 옮김/생각의나무

2. 앨런 차머스, <현대의 과학철학>, 서광사(1985)
현대의 과학철학 - 10점
앨런 차머스 지음, 신일철 외 옮김/서광사

3. 강태희 외, <미술, 진리, 과학>, 재원(1996)
미술 진리 과학 - 10점
강태희 외 지음/재원

4. 레오나드 쉴레인, <미술과 물리의 만남>, 도서출판 국제(1995)
미술과 물리의 만남 1 - 10점
레오나드 쉴레인 지음, 김진엽 옮김/국제
5. 사무엘 E.스텀프, 서양철학사, 종로서적(1983)
서양철학사 - 10점
사무엘 E.스텀프 지음, 이광래 옮김/종로서적

6. 루이 알뛰세르, <자본론을 읽는다>, 두레(1991)
자본론을 읽는다 - 10점
루이 알튀세르 외 지음, 김진엽 옮김/두레
2009/03/16 20:00 2009/03/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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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9일,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의 <뉴미디어의 언어>를 세미나하면서 작성한 발제문이다. 2. 계산기술의 역사, 3. 프로그램과 튜링머신, 5. 뉴미디어의 한계는 컴퓨터(형식언어를 통해 계산 가능한 기계, 수학적 공리계)와 근대철학의 개념을 연결하여 설명하기 위해 교재와 관계없이 추가하였다. 튜링머신,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와 컴퓨터(뉴미디어)의 한계 부분은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지)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라이프니츠의 계산기, 미적분학, 미세지각이라는 개념들의 연관성을 뉴미디어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재미있다.

뉴미디어의 언어 - 10점
레프 마노비치 지음, 서정신 옮김/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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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미디어
  • 계산 기술미디어 기술의 궤도의 하나로 합쳐진 종합, 즉 존재하는 모든 미디어를 컴퓨터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숫자화 된 자료로 전환하는 것
  • 이는 컴퓨터로 처리할 수 있는 그래픽, 동영상, 사운드, 형태, 그리고 텍스트 등으로 구성됨

2. 계산 기술의 역사

1) 고대의 계산기

  • 수판(ABACUS) : 기원전 2600년경에 중국에서 개발

수판

2) 근대 수학과 기계식 계산기

  • 최초의 기계식 계산기: 파스칼의 치차식 계산기 (1642년 개발, 덧셈과 뺄셈만 가능)
    바퀴 하나하나가 숫자의 단위를 나타내고, 각 톱니바퀴에는 톱니가 10개씩 있었다.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최초의 기계식 계산기

  • 탁상계산기의 시조 : 라이프니츠의 승산기 (1671년 개발, 사칙연산이 가능)
    파스칼의 계산기를 기반으로 만든 톱니바퀴식 계산기로 무겁고  톱니를 돌리는데 너무 힘이 많이 든다는 한계가 있었다.

라이프니츠의 승산기

라이프니츠와 결정문제
만일 우리가 어떤 논리기계를 가지고 있어 그 기계 안에 '어떤 종류의 진술들(논리적 명제, 함수들)'을 집어 넣고 손잡이를 돌려서, 그 논변이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여부를 그 기계가 확정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기계를 논리학자들은 결정절차(decision procedure)라고 한다.

이런 절차에 대한 연구가 1930 년대 Alan Turing으로 하여금 계산(Computation)의 기초를 탐구하도록 촉발시켰고, 그가 튜링기계(Turing Machine)라고 이름 붙인 '이론적인 기계장치(실제 기계가 존재하지 않고 사고실험용 가상의 기계)를 고안하도록 했다. 튜링머신이 다루는 문제, 산술의 공리계가 자기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려는 문제를 결정문제(decision problem)라고 한다.

결정문제는 주어진 일차논리(first order, 공리계) 문장이 유효한지(universally valid) 아닌지를 결정하는(decide) 범용 알고리즘을 발견하려고 하는, 기호논리학(Symbolic Logic) 분야의 과제이다. 1936 년에 Alonzo Church와 Alan Turing은 각각의 연구에서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마찬가지로, 특히 산술에서의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여부를 알고리즘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정문제는 17 세기의 Gottfried Leibnitz 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수학문장의 진리값을 결정하기 위해 기호를 조작할 수 있는 기계를 꿈꾸면서, 기계적 계산기(위에 있는 사칙연산용 라이프니츠 승산기)를 만드는데 성공한 직후이다. 그는 그 첫 단계가 명확한 형식언어(Formal Language)이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그의 계속 진행된 대부분의 작업이 그 목표를 향한 것이다. 1928년에 David Hilbert 와 Ackermann 은 위에서 언급한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라이프니츠와 미적분학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은 근대 서양사상사의 최대 과제인 "계량가능한 모든 것을 계량하라" 그리고 "계량가능하지 않은 것은 계량가능한 것으로 바꾸어라"라고 하는 두 가지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철학적 그리고 수학적 배경이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은 실제 뉴우튼이 작성한 미발표 원고를 라이프니츠가 읽고 먼저 출판했다고 한다. 뉴우튼은 미적분을 만들고도 사람들이 찾아와 괴롭히는 것이 싫어 발표를 미뤘고 후에 자신이 만든 미적분학을 홈친 라이프니츠를 비난했다. 계량화라는 라이프니츠의 생각을 구현한 것이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의 세계이다.

첫째의 명령은 이미 근대의 출발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세계에는 원래 계량가능한 것보다 계량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둘째의 명령을 수행하기에는 혁명적인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연 안에는 원이나 사각형처럼 계량가능한 기학하적 모델은 희귀하며 정형의 틀이 없는 그래서 계량할 수 없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말하는 완전한 평면, 두점사이의 최단거리로 정의되는 직선 등을 자연세계에서 발견하기 힘들고 이런 것들은 추상적 사고의 산물이다. 한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인 원도 마찮가지이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법은 이러한 계량불가능의 자연적 대상을 계량화하기 위하여 대상을 무한분할하여 가상적인 미소의 사각형을 만들고, 계량화된 그러한 미소의 사각형의 계산값을 합하여 전체의 자연대상체를 계량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미적분의 방법은 세계를 계량화하여 정보전달의 방식을 용이하게 한 사유의 결정적인 전환이었다. 이러한 계량화의 도구인 미적분법의 덕택으로 이후 서양 근대과학은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은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화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미적분법은 계량화로 설명하는 자연관을 확립시켰지만, 그 대신 원래 연속적인 자연의 모습을 불연속의 기하학적 모델로 환원시킴으로써 불연속의 미소 단위의 사각형과 사각형 사이의 연속적인 미소 자연을 배제하여 버리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불연속의 기본 단위체들 틈에 끼어 있던 미소자연이 없어짐으로써 정보전달 과정에서 생기는 노이즈를 해소하기는 했지만 원래의 자연의 모습은 아닌 수학적 가상계가 탄생되었다. 문제는 그러한 수학적 가상계가 자연의 현실계를 대체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배제된 미소자연을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하는 미세지각에 대한 논의와 연결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세지각 이야기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픽셀로 이루어진 컴퓨터의 영상세계도 미분과 좌표체계의 산물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수학적 가상계(가상현실)은 이전의 미디어와 달리 세계를 열등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이런 의미에서수학적 가상계가 자연의 현실계를 대체하고 말았다.

  • 전자 계산기의 기초 : 베비지의 해석기관 (1833년 개발, 차분기관을 보완한 장치). 오늘날의 컴퓨터의 모체가 되는 기억 장치와 연산 장치를 갖춘 해석 엔진(Analytical Engine)을 설계 제작하였으나 당시의 기술 수준과 자금력 부족으로 실용화 되지는 못하였다.
    •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 : 로그와 삼각함수를 계산할 수 있는 계산기계
    •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 : 모든 종류의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계산기계 (해석기관은 일부분만 제작되었음)
    • 입력장치, 기억장치, 연산장치, 제어장치, 출력장치 기능을 갖춤
    •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 : <베비지의 해석기관에 대한 분석>
      이 책에서 에이다는 해석기관의 프로그램 개념을 설명하며 같은 공식을 반복하는 루프(loop), 사용한 공식을 다시 사용하는 서브루틴(subroutine), 구문을 뛰어넘어 실행하는 점프(jump)의 개념과 조건식 IF구문을 고안했다.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을 작곡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도 가능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베비지의 해석기관

3) 국가의 개입에 의한 컴퓨터 시스템 발전 (컴퓨터의 공적 성격)
     컴퓨터, 인터넷 등 뉴미디어는 모두 전쟁/냉전과 국가개입(대규모 예산투입)의 산물이다.

  • 일괄처리 방식의 효시 : 홀러리스의 천공카드(PCS)시스템 (1890년 개발, 인구조사에 사용)

홀러리스 천공카드 시스템

  • 최초의 전기기계식 계산기 : 에이컨의 MARK-I (1944년 개발, 원자폭탄 제작에 사용)

에이컨의 MARK-I

  • 독일군 암호(에니그마)를 풀기 위해 만들어진 영국의 Colossus (1943년)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계적(형식적) 계산체계를 이용하여 2차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암호문을 해독하기 위해 만든 컴퓨터
튜링의 코로서스

  • 최초의 전자식 계산기 : 머클리와 에커트의 ENIAC (1946년 개발, 미 육군 탄도계산에 사용)
    ENIAC은 무게(약30톤)의 커다란 몸체를 가졌고, 18,000개의 진공관으로 구성됐다. 진공관은 수명도 짧고 쉽게 깨지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머클리와 에케드의 ENIAC

  •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방식 : 모리스와 윌키스의 EDSAC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1949년 개발)
    프로그램 내장 방식은 ‘인간의 두뇌처럼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미리 넣어두어야 한다’고 폰 노이만이 제안한 컴퓨터 운영방식이다. 이외에도 폰 노이만은 병렬처리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에 필요한 논리를 체계화하였다.
모리스와 윌키스의 EDSAC

  • 최초의 상업용 전자 계산기: 머클리와 에커트의 UNIVAC-I (1951년 개발, 미 통계국에서 구입)
머클리와 에커트의 UNIVAC-I

  • 최초로 2진법과 프로그램 내장방식 완성 : 폰 노이만의 EDVAC (1951년 개발)
폰 노이만의 EDVAC

  • 최초의 상업용으로 개발된 개인용 컴퓨터 : Altair 8800 (1975년 개발)

Altair 8800

computer history museum
추가적인 사항은 컴퓨터의 역사를 참고할 것

3. 프로그램(알고리즘)과 튜링 머신

1) 0과 1, 디지털신호, 정보

  • 0, 1 : 디지털신호
    • 컴퓨터는 전류가 흐르느냐 아니냐에 따라 판단하도록 만들어진 기계로 전류가 흐르면 1, 흐르지 않으면 0
    • 하나의 진공관으로 만들 수 있는 신호의 수 : 2개
    • 두개의 진공관으로 만들 수 있는 신호의 수 : 4개
    • 세개의 진공관으로 만들 수 있는 신호의 수 : 8개
    • n개의 진공관으로 만들 수 있는 신호의 수 : 2의 n승 개
    • 32bit는 4억 가지가 넘는 신호를 처리
  • 프로그램
    • 신호를 분석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 신호를 받아서 여러 가지 정보를 처리할 때 필요한 명령의 집합
    • 컴퓨터 프로그램(computer program, 보통 간단히 '프로그램’) : 컴퓨터에 의해 실행되는 지시사항의 모음인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한 예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실행 중(즉, 명령어를 '불러들일' 때)에 사용자의 입력에 반응하도록 구현된 명령어의 집합으로 구성됨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은 하드디스크 등의 매체에 바이너리 형식의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가 사용자가 실행시키면 메모리로 적재되어 실행됨
    • 함수, 라이프니츠의 형식언어(Formal Language)

2) 프로그램밍 언어와 기계어

  • 기계어
    • 0, 1만으로 이루어진 컴퓨터 언어
    • 사람이 0과 1로 일을 컴퓨터에 명령하기는 쉽지 않음 (천공카드)
  • 프로그램밍 언어
    •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기계어를 쉽게 줄여서 사람들이 좀 더 쓰기 쉽게 개발된 언어(인공어)
    • 어셈블리어 : 복잡한 숫자를 알파벳 기호로 바꾼 것
    • 베이직, 포트란, 코볼, C, C++, JAVA, MFC
    • 컴파일러(compiler, 옮김틀, 번역기)

3) 튜링 머신

  • 프로그램과 알고리즘
    • 알고리즘과 튜링 머신
    • 튜링은 1935년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에서 수리논리학을 공부하며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할 문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씀. 이 논문에서 고정되고 명백한 과정으로 풀 수 없는 수학 문제들이 있음을 증명
    • 이는 훗날 컴퓨터 이론의 발전에 이정표가 되었고, 오늘날 '튜링 머신'으로 알려진 개념의 기초가 됨
    •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 27살의 튜링은 오늘날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튜링머신’을 수학적으로 고안
    • 튜링머신은 명령어와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데, 튜링은 구멍 뚫린 종이테이프에 필요한 명령을 입력하면 마치 자동기계처럼 컴퓨터가 작동할 것이라 설명
    • 헝가리 출신의 프린스턴 대학 수학교수인 폰 노이만(1903-1957)이 그의 아이디어를 보고 프린스턴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튜링은 미국을 떠나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콜로서스(Colossus, 거인)를 만듬

4. 뉴미디어의 원리: 수적재현, 모듈성, 자동화, 가변성, 부호변환

1) 수적재현(Numerical Representation)

  • 모든 뉴미디어 객체들이 숫자의 형태를 지니는 것, 다시 말해 뉴미디어가 수학적 함수를 사용해서 기술될 수 있다는 점과 연산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즉 프로그램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2) 모듈성

  • 하나하나의 '객체(object)'로 설명되는데, 간단히 말하면 뉴미디어 객체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객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삭제와 대체하거나 덧붙이는 것이 매우 쉽게 이루어짐
    • 블로그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객체, 모듈)들
    • Image Layer 개념의 경우
    • 객체지향 개발방법론의 경우 (SOA; Service Oriented Architecture, 프로그램 객체, Lego … )
    • 서비스 플랫폼으로 웹(Service On the Web)의 경우

3) 자동화

  • 수적표상과 객체의 모듈성이 이루어지면 미디어를 만들고, 조작하고, 접근하는 등의 많은 오퍼레이션이 자동화됨
    • “누가 기계의 스위치를 누르는가?”라는 질문 (어디까지 자동화할 수 있는가? 괴델의 불완전의 원리 또는 튜링의 정지문제)
    • Prosumer 또는 Proture 현상
    • Search Robot (yahoo에서 google로)
    • 부불노동

4) 가변성

  • 뉴미디어 객체는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무한한 판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가변적(variable)’, 혹은 ‘변형 가능(mutable)', '유동적(liquid)' 등의 특성을 가짐
    • 기술 복제 문제와 성지순례(원본을 찾는 사람들) 현상
    • 콘텐츠 보호의 경우 (유동성을 막는 장치들)

5) 부호변환

  • 다른 포맷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 미디어가 컴퓨터 데이터로 전화되고, 데이터 구성의 규범을 따르는 것을 말함
    • 동영상 포맷 변환의 경우 (Cross Platform, Cross Media, 프로그램(player) … )
    • 표준화 문제 (새로운 walled garden … )

6) 뉴미디어의 원리와 User Generated Content


5. 뉴미디어의 한계?

1) 힐베르트의 문제(Hilbert's problems)

  • 수학 문제 23개로, 독일의 수학자인 다비드 힐베르트가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20세기에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안한 것
  •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힐베르트는 10문제(1, 2, 6, 7, 8, 13, 16, 19, 21, 22)를 공개했고, 나중에 모든 문제가 출판됨
  • 사실, 처음에 힐베르트는 24문제를 생각하였으나, 맨 마지막 문제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 이 24번째 문제는 나중에 독일 역사학자인 뤼드게르 틸레(Rüdiger Thiele)가, 힐베르트가 문제들을 공개한 지 100주년인 2000년에 재발견함
힐베르트의 문제
산술의 공리들이 무모순임을 증명하라. 1931년에 증명된 괴델의 제2 불완전성 정리는 산술의 공리계가 자기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음을 보였으며, 1936년에 겐첸은 서수 ε0이 기초집합이라는 가정을 하면 산술의 무모순성이 증명됨을 보였다. 괴델과 겐첸[?](Gentzen)의 결과가 이 문제를 해결했는지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정문제 ('라이프니츠와 결정문제'를 볼 것)

2) 괴델의 정리(Godel's Therem, 독) : 완전성의 정리, 불완전성의 정리

  • 괴텔이 증명한(1931) 기호 논리학과 수학 기초론 상의 정리
    • 자연수에 관한 피노(G. Peano)의 공리계(公理係)와 러셀ㆍ화이트레드의 『수학원리』의 '술어 논리'인 공리계를 첨가한 형식적 체계는 불완전하였으며, 결국 여기서는 증명도 반증(反證)도 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 이런 체계로 본다면 어떤 일정한 조건을 갖춘 무모순(無矛盾)적인 형식적 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속에서는 증명될 수 없다는 것
    • "수학은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 → 유한한 수학적 형식논리체계(유한한 함수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컴퓨터의 한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
1931년 괴델이 증명한 두 개의 정리로, 자연수를 포함하는 수학의 형식화에 대한 한계를 증명했다. 정리에 따르면, 자연수의 이론을 포함하며 모순이 없는 모든 공리계에는 참이지만 증명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하며, 또한 그 공리계는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
  •  제 1 불완전성 정리

괴델의 제1 불완전성 정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술적으로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임의의 무모순인 계산 가능한 가산 이론에 대해, 참이지만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 없는 산술적 명제를 구성할 수 있다. 즉, 산술을 표현할 수 있는 이론은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여기에서 "이론"은 명제들의 무한집합으로, 여기에 속하는 것들 중 일부는 증명 없이 사실인 것으로 취급되는 공리이며 나머지는 공리들로부터 유도되는 정리이다.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 있는" 명제란 공리에 1차 논리를 적용하여 유도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론 내에서 모순된 명제가 증명될 수 없을 경우 이를 무모순이라 한다.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이론 내에서 해당 명제를 실질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과정이 존재함을 말한다. 또한 여기에서 "산술"은 자연수의 덧셈과 곱셈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정리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한 산술적 명제를 해당 이론의 "괴델 명제"라 한다.

  • 제 2 불완전성 정리

괴델의 제2 불완전성 정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리로부터 출발한 산술체계가 무모순인지의 여부 자체가 참 또는 거짓인지 결정할 수 없다.

3) 힐베르트, 괴델, 튜링

  • 힐베르트 : 수학적 질서 위에 근대 과학 근거를 지우기 위한 24개의 난제를 해결 요청
    • 수학의 체계를 완전하고 모순이 없는 공리계로 형식화하려는 계획
  • 괴델 : 특정 공리계 내에서의 증명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함을 보여 형식적 체계의 불완전성을 이끌어냄
    • 메타 과학, 또는 불가지론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열어놓음
  • 튜링 : 형식적 체계 내에서 계산 가능한 것에 대한 이론을 수립하여 컴퓨터의 기초를 세움 (튜링머신을 통해 괴델의 불완성의 원리를 쉽게 규명)
    •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 즉 계산 가능한 영역을 확정
    • 무한한 입력 → 유한한 내적 영역(컴퓨터 프로그램) → 무한한 출력
    •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영역 : 무모순성의 영역, 정지문제(halting problem)로 증명
    • 내적 영역(컴퓨터 프로그램)의 한계
    • 괴델의 정리를 정지의 문제로 증명

4) 컴퓨터의 한계 ?

  • 컴퓨터가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식 (좌표, 색상, 점과 색의 알고리즘 ….)
    •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 양의 문제가 아닌 정보를 구성하는 형식의 문제
  • 노이즈(noise)의 존재와 근대적 해결방식
( … 전략) 정보의 분해와 조립과정이 가역적이라는 말은 다음의 의미를 함의한다.
  • 정보 환원주의 : 전기신호와 같은 분해된 단위는 모든 정보 의미체에 공통적이며, 환원 가능하다.
  • 노이즈 배제주의 : 전기신호 0과 1 사이의 존재가능한 중간 미세정보들은 0과 1 의 디지털 단위로 편입된다. 따라서 중간 미세정보 때문에 발생하는 노이즈의 문제, 그리고 전달의 어려움의 문제 등이 해소된다.
  • 정보 교체가능성 : 서로 다른 정보 의미체 사이의 의미교환이 가능하며, 의미체 구성자는 그 의미를 구성자의 의도에 따라 편집 조립할 수 있다.
  • 다세계론(多世界論) : 현실계와 가상계가 공통적인 디지털 단위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두 세계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그리고 가상세계의 가능수는 무한할 수 있다.

정보 원자론은 이미 누구에게나 수긍이 가는 현대 과학기술의 현실이다. 이진법 전기신호로 모든 정보가 분해될 수 있다는 것이 21세기 과학의 최대변수일 것이라는 예측을 누구나 할 수 있다. 정보 의미체에 대한 분해와 조립의 기술적 가역성은 기존의 정보전달 과정에서 생기는 노이즈 발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이즈 발생의 문제를 해결한 디지털 정보전달의 역사적 범례는 이미 17세기 라이프니츠에게서 이루어졌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노이즈 해결의 단초를 준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은 서양사상사의 최대 과제인 "계량가능한 모든 것을 계량하라" 그리고 "계량가능하지 않은 것은 계량가능한 것으로 바꾸어라"라고 하는 두 가지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철학적 그리고 수학적 배경이다.

첫째의 명령은 이미 근대의 출발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세계에는 원래 계량가능한 것보다 계량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둘째의 명령을 수행하기에는 혁명적인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연 안에는 원이나 사각형처럼 계량가능한 기학하적 모델은 희귀하며 정형의 틀이 없는 그래서 계량할 수 없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법은 이러한 계량불가능의 자연적 대상을 계량화하기 위하여 대상을 무한분할하여 가상적인 미소의 사각형을 만들고, 계량화된 그러한 미소의 사각형의 계산값을 합하여 전체의 자연대상체를 계량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미적분의 방법은 세계를 계량화하여 정보전달의 방식을 용이하게 한 사유의 결정적인 전환이었다. 이러한 계량화의 도구인 미적분법의 덕택으로 이후 서양 근대과학은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미적분법은 계량화로 설명하는 자연관을 확립시켰지만, 그 대신 원래 연속적인 자연의 모습을 불연속의 기하학적 모델로 환원시킴으로써 불연속의 미소 단위의 사각형과 사각형 사이의 연속적인 미소 자연을 배제하여 버리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불연속의 기본 단위체들 틈에 끼어 있던 미소자연이 없어짐으로써 정보전달 과정에서 생기는 노이즈를 해소하기는 했지만 원래의 자연의 모습은 아닌 수학적 가상계가 탄생되었다. 문제는 그러한 수학적 가상계가 자연의 현실계를 대체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디지털 전환은 전기신호 0과 1 사이의 존재가능한 중간 미세정보들을 0과 1 의 디지털 단위로 편입시킴으로써, 중간 미세정보 때문에 발생하는 정보 전달과정의 노이즈의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기는 했지만 원래의 자연정보와의 차이의 간격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디지털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미세한 차이의 가상성을 향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작은 미세한 차이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가상계의 미래를 그 안에 품고 있다. (후략 … )

source: 최종덕(상지대, 자연철학), <가상세계와 다세계의 정보 창출성>

  • 미세지각 (계량화할 수 없는 영역의 존재)
    • 라이프니츠(G.W. Leibniz)는 단자론 에서 명석판명한 의식만으로서는 인간 영혼의 자기동일성이 설명될 수 없다는 근거에서 의식되지 않는 영혼활동인 ‘미세지각’이 존재함을 논함
    • 라이프니츠가 던지는 데카르트 체계에 던지는 물음 : 만일 데카르트처럼 명석판명한 의식만을 인간 영혼의 본질로 간주한다면, 그러한 의식활동이 잠시 정지하는 순간, 예를 들어 꿈없는 잠이나 기절 등이 발생할 경우, 그 의식은 단절되는 것이 되는데, 그 이후의 영혼을 어떻게 그 앞의 영혼과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물음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인간 영혼의 자기동일성은 명석판명한 표층적 의식차원이 아니라, 그 심층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적 활동인 미세지각과 욕구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 (뉘앙스는 다르지만 이 미세지각을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미세지각은 세계를 지각하는 영혼의 활동이되 그 지각의 정도가 너무 미세하고 변화가 적어 의 식의 문턱을 넘지 못하기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지각으로 이 지각이 어느 순간 강력해지거나 변화가 커지면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명석 또는 판명하게 포착하게 됨
      • 아우라
      • 미디어(형식)에 의한 감각능력의 변화
      • 작업장의 커다란 소음
      • 수면시의 지각
        우리는 잠을 자면서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해서 계속 잘 수 있지만 소리가 어느 정도를 넘어서서 커지면 그만 그 소리를 듣고 깸.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잠의 상태에서 작은 소리도 사실 듣고 있다고 말함. 다만 너무 미세한 자극에 그침으로 불명확하여 의식되지 않을 뿐이고, 만약 잠을 자기에 지각 능력이 정지해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라면 작은 소리뿐 아니라 큰 소리도 듣지 못해야 하며, 큰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작은 소리도 이미 연속적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 이런 소리는 다만 너무 작아서 단지 의식되고 있지 않았을 뿐임

	Georges Seurat's The Circus (oil on canvas, 73x59-1/8 inches) is housed at the Musée d'Orsay, Paris.

 Georges Seurat's The Circus (oil on canvas, 73x59-1/8 inches) is housed at the Musée d'Orsay, Paris. (점으로 이루어진 세계와 인지효과/작용)

5) 공리를 넘어선 컴퓨터들의 이야기, <I, Robot>

  •  법칙 1.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된다. (Law I - A Robet May Not Injure A Human Being Or, Through Inaction, Allow A Human Being To Come To Harm)
  • 법칙 2. 법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Law II - A Robot Must Obey Orders Given It By Human Beings Except Where Such Orders Would Conflict With The First Law)
  • 법칙 3. 법칙 1,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 (Law III - A Robot Must Protect Its Own Existence As Long As Such Protection Does Not Conflict With The First Or Second Law)
  • '공리로부터 출발한 산술체계가 무모순인지의 여부 자체가 참 또는 거짓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에 따르면 (인간이 아닌) 형식논리(프로그램)가 내장된 컴퓨터는 자신의 공리(영화에서 제시한 법칙 1,2,3)를 넘어설 수 없음. 넘어섰을 땐 인간과 같은 것?

공리를 넘어선 컴퓨터들의 이야기, <I, Robot>

참고서적 / 사이트

1. http://user.chollian.net/~h242201/com/com-3.htm
2. <Why? 컴퓨터>, 예림당(2001)
3. <에이다 러브레이스와 Ada>, 디지털타임즈, 2008-01-30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08013002012260739001
4. http://en.wikipedia.org/wiki/IBM_5100
5. 컴퓨터의 아버지, 세계 최초의 해커, 알란 튜링
http://windshoes.new21.org/person-turing.htm
6. 프로그램
http://ko.wikipedia.org/wiki/%EC%BB%B4%ED%93%A8%ED%84%B0_%ED%94%84%EB%A1%9C%EA%B7%B8%EB%9E%A8
7. 컴파일러
http://ko.wikipedia.org/wiki/%EC%BB%B4%ED%8C%8C%EC%9D%BC%EB%9F%AC
8. 알고리즘과 튜링 머신
http://www.aistudy.com/ai/algo_turing.htm
9. 힐베르트의 문제들
http://ko.wikipedia.org/wiki/%ED%9E%90%EB%B2%A0%EB%A5%B4%ED%8A%B8%EC%9D%98_%EB%91%90%EB%B2%88%EC%A7%B8_%EB%AC%B8%EC%A0%9C
10. 괴델의 정리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5&idx=1294
불완전성의 정리
http://ko.wikipedia.org/wiki/%EB%B6%88%EC%99%84%EC%A0%84%EC%84%B1_%EC%A0%95%EB%A6%AC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해결방식
http://silverktk.tistory.com/10
11. Georges Seurat's The Circus (oil on canvas, 73x59-1/8 inches) is housed at the Musée d'Orsay, Paris.
http://entertainment.howstuffworks.com/paintings-by-georges-seurat5.htm
12. <I, Robot>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8420
13. SOA(Service Oriented Architecture)가 무엇인가요?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4&dir_id=41401&eid=KPnnrsUhp5IA66lE0xTN/xqrcUlqMRH1&qb=c29h&enc=utf8&pid=fkew7doi5UhssuLxOQ8sss--006118&sid=SbRwLHpOtEkAACOgZgU
14. Church-Turing Thesis
http://www.aistudy.com/computer/church_turing_thesis.htm
15. 계산 가능성 이론
http://ko.wikipedia.org/wiki/%EA%B3%84%EC%82%B0_%EA%B0%80%EB%8A%A5%EC%84%B1_%EC%9D%B4%EB%A1%A0
16. 한자경, <成唯識論에서의 識과 境의 관계 연구>
http://sunya.tistory.com/attachment/fk150000000001.pdf
17. 라이프니츠, <인간 오성 신론>, 한자경의 <명상의 철학적 기초>을 참고하여 정리
http://books.google.co.kr/books?id=9fnaWKdWZXIC&pg=RA2-PA209&lpg=RA2-PA209&dq=%22%ED%95%9C%EC%9E%90%EA%B2%BD+%EB%AF%B8%EC%84%B8%EC%A7%80%EA%B0%81%22&source=bl&ots=R9A5Z4IZKs&sig=l8bYBVzD94ZqRdznTaXUNXi0XE0&hl=ko&ei=j5O0SfqWDInYsAO-zsWSAQ&sa=X&oi=book_result&resnum=4&ct=result#PRA1-PA85,M1
18. 최종덕(상지대, 자연철학), <가상세계와 다세계의 정보 창출성>
http://www.sutra.re.kr/chjeon/seminar/2000/0014.htm

2009/03/09 20:00 2009/03/09 20:00
From. 송현정 2009/03/28 12:40Delete / ModifyReply
스크랩해갑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From. 김경미 2010/12/05 02:15Delete / ModifyReply
우와.. 님 대단하세요~ ㅎㅎ 박사과정이신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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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부터 몇권을 책을 읽고 있다. 맨 먼저 읽기 시작한 책은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이다. 기원전부터 18세기까지 유라시아대륙에서 흥망성쇠한 유목민들이 세운 국가에 대한 역사 책이다. 이 책은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유목민 이야기>에서 잠깐 말한 것 처럼 이진경 교수의 <노마디즘>을 읽으면서 한번 읽겠다고 생각했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10점
르네 그루쎄/사계절출판사

상고시대에서 13세기까지 스키타이와 훈족에서 시작하여 돌궐, 위구르, 거란, 투르크와 이슬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돌궐, 거란과 여진은 우리 역사에도 가끔 등장하고, 최근 사극 <대조영>에서 발해가 건국될 당시 중요한 세력으로 나왔었다.

중반부는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에 대한 이야기 이고, 마지막은 티무르, 킵착 칸국(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칭기스칸 후예 몽골인들), 샤바니조, 차가다이인, 그리고 몽골리아의 마지막 제국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찾아보기>까지 800여 페이지가 넘는 두터운 책인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중반 이후 계속 되는 몽골인들의 이야기가 생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잘 알아 식상한 것도 아니기 때문인 듯하다. '적당한 관심, 사전 지식, 새롭운 사실들, 드라마틱한 제국의 흥망성쇠' 등이 긴 여정을 길지않게 만든듯 하다.

유목민, 유목민의 군대, 유목민의 전투기술

유목민의 군대는 기원전 750년경의 스키타이 시대부터 칭기스칸 그리고, 그의 후예들이 최후를 맞은 18세기까지 말과 활로 이루어진 '기마궁사'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많은 경우 '도시 없이' 소위 '움직이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을 지니고, 계절적 이동에 따른 마차 위에 여인들과 재산들을 실고 다녔다.[footnote]<유라시아 유목제국사>, p.44[/footnote]

이들의 전술 또한 기원전 7세기에서 12세기 칭기스칸까지도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데 앞에서 후퇴하면서 적들을 약올려 들판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게 만든 후 적들을 초원에서 몰이사냥을 하듯이 격파하는 것이다.[footnote]같은 책, p.47[/footnote]

유목민들은 전투에서 적을 급습할 때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른다. 만약 적이 저항하면 흩어졌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돌아오면서 도중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뒤엎어버린다. 그들은 요새나 진지를 어떻게 함락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놀랄 만큰 먼 거리에서 쇠같이 단단하고 날카로운 뼈로 촉을 만든 화살을 쏘는 기술에서 그들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footnote]같은 책, p.132를 볼 것[/footnote]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이야기했던 톤유쿡[footnote]<유목민 이야기>의 톤유쿠크와 동일인물이다. 또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pp.178-180을 보면 <유목민 이야기>에 나오는 비문에 씌여있는 톤유쿡의 말의 배경을 알수 있다. 톤유쿡의 주군인 빌게 카간이 투르크인들을 획정된 지역에 정착시키고 오르콘 지역에 중국식의 성곽도시를 건설하고 불교 사원과 도관을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다.[/footnote]은 투르크의 장점을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또 상황이 나쁘면 피해서 도망칠 수 있는 유목민으로서의 기동성에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돌궐은 그 수가 중국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들은 물과 풀을 찾아 떠돌고 사냥을 한다. 그들은 정해진 주거가 없고 늘 전투하는 연습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다고 느끼면 나타나고, 약하다고 생각하면 물러나 숨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보다 수가 많은 중국의 이점을 상쇄하고 그것을 쓸모없게 만들 수 있다. 만약 당신[빌게 카간]이 돌궐을 성곽이 있는 도시에 살게 하고 중국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를 당한다면, 설사 그것이 단 한 번일지라도 당신은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부처와 노자는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니 그런 가르침은 전사에게 맞지 않는다."[footnote]같은 책, p.180[/footnote]
이런 유목민과 한민족과의 친연성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고구려의 주몽 설화, 말타는 고분벽화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기마궁사의 모습과 순장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순장은 스키타이인, 투르크-몽골인, 그리고 삼국시대의 한반도에서도 찾아  수 있다. 이런 관습은 이미 서아시아나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진 장례의식이다.[footnote]같은 책, p.45[/footnote]

고구려 쌍영총 기마무인도
 ▲ 고구려 쌍영총에서 발견된 기마무인도의 모습[footnote]그림출처: 아쉽다, <왕 의남자>의 옥에 티, 오마이뉴스, 2006.2.18[/footnote]

'야만인들'인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되면서 새로운 중세가 시작되는 것처럼 이 책을 읽다보면 유라시아 초원에서의 작은 폭풍이 전체 세계 역사에 얼마나 거대한 충격을 주고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지를 볼 수 있다. "초원의 한쪽 끝에서 발생한 작은 자극으로 인해 민족이동이 가능한 이 엄청나게 광대한 지역의 구석구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이 초래"된다.[footnote]같은 책, p.81[/footnote]

야만과 문명, 그리고 국가라는 문제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빠져든 화두는 '야만'과 '문명' 그리고, 국가라는 문제이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의 경우 씨족사회를 기반으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면서 몽골 일족들은 '문명화 과정'을 거쳐 초원이 강요했던 강인한 생명력(유목민의 전투력)을 잃어버리고 문명의 수호자가 된다. 또 달리 보면 국가 자체가 문명을 요구하거나, 문명이 국가를 요구한다고 할 수도 있다.

먼저 이들의 '야만성'은 어느 정도였을까? 또 어떻게 하여 문명의 수호자가 되었을까? "그[석륵]은 유목민적인 성향도 못지않게 강했고, 특히 그의 흉노인 후예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석륵의 계승자인 석호(334-349)는 자기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던 아들을 사형에 처할 정도로 방탕한 짐승이었다. 그 아들은 완전히 괴물로서 자신의 가장 예쁜 첩을 불에 구워서 탁자에 내오게 할 정도로 변태적인 타타르 냉혈한이었다. 석호는 가장 열렬한 불교의 보호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문명의 마력에 처음 접하면서 빠져버리는 야만인 사이에 흔히 나타날수 있는 이상현상이다."[footnote]같은 책, p.111, 문화적 보호에 대해서는 p.112도 볼 것[/footnote]

탁발도의 경우 "새로운 통치자의 어머니가 과부로서 가질 수 있는 야망, 탐욕, 또는 질투가 빚어낼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황제 즉위 이전에 그녀를 죽이는 야만적인, 그러나 사려 깊은 투르크-몽골의 관습을 그대로 보존하였다"고 한다.[footnote]같은 책, p.118을 볼 것[/footnote]

아틸라 더 훈 (406년~453년)
3-5세기 훈족에 대한 서구(아마 로마시대) 역사서의 묘사를 보면 이렇다. 아이의 뺨에 수염이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깊은 상처를 냈다. 음식을 요리하거나 얌념을 치지 않고, 안장 밑에 놓아두어 부드럽게 된 들풀의 뿌리와 고기를 먹었다.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이나 고정된 거처가 없다. 늘 유목생활을 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추위, 배고픔, 갈증으로부터 단련되었다. 모임도, 장사도, 마시거나 먹는 일 심지어는 말을 탄 채 자기도 했다. 이런 생활과 함께 괴물같은 인상과 염소가죽으로 '대충' 만든 복장을 한 모습을 본 서구(로마와 게르만 세계)는 공포에 떨었다.[footnote]같은 책, pp.131-132를 볼 것. 블로그 훈족 이야기를 참고 할 것[/footnote]

581년 중국의 사가들이 돌궐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혈기가 왕성할 때 우대를 받는다. 염치와 예의를 모르고, 이런 점에서 옛 흉노와 비슷하다. 여기서의 흉노는 서양에서 말하는 훈이라는 학설이 존재한다. 또 사람이 죽으면 자손이나 친척들이 양이나 말을 잡아 그의 천막 앞에 그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놓아둔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애도하는 울음을 내면서 그 천막 주위를 일곱 바퀴 돈 다음에 그 천막 앞에 와서는 얼굴을 칼로 그어서 피가 눈물과 함께 흐르게 한다. 장례를 치르는 날 그와 가까웠던 친족이나 그와 가까왔던 다른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고 말을 달리며, 죽었던 날과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을 칼로 긋는다. 장례 이후에 고인이 생전에 죽인 사람의 숫자만큼의 돌을 그의 무덤 주위에 둔다. 아버지나 백부나 숙부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나 어린 동생 혹은 조카가 미망인과 그녀의 자매와 결혼한다. 그들은 악령과 정령을 숭배하고 무당을 믿는다. 전투에서 죽는 것이 그들에게는 영광이고, 병에 걸려 죽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footnote]같은 책, p.148을 볼 것. 우리 표현에 '피눈물을 흘렸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이 먼 과거의 습속이 우리 말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우리나라에 있는 무당은 유라시아 유목민들에게서 흔하게 발견된다.[/footnote]

이 정도면 야만이라는 표현이 가리키고 있는 유목민의 생활상을 어느 만큼 알 수 있다.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문명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문명화과정>을 볼 것)

문명의 마력이란 물리적 힘을 사용하지 않고도 권위를 부여하고 충성을 하도록 만들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주는 기술들인듯 하다. 종교가 지배자를 신이나 하늘의 대리인으로 만들고, 문명국의 궁정은 '움직이는 도시'에서 보여줄 수 없는 거대한 즐거움을 야만적 지배자들에게 선사한다. 많은 의례적인 절차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같은 친족/씨족 내에서도 왕과 왕이 아닌 자에 대한 차별성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의례들을 통해 친족 살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문명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예를들면 과부인 어머니가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만듬으로써.

하지만 문명화의 결과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목적 생활에서 나온 전투력의 약화에 의한 문명으로부터 패퇴 또는 너무 문명화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는 형태로 나온다. "그들[타브가치(탁발)[footnote]탁발은 5세기 북중국을 지배한 유목민족이다.[/footnote]]은 북중국의 다른 투르크-몽골계 국가들을 통일한 뒤 너무 한화(漢化)되어 부족이나 왕조 모두 중국인 대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더욱이 불교를 위한 그들의 열의는 기독교에 대한 카롤링거와 메로빙거의 열정의 재판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크 자신이 게르만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대항에 로마 전통의 보호자가 되려고 했던 것처럼, 탁발도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초원 깊숙한 곳에서 미개인으로 남아 있었던 몽골계 부족들을 상대로 황하에서 '라인 강의 파수꾼'이 되었다."[footnote]같은 책, pp.113-114[/footnote]

유목제국들은 야만과 문명이 만나는 초기에는 아주 강한 힘을 갖게 된다. 탁발의 경우를 통해 보면 반쯤은 한화된 투르크-몽골계 부족인 탁발은 '중국에 대해서 모든 고유한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면서도 여전히 북방의 야만적인 부족들에 비해 우월감을 갖게 해주는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429년 타브가치의 왕 탁발도[북위의 태무제]가 몽골의 유연을 상대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중국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다. 풋내나는 망아지와 송아지들이 호랑이와 늑대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유연 그들은 여름에 북쪽에서 방목하고, 가을이 되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겨울에 우리의 변경을 약탈한다. 우리는 단지 여름에 방목장에 있는 그들을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 그때 그곳의 말은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숫말들은 암말과 교미에 정신이 없고 어미말은 망아지와 지내기 바쁘다. 만약 우리가 그곳으로 가서 그들의 목초지와 물을 없애버리기만 한다면 며칠 이내로 그들을 잡든지 아니면 붕괴시켜버릴 것이다." 정확한 판단이다. 유목민의 조직은 여름이 되면 모두 흩어져(전투조직이 와해되어) 있다 겨울에 약탈을 위해 뭉치는 '국가'가 아닌 전투 연맹체 정도이다.

탁발도가 말한 이와 같은 이중의 우위는 이후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원의 황제)가 남송과 카이두 몽골부족을, 그리고 초기의 만주족(청)이 최후의 중국인 반란과 마지막 몽골의 호전성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이중의 이점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탁발, 쿠빌라이조, 만주도 완전히 한화되는 때는 반드시 찾아왔다. 그러면 그들은 북방의 부족들에게 패배하였고, 중국에서 쫓겨나거나 아니면 그 속에 흡수되어버렸다. 이것이 (야만과 문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중국과 몽골 역사의 기본적인 리듬이다.[footnote]같은 책, p.117, 비슷한 이야기는 pp.120-121에서도 볼 수 있다.
http://ko.wikipedia.org 에서 북위(북조)를 검색하면 다음 내용을 볼 수 있다. "도무제중국 전통의 국가체제를 채용하여 탁발부 밑에 있던 여러 부족을 해산시키고, 족장이하 부족민은 모두 중국의 호적에 편입시켜 한족과 혼합시켰다. 더불어 한족 출신의 명족(名族) 인재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나라를 공격해 하남을 빼앗고, 이어 태무제(太武帝)는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차례로 멸망시켜,439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서역에서 조공을 바쳐오는 나라만 해도 20여개국에 이르니 북위의 국세는 크게 울려퍼졌다.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태무제[탁발도]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또한 남조 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과 강북을 빼앗았고, 이때 도사 구겸지가 도교 교단을 확립하고, 한인 관료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삼무일종의 폐불 첫번째) 이 시기에 선비족의 한인 동화와 도시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footnote]

용문석굴
탁발의 경우 황제였던 탁발홍은 471년 승려가 되기 위해 어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고, 그의 아들인 탁발굉(효문제, 471-499)은 용문 석굴을 만들게한 장본인이다. 탁발은 중국의 문화와 불교의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투르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인하고 늠름한 기상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게 된다. 한번 보살의 자비로운 손길에 스친 사나운 전사들은 승려의 인문주의적인 가르침에 너무나 감화되어 원초적인 호전성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방어마저 게을리하게 된다.[footnote]같은 책, pp.119-121[/footnote]

8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위구르 쿠르크 제국의 경우 "피냄새로 진동하는 야만인들의 습속이 유행하던 나라가 채소를 먹는 사람들의 땅으로 바뀌었다. 살인이 자행되는 나라가 선이 권장되는 나라로 바뀌었다"고 쓰고 있는데 마니교와 기독교의 영향이다.[footnote]같은 책, p.195[/footnote] 이런 내용은 모든 유목민족의 역사에서 나오는 듯하다. 더 이상 이런 사례를 열거하지 않겠다.

유목민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넘어오는 사이에 국가가 존재한다. 정주민의 땅을 차지한 유목민은 그들을 통치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고, 그 국가에 그들이 '포획'되면서, 즉 야만성을 잃고 문명화되면서 다시 그 '국가-정주민의 땅'을 잃거나 '민족/부족' 자체가 정주민에게 동화되어버린다.

문명화 과정을 거친 유목민의 운명, 그리고 그람시적 진지와 기동

'중국화=문명화' 과정을 거친 유목민의 운명은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유목부족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중국의 한족처럼 변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한족이 유목민에 비교하여 절대적 다수라는 단순한 사실에 기인한다.

둘째, 문명화 과정은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니 그런 가르침'이어서 유목민의 호전성을 사그라들게 만들어 전투력을 잃었을 때 수적으로 소수인 그들을 다시 초원으로 몰아내버리거나, 다른 초원의 호전적 유목민의 사냥감이 되도록 만든다. 문명세계의 발명품인 국가는 유목민에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면서도 다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은 목적은 국가의 형성, 체제의 변환 또는 이행, 진지와 기동이라는 그람시적 은유 등에 대해 해석을 위한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용에 빗대 그람시의 이야기를 해석해 보자.

첫번째의 경우는 가지고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말했던 그람시의 진지전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다. 만일 '노동자가 절대적 다수'라면 그람시의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노동계급의 존재론적 위치와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이라는 문제 등과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존재론적 당위가 아닌, 사실을 보면 부르조아 사회에서 부르조아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임금노동자라고 해도 노동계급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 생각을 한다해도 존재론적 당위가 전제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닌가?
결국 '문명화'된 사회에서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계급은 다수가 아닌 정치적 소수인 것이다.

두번째 경우를 가지고는 반대로 어렵지만 하나의 가능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계급적 헤게모니를 구성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야만성을 '문명화'할 수 있는 조직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그람시의 진지는 문명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과 이것의 현실화쪽으로 '접합'시켜나가기 위한 장(場)을 만든다. 이속에서 '폭력에 대한 독점'으로 정의되는 '계급적' 국가를 '문명화' 시킬 수 있을까? 이 과정은 앞에서 살펴 본 수적(數的) 소수에서 다수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의 경제적, 존재론적 위치가 아닌 '어떤 다른' 심급에서.

이런 관점에서 그람시는 마키아벨리적 군주에 빗대 현대적 군주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하며,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많은 유목민의 군주들이 자신들의 민족을 문명화시키려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에 대한 어렴풋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진지(성곽) 내에서 벌어지는 과정은 이데올로기적(문화적) 과정이다. 톤유쿡의 지적처럼 '전사에게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는 부처와 노자와 같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곳이다. 불교 사원과 도관이 있다. 도망가 숨을 곳이 없을 때, 즉 기동전이 불가능할 때 진지전이 필요하다면 이것의 전제조건은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다. 전체주의에서는 국가 안에서 전체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시민권을 쫓아내 버린다.

전체주의의 기원 1 - 10점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한길사

이런 생각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와 함께 읽은 책들의 내용이 결합되어 나왔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를 읽고 있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의) 동화의 강력한 방해 요인은 이른바 주도 민족들이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러시아나 유대계 주민들은 폴란드의 문화가 자신의 문화보다 더 우수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폴란드인이 전 주민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사실에도 특별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footnote]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p.498 (한길사)[/footnote]
이글을 반대로 읽으면 수적, 문화적 우월성이 동화의 핵심 동력이다. 이런 아렌트의 지적이 맞다면 문명에 쉽게 젖어드는 유목민의 경우 정주문명의 우월성을 느끼고, 정주민들이 수적으로 월등히 많다면 어쩔 수 없는 필연인 것이다.

함께 읽은 책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으면서 문명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을 함께 읽기 시작하였다. 문명의 시작은 어쩌면 '차이; 피지배계급보다 자신들이 났다는 우위의 표현체계'일 수도 있다. 훈족을 보면서 놀랐던 중세 초의 유럽인들처럼 현재의 우리도 중세의 유럽인을 보면 '야만인'이라고 놀랄 것 같다. <문명화과정>에서는 궁정사회의 예절 등이 어떻게하여 일반화되어 '민족의식'이 되고, 다시 근대적 국가(nation, 민족국가)가 성립되는지를 추적한다. 현재 <전체주의의 기원>과 같이 읽고 있다.

문명화과정 1 - 10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한길사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Who Sings the Nation-state?>도 함께 읽었다.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유란 무엇인가 되묻고, 스피박은 국가적 추상구조라는 개념을 통해 재분배와 사회복지기능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무거운 주제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 10점
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주해연 옮김/산책자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기 시작한 것도 버틀러가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학교에 대닐 때 아렌트를 아주 멀리서 '소비에트'를 공격하는 우파 지식인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또 이런 선입관 때문에 손이 가지 않았었다. 내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알뛰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가 '인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아렌트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

인권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보통 학교에서 '천부인권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설(說)이 단순한 주의, 주장에서 사회적인 힘을 가지고 정치적 사실이 되는 과정, 신화가 현실이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렇게 만들어진 현실이 사실은 '신화적 현실'이었음을, 인간에게 사실상 인권이 없었음을 주장하는 듯하다. 신화가 현실이 되는 과정은 이데올로기가 사실/진리가 되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또 문명과 차별성(차이)의 문제로 <유한계급론 - 문화, 소비, 진화의 경제학>을 사들었다. 베블린의 책을 해설해 놓은 것이다. 베블린의 책은 대학시절 일별했었는데, 마르크스 이외에는 이단시 되었던 풍토에서 공부한 관계로 선배한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기억뿐이다.
이번에 1997년 3월 3일 을지서적에서 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을 함께 읽어야겠다. 10여년전 책 뒤에 써 놓은 글이 있다. 1996년 말 제대를 하면서 바로 취직을 한 후 6개월이 체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방황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인데, 지금도 ... 
"나에게 투쟁정신이 필요하다. 나는 절망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구별짓기>도 사람간/계급간의 차별화 전략에 대한 분석이다.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에 대한 분석인 <유한계급>에서 시작된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문명화과정> 역시 비슷한 내용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구별짓기 -상 - 10점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새물결

이론적 정확도를 떠나 느낌이지만 문명을 습속으로, 탈주해서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식적 좌파들이다. 하지만 문명을 떠나 정말 '밖에서' 생각할 수 있을까?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넘어설 수 있을까? 넘어선다면 어떤 개인이 넘어서는 것이 아닌 '문명' 자체가 넘어서는/넘어서고있는 것은 아닐까? 유목주의(노마디즘)은 결국 문명세계에 의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완전히 기병으로 구성된 금나라(여진족) 군대는 중국 남방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다. 그곳에는 범람하는 땅, 서로 얽히는 강들, 논과 운하가 있었고, 조밀한 인구가 언제 그들을 기습하고 포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footnote]르네 그루쎄, 같은 책, p.215[/footnote]
휴가가 끝났다.

미주 ------------------------------------------------------------------
2008/08/20 02:02 2008/08/20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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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출생. 1920년대에는 오스트리아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무렵의 사상은 논리적 원자론(原子論)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B.러셀과의 상호 영향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 그후 점차 인공언어(人工言語)에 의한 철학적 분석방법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1939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상언어(日常言語) 분석에서 철학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생존 중에 출판된 저작은 1921년에 간행된 《논리철학론(論理哲學論)》뿐이지만, 구두논의(口頭論議)로 영국의 분석 철학계(分析哲學界)에 끼친 영향이 크다. 최근에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1953) 등 많은 유고(遺稿)가 출판되었다.

SBS 지식포털 내 <일일소사> 내용

오늘의 소사 - 비트겐슈타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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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사내 포털의 <일일소사>를 보다가 오늘이 비트겐슈타인이 사망한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파란만장했던 삶도 '미디어'로 오면 푸르른 잎도 가지도 모두 잘려나가고 앙상한 몸통만 남는다. 상식적이란 말, 교과서적 지식의 실상이다.

최근 『확실성에 대하여』를 읽고 있는데 그곳을 보면 비트겐슈타인 대한 간략한 전기를 볼 수 있다. 그의 삶에 대하여 모르던 부분(아래 이야기를 포함해서)을 좀 더 알게 되었다.
 
이 책도 다른 책들처럼 여전히 '난해'하다. 다 읽는데 몇년이 걸릴까? 생각날 때 조금 읽고, 필요할 때 관련부분만 찾아 조금 읽고, 다른 책 읽다가 불현듯 생각이나 조금 읽고.. 그래서 항상 새롭다.

그런데 『확실성에 대하여』는 그가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쓴 글이다. 암으로 정신이 '왔다 갔다'하는 상황에서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고의 엄밀성을 유지하고 있다.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떠나 이미 이 책의 존재 자체가 경이롭지 않은가!

확실성에 관하여 - 10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책세상

연꽃 - 내용 나눔 그림막대

미디어2.0 - 비트겐슈타인
『사회사상의 대항해, 지식인들의 망명 1930~1965』, 개마고원, 2007 9월 29일부터 지식인들의 망명을 읽기 시작했다. 2차세계대전과 함께 유럽을 떠나 영미로 망명한 지식인들에 관련된 사회사상사이다. 비트게슈타인, 보..

블로그 내 검색 : 비트겐슈타인
2008/04/29 20:35 2008/04/2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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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도구적 이성 비판 - 이성의 상실>을 집어 들어 "실용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실용주의 정권'이 출범한 기념으로 실용주의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알기 위해서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존 듀이(John Dewey)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를 살피면서 내린 실용주의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실용주의는 우리의 이념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대가 충족되고 우리의 행동이 성공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대가 충족되고 우리의 행동이 성공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념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광범위한 실용주의적 정신의 확대는 진리의 논리학(특정 이념 자체의 절대적 타당성)을 개연성의 논리학으로 대체한다. 이명박씨가 시장 시절에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성공적으로 청계천을 복원하여으니 대통령이 되어서도 잘 할 것이라는 식의 논리말이다. 여기서 모든 대통령 후보자 중에서 통계적 개연성/가능성을 많이 보여준 사람이 누구냐는 판단으로 넘어간다.

도구적 이성 비판 - 10점
M.호르크하이머 지음, 박구용 옮김/문예출판사

실용주의는 모든 이념들의 의미(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활성화, 소득격차의 해소 등의 국가적 아젠다)를 747계획, 대운하계획과 같은 스케치나 계획의 의미로 환원시킨다. 이젠 어떤 숭고한 목적은 존재하지 않으며 수단적 가치의 효용성에 따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진리가 결정되는 시대가 왔다.

"실용주의는 회상이나 숙고를 위한 시간이 없는 사회를 반영한다."

이 말에 의지하여 살펴보면 국보위에서 활동한 분과 논문 표절 의혹이 있고, 부동산 투기 의혹이 있는 분들, 냉전적 통일관과 친미적인 활동을 한 분들이 정권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다. 실용주의를 앞세우는 정권에 표를 던진 것은 적어도 우리들 중 다수이니 말이다.

다만 스스로 실용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표를 던졌다면 모르지만, 이런 '회상이나 숙고를 위한 시간이 없는', 따라서 반성이 없는 사회가 될 것이이라는 것을 모르고 표를 던졌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반성하고 최근 누군가 했던 말처럼 "일말의 책임"을 느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전사회적으로 우리의 희망을 확정하는데에 '시장 조사와 갤럽의 설문 조사'가 철학이나 이념보다 우선시 될 때 이미 우리 미래의 다양성(질적인 성장 가능성)은 상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선거 때마다 당의 강령과 목표에 따라 후보가 뽑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갤럽 설문 조사와 모바일 투표를 할 때, 또 흥행의 성공 운운하는 그것의 당리 당략적 효용성에 열광하고 있을 때, 그 때부터 소리 소문없이 실용주의란 값 싼 선택지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정당정치를 통한 다양성의 확보와 절차(rule)를 통한 서로 다른 이익집단/계급간의 타협이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는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없는 포퓰리즘에 공공선에 대한 부정, 소유권의 절대화, 국가의 개입금지 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 때문에 최장집교수가 "사회적 갈등 균열에 대응하는 정당체제" 구축을 통한 민주주의의 심화를 주장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것이 지난 10년, 아니면 1980년 이후의 이념의 과잉이 초래한 결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린 실용주의란 선택지 이외의 선택을 할 수 없는 절름발이 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세계가 과거에 지쳐 있으니,
오, 세계가 죽음을 맞이하거나, 최후의 휴식을 가질 수도 있겠다.

이념이 죽은 시대라는 말은 벌써 몇 십년전에 들었다. 흑묘 백묘 상관없이 쥐를 잘 잡아야 하는데 귀납법의 약점은 항상 사후적 판단에 의존한다는, 즉 흑묘가 잘 잡는지 백묘가 잘 잡는지, 아니면 둘 다 그런지 지금 당장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쥐를 잘 잡는 실용주의 고양이인지, 아니면 쥐보다 국민을 잘 잡는 정치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있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고통보다 더 무섭다 (苛政猛於虎 가정맹어호)"고 했다.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되어 모두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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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3.29 http://www.aladdin.co.kr 메인

알라딘 TTB 리뷰 선정

     ▲ 한 주동안 작성된 TTB리뷰 가운데 좋은 리뷰로 선정(2008년 3월 3주)


관련글 : 이성적인 사회를 향하여
저자 :허버마스, 출판사: 종로서적

허버마스( Jurgen Habermas )는 베버의 합리성의 개념을 근거로 하여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비판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 즉 그는 서양에 있어서 근대성 또는 현대성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이며, 오늘날 심각한 난점을 드러내고 있는 근대성의 테제를 어떻게 극복 발전시킬수 있겠는가 하는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허버마스의 근대성과 합리성의 주제를 서양의 지성사적인 맥락에서 생각을 하여 보면 그의 관심을 가까이에서 살펴 볼수 있다. ...

... 전문지식과 정치의 관계에 대하여 세가지 모델을 설명하였다. 또한 실용주의 모델만이 민주주의에 관계된다고 허버마스는 주장한다. 이는 정책 결정에 있어 전문가와 지도자 사이에 책임과 권력의 분립이 행해 진다면, 일반 시민은 여론을 통하여 정당화하는 역활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산업 사회의 기술 관료적인 통제는 어떠한 민주적인 정책 결정의 과정이라도 목적이 없는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2008/03/02 14:39 2008/03/0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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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바슐라르에 관련된 다른 책들을 집어들어 읽다가 상상력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살펴 볼 필요성이 있구나 생각되었다. 단순 문학비평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슐라르 다음 세대의 철학자들에 문학비평이 아닌, 다른 형태로 심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바슐라르의 상상력 연구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 분석을 통해서도 쉽게 제거되지 않는 인식론적 방해물들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객관적 앎/지식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바로 상상력이다. 그런데 바슐라르에 의하면 상상력은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을 갖고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보편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원형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는데, 상상력이 이 원형을 향해가는 정신의 자체적인 힘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원형과 외계의 사물 사이에 놓인 상상력은 끊임없이 사물을 원형에 가깝게 변형시키려는 관성을 갖게 된다.

바슐라르 이전의 상상력은 이미지를 기억하는 정신 기능이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은 대상의 형태가 아니라 그것의 물질성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물은 일정한 형태가 없지만 물의 이미지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슐라르는 물, 불, 공기, 대지의  물질성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이 유형화된다는 사원소론을 정초한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미지를 기억할 뿐 아니라 변형하고 극단적으로는 이미지를 지워버림으로써 <이미지 없는 상상력>의 단계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

물 위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취한 나르시스의 신화는 상상력의 작용을 잘 보여준다. 거울에 뚜렷하게 비친 얼굴보다 물 위에 흐릿하게 비친 얼굴이 더 아름답다. 또 물 위에 핀 연꽃을 찍은 사진보다 그것을 그린 모네의 회화가 더 아름답다. 이러한 이유는 물위의 영상이나 회회의 영상은 흐릿하지만 그것 들여다보는 인간의 상상력은 수면의 파동을 따라, 또 그림을 따라 끊어진 부분을 이어가면서 하나의 영상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르시스의 경우 물 위의 영상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모네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상상력의 밑바닥에 대상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이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을 심리적, 사회적 요인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자체에 존재론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상상력은 과학에 있어서는 인식론적 장애물이지만 문학/예술에 있어서는 미적 체험과 존재의 전환을 경험할 수도 있도록 한다.

이러한 상상력에 대한 인식이 프랑스 철학적 사유에 강한 영향을 준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인식론적 장애물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바슐라르의 철학체계와 영향

한참 고심하여 바슐라르의 체계를 도식화한 것이다. 상상력은 각 개인들마다 서로 다른 주관적인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보편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원형으로 객관적인 것이다. 개개인들이 아닌 인류 전체에게 있는 상상력의 존재는 바슐라르 이후의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세계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된다.

위 도식은 너무 도식적이므로 참고용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도식을 그리면서 몇가지 자신없는 부분도 있다. 사유 다음에 문학적 산출물을 놓을 수 있는가, 또 상상력을 아비투스와 비슷한 것으로 유추해서 이해할 수 있는가 등이다. 그림을 그린 것은 상상력의 위치와 이것과 알뛰세르, 푸코 등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니 그 정도의 수준에서만 의미를 찾고자 한다.


추가적으로 이런 책을 더 찾아 관련된 부분을 같이 읽었다.
새로운 철학강의 제1부 - 논리학 및 인식론 - 8점
D.위스망, 앙드레 베르제즈 지음/인간사랑
제6장 물질의 과학 - 이론과 경험
이장에서 바슐라르 이야기를 많이 다루는 것은 아니다. 아주 조금 다루는데 하지만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을 이해하는데는 많은 도움을 준다.

오늘의 프랑스 철학사상, 1991
오늘의 프랑스 철학사상(1960~1985)
크리스티앙 데캉 지음/책세상
제9장 인식론과 그 모델들

첫번째 책의 해당 장에서는 전반적인 인식론적 사유에 대해 알 수 있고, 두번째 책은 프랑스 철학 안에서 현대의 인식론적 논의를 다루고 있다. 두번째 책은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 첫번째 책은 다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철학 입문서로도 괜찮은 듯 싶다.


연꽃 - 내용 나눔 그림막대

오류 위에 과학의 도시를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 - 바슐라르, 알뛰세르
요즘 <프랑스 비평사 - 현대편 (1983)>을 읽고 있다. 대학을 다닐 때 '오해도 하나의 이해'라는 말을 듣고 그럴 수 있다 생각하며 지금도 가끔씩 이 말을 되뇌이곤 한다..
2008/02/03 23:18 2008/02/03 23:18
From. 비밀방문자 2013/07/02 17:53Delete / Modify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jjpark 2012/09/10 13:22Delete / Modify
맞습니다. 그때 인용은 안한 것 같은데 "상상력과 공감, 그리고 스토리"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옵니다. 그리고 아렌트 책에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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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de Gaston Bachelard

요즘 <프랑스 비평사 - 현대편 (1983)>을 읽고 있다. 대학을 다닐 때 '오해도 하나의 이해'라는 말을 듣고 그럴 수 있다 생각하며 지금도 가끔씩 이 말을 되뇌이곤 한다. 그런데 이 말의 시작을 이 책에서 찾은 듯하다.

프랑스 비평사 (근대/현대편) - 8점
김현 지음/문학과지성사

이 책의 서문에서 김현은 이렇게 말한다. "바슐라르의 스승이었던 아벨 레이는 사람은 오류를 통해 성장한다고 말했다. 그 오류를 완전히 고칠 수는 없겠지만, 그 오류를 객관적으로 정신분석해 나가면, 그 오류를 가능케 한 내 욕망의 뿌리를 얼핏 엿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욕망을 객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내가 성숙할 수 있을까?"

많은 경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않는다. 관심 갖는 부분만을 읽고, 또 다른 책에서 관련된 부분을 책아 읽고 그러다보면 네다섯권의 책이 며칠간 옆에서 뒹군다. 이런 버릇대로 제3장 <바슐라르의 문학비평>만 읽었다.

바슐라르는 과학철학자로 시작해서 문학이론가로 사고를 전개해 나갔다. 과학철학자로서의 바슐라르의 이야기는 알뛰세르로 이어진다. 막연하게 그렇겠지 생각하긴 했다. 오래된 책을 꺼내들고 그때 몰랐던 사실을 확인한다. 예전 이 책을 읽을 땐 알뛰세르도 푸코도 보기 전일게다. 아마 그 땐 책의 내용도 이해를 못하고 스스로의 방식으로, '오해'라는 방식으로 이해했을 게다.

그렇다고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 바슐라르를 바슐라르 그 자체로 다시 읽으며 이해했을까? 이번엔 알뛰세르식으로 아니면 푸코식으로. 아니다.  실제는 현재의 내 수준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이해의 강도를 말 그대로 '털 끝만큼도 틀리지않고 똑같이'라는 기준, 즉 '사고의 동일성'이라는 기준으로 적용한다면 아마도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완벽한 이해란 스스로가 이해할 대상 자체가 '되어야' 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면 자각만이 이해했다고 말할 권리를 갖게된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인식의 근거를 찾았다. 또 칸트는 이런 맥락에서 선험적 인식주체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따분한 이야기 전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부딪히는 것이 '왜 저 사람은 저래!', '이해를 못하겠네!' 등의 생각과 함께 의사가 통하지않는 사실에 좌절하곤 한다. 대화의 어려움이 여기서 생긴다.

초기 바슐라르는 '객관적 인식으로서의 과학적 인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과학적 인식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여 갖게 되는 감각적 인식 혹은 공통적 인식 사이에는 커다란 단절,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고 말한다. 알뛰세르에게서도 중요한 개념인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바슐라르는 객관적 인식은 가능한가, 만일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객관적 인식이라고 알려져 온 수많은 잘못된 인식들이란 무슨 의미를 갖는가라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답하려 한다.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의 책과 생각에 나온 <시선은 권력이다>에 대한 소개 기사를 읽었다. "나와 타자 사이의 동시적 상호인정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사르트르의 생각이 더 옳아 보인다. 남이 자기를 보듯이 나를 보고, 또 나도 나를 보듯이 남을 본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게 그 이유다." 박정자 교수의 말이다. 어제 밤에 썼던 완벽한 이해란 불가능하다는 대목과 이어졌다. 이렇듯 생각은 사나운 가시덩쿨처럼 여기 저기로 가서 붙어 얽혀버린다.

그런데 이런 상호 이해 불가능성, 오해로 점철된 인간 인식의 객관성을 주장하고 그 기반을 세우려는 노력이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이다. 바슐라르의 몇개의 명제를 살펴보자.

  1.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즉 사실에 있어서는 과학적 지식이 객관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객관성은 그때 하나의 한계로 제시된다. 객관적인 것은 경험의 합리적 한계이다.(p.88)
  2. 사실-하나의 대상에 대한 원초적인 경험은 과학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실/경험은 계속적인 합리화에 의해서 객관적인 것을 가능케 한다. 즉, 끊임없는 합리화에 의해 원초적인 경험은 과학적인 경험이 되어 간다.
  3. 따라서 과학적 인식은 끊임없는 합리화 움직임 속에 있는 인식이며, 계속 검증되는 인식이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합리화/객관화 방법은 대상을 관계 밑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대상이란, 지각할 수 있는 사실의 그룹이다. 그것은 정돈할 수 있는 일련의 지각이며, 더 나아가서는 정돈 그 자체이다.> 정돈은 하나의 관계 개념이다. 왜냐하면 관계를 짓지 않는 것은 정돈될 수 없기 때문이다.
  4. 그런데 현대과학을 돌아볼 때 객관화의 방법은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여러개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방법이 대상보다 선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법이 대상 기술/과학적 인식을 결정한다. 방법 자체가 대상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앞의 명제들에 따라 이런 추론을 끌어낼 수 있다.
  1.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보편성/일반성이 반드시 객관성은 아니다. 보편적/일반적인 것은 경험의 동질성(同質性)을 전제로 하고 있지, 어떤 경험의 검증과정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객관화의 방법이 없는 한 객관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 관계에 의거한 객관성은 그것에 따라 관계를 결정하는 유동성과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상 대상이 관계의 복합체로 제시될 때부터, 그것을 여러 방법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객관성은 입증의 사회적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객관성에는 변증론적이며 자세한 방법으로 객관화의 방법을 제시하여야만 다다를 수 있다. 명증의 표적은 대상이 아니라 방법이다.
  3. 하나의 사고의 객관성은 그것이 오류의 교정과 관련을 맺고 있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어떤  생각의 객관성은 그것이 오류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그만큼 더 명백하고 분명하게 될 것이다. 도달하려면 방황해야 한다.>

상호 이해 불가능성, 오해/오류의 기반을 이런 테제를 받아들인다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다. 객관적이지 않은 보편성/일반성이 실재한다는 것, 보는 각도/방법에 따라 대상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경험/사실 자체가 객관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클라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의 천동설, 자본주의에 대한 애덤 스미스 이후의 주류경제학자과 마르크스의 대립, 경험주의에서 나타나는 귀납적 비약 따위가 이런 예들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방법에 따라 대상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의 측면에서 볼 때, 그리고 그것을 자연과학의 영역이 아닌 사회과학에 대입한다고 할 때 문제는 더욱 커진다. 사회는 보는 사람들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즉 당파성에 따라 보는 방법/각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더 높고 그것의 진위를 가릴 기준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바슐라르의 논의와 실재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또는 오류로 점철된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 여기에서 알뛰세르가 나온다. 객관적이지 않은 보편성/일반성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가 알뛰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한축을 이끌고, 마르크스주의가 왜 과학인가/맞는가가 다른 한축을 이룬다. 전자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이론 등이 전개된다면 후자에서 사회운동/검증 속에서 오류의 정정을 통한 '전화' 등의 이론을 전개한다. '위기를 산출케한 모체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그 내부에서 생겨난 위기를 극복'/돌파할려고 한다.

김현이 말하듯이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오류 위에 과학의 도시를 건설하려 한 것에 있다. 그가 오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금세기초의 과학적 위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p.91) 바슐라르가 처했던 상황과 동일한 상황에 알뛰세르가 있었다.

철학,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사상, 역사적 사실의 내용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위치를 확인하고 이것(시대의 위기)을 돌파하기 위해서이다.

오류 위에 과학의 도시를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 방법을 바꾸면서이다. 그런데 방법을 바꾼다는 것은 과거의 방법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학은 과거의 방법을 새로운 방법으로 감싸면서 더욱 방법적으로 되어간다. 과거의 방법을 버리지 않고 감싼다는 것은 낡고 쓸모 없게 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밝힌 과학적 지식이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오류가 밝혀지고, 오류는 부정적인 성격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가능케 한 긍정적인 성격으로 '전화'한다.

하지만 전화된 방법은 과거의 방법이 아닌, 과거의 것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인식론적 국경이 있다. 알뛰세르가 말하는 '인식론적 단절'과 같은!

캉기옘은 바슐라르가 죽은 후 파리대학 추도 논문집에서 그의 인식론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첫번째 공리는 오류의 이론적 우위에 관련되어 있다. <진실은 논쟁의 끝에서만 그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최초의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최초의 오류들만이 있다.> ... 최초의 진리는 단수이며, 최초의 오류는 복수이다. 보다 간결하게 같은 공식은 다음처럼 진술된다. 오류에 기초한 진실이야 말로 과학적 사고의 형태이다.

대학에 다닐 때 함께 공부하던 선배가 진리를 알려주겠다며 귀에 속닥였던 말이 생각난다. "맑스주의는 위대하다. 왜냐하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 땐 몰랐지만 이 말은 아마도 레닌의 말일 것다. 지금 생각하면 진리성은 이런 경구/신조로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으로부터 시작한 이런 경구들, 진리를 담보하고 있는 전위조직, 이 조직의 일괴암(一塊巖 monolith)성 등이 이데올로기(검증되지 않은 보편적 진리)로 굳어질 때 '마침내 위기'가 온다.

이런 정치조직뿐만 아니라 기업도, 개인도 살아가며 어디서도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며 오류 위에 진실의 돌을 쌓을 때 전진이 가능하다. 요즘 자기 전에 몇 페이지씩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 위대한 기업으로, GOOD TO GREAT>를 읽는다. 여기에서도 위대해지려면 바슐라르가 과학의 위기에 대응하던 것과 비슷한 태도를 갖을 것을 권유한다.

좋은 회사를 위대한 회사로 이끄는 핵심 심리는 스톡데일 패러독스이다. 결국에는 성공할 수 있고 성공할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p.140) - 짐 콜린스

과학자로서 여러분들은 과학은 파괴되지 않으며, 어떤 내적 위기도 그것의 비약을 멈추게 할 수 없으며, 그 통합력이 거기에 반대하는 것까지를 이용하는 걸 그것이 허용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과학의 기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정상으로의 성장을 이끌어냅니다. 과학을 파들어 가면 갈수록 과학은 솟아오릅니다. - 바슐라르, <과학적 방법의 철학적 문제>

바슐라르가 말하는 '과학의 기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20세기초의 과학적 위기를 말한다. 스톡데일은 베트남전에서 포로가 미군 장군의 이야기다. 알뛰세르에 의하면 위기의 시대에는 그 위기를 산출케한 모체 자체를 부인하려는 경향이 생겨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위기 자체에서도 벗어나려 한다. 기업들도 그렇고 그런 기업들은 '위대해'질 수 없다.

하지만 왕왕 위기를 인식하지만 모체 자체를 부인하면서 성공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지난번 살펴본 박형준씨의 경우가 그렇다. 이때 그것을 성공이라할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인 문제, 가치의 문제가 제기된다. 위기의 장에 있는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아니면 그는 모체를 벗어났기 때문에 동일한 장, 또는 회사에 있지 않으므로 위기를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입장에서 위기는 청산/해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위기를 바라보는 데도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따라서 세계적, 사회적, 역사적, 국가적, 조직적, 개인적 등의 수식이 붙게 된다. 박형준씨의 경우 당시 제기되었던 문제를 청산하고 다른 '세속적인' 차원에서 성공한 것이다.

왜 오류에 빠질까? 바슐라르는 주체의 정신적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 '틀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틀림은 그의 경험을 보다 더 풍부하게 해 준다. 자기는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틀린다.
 
바슐라르의 주체의 정신적 활동의 가장 기본인 오류라는 개념은 인식론적 방해물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낸다. 인식론적 방해물은 과학적 인식의 방해물, 교정되어야할 오류와 동일어이다.

인식론적 방해물이 생기는 것은 과학적 인식에서는 자명한 것,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구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자명한 것, 주어진 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과학에 있어서 객관적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에서 주어진 것은 위에서 말했던 사실, 원초적인 경험들이다.
 
그런데 <그 주어진 것이 결국 사고에 방해물이 될 때, 다시 말해 사고가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거나 오히려 경험을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그것을 만나는 곳에 그것을 위치시켜야 한다>

객관적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방해물의 제거라는 뜻에서 정신 분석이라는 용어를 들여온다. 본능의 개입을 과학적 지식에서 제거하는 것이 객관적 인식의 정신 분석의 목적이다. 그리고 바슐라르의 정신 분석이라는 용어는 교정되어야 할 일반적 인식의 '세척', 토론과 규제를 벗어나려는 심리상태의 교정, '모든 무의식적 가치 부여-문화'로부터 과학적을로 객관화된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이 글의 첫부분에서 이야기했던 오해도 하나의 이해라고 이야기했던, 그 뒤 "창조적 오해"에 대하여 생각하게 했던 부분은 정신분석에 대한 바슐라르의 이해 대한 평가이다. 바슐라르는 정신 분석에서 하나의 방법론을 찾았지, 위에서 본 그 자신의 사고의 방향을 그것 때문에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다. 또 바슐라르는 정신 분석에서도 인간은 치유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런 바슐라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그(바슐라르)는 정신 분석에 대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 오해 자체가 그에게 그의 멋진 책, 내가 찬탄한 책을 만들게 한 것이다. - 마리즈 쉬와지 (프지케, 1963년 2)

사람들 간의 오해는 불화를 만들지만 이론/사상에 대한 오해는 새로운 방법/접근법을 만들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도 한다. 그때는 더 이상 이것을 누구의 이론을 오해했다라고 부르지 못하게 된다. 오해를 통해서 그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바슐라르의 문학이론으로 알려진 4원소론에 의한 상상력 연구이다. 상상력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한다. 이 상상력이 앞에서 본 장애물이면서 문학적 세계, 미적 세계의 기반이다.

지난 목요일 회사의 전직원 모임에서 이런 '덕담'을 들었다. 5-3=2인 이유는 오해를 3번만 더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2+2=4인 이유는 이해하고 이해하면 사랑이 되니.. 노스님이이 동자승에게 문제를 내고 해석을 해준 거란다. 우리의 오해도 세번 더 생각하여 창조적 오해가 되거나, 아니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해 위에 위대한 기업을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불화만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오류를 자각하고, 그것을 가능케 한 내 욕망의 뿌리를 얼핏 엿볼 수 있다면. 언제 내 욕망을 객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내가 성숙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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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 내용 나눔 그림막대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바슐라르 상상력의 위치
어제에 이어 바슐라르에 관련된 다른 책들을 집어들어 읽다가 상상력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살펴 볼 필요성이 있구나 생각되었다. 단순 문학비평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슐라르 다음 세대의 철학자들에 문학비평이 아닌, 다른 형태로..
2008/02/01 22:46 2008/02/0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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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부터 <근대세계체제 1, 2, 3>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사놓은지는 몇년 지났는데 계속 이어 끝까지 읽은 적은 없다. 대충 필요한 부분이거나 아니면 관심이 가는 장을 찾아 읽다가 던져놓곤 하였다.

책이 97년에 출간된 것을 보니 군대를 제대하고 산 것 같은데 아마 '생일선물'로 받은 것 같다. 2만원짜리 3권을 한번에 사는 경우는 이럴 때가 아니곤 여간해선 없다. 또 읽고는 싶었어도 꼭 사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드는 것이 아니면 비싸니 '선물로 받아야지'하고 생각하고 뒤로 미뤄둔다. 며칠 전 생일에도 이런 식으로 책을 한권 받았는데, 한권 가격(59,000원, 1200페이지가 넘는다!)이 만만찮아 둘이 함께 사달라고 했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1>이다. 2권은 내년에나 손에 들어오지 않은까?

아케이드 프로젝트 1 (양장합본) - 10점
발터 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새물결

왜 <근대세계체제>를 읽기 시작했지? 방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에 책이 꽂혀 있어서였나. 책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버릇이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쓴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책이 한국어로 출판되기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에 다닐 때,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함께 잦아들고 있었다. 아마 3학년 아니면 4학년(91~92년) 때였나보다. 한참 혼자서 국가론과 사회구성체(사회형성체) 논쟁을 관련 논문들을 읽고 있었다. 그때 한국 사회성격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신식민지'는 개념이 담고있는 의미나 한국에서 전개된 논쟁, 운동의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다시 남아메리카에서 발전한 '종속적'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쪽도 그리 맞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종속적'이라는 개념은 신식민지와 같이 일본과 조선, 미국과 한국 등의 한국가와 다른 한국가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더 낮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국제적인 경제현상은 다자간의 관계이며, 어떤 층위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요즘의 BRICs처럼 당시에 NICs(아시아 신흥공업국)에 대한 논의들이 많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종속적이라는 개념을 국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주도적이지 못한 위치에 있는 일군의 국가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종속적이라는 개념이 마음에 들지않았던 것은 소위 '제국주의' 국가들도 전체/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보면 얼마나 자율적일까 하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운명도 이 체제에 '의존적'이지 않은가? 자신들의 운명이 '종속적' 상태에 있는 국가들에 달려있지 않은가? 이때 한국 자본주의에 '개량의 물적 기반'이 있는가, 없는가의 논쟁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것의 밑에는 한국 자본주의가 일본, 미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다국적 자본)처럼, 수준의 문제이긴 하지만,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것은 파시즘 체제가 아닌 민주적 체제로 이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운명도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 의존적 이라는 말은 민주적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은 새로운 시장(신민지 또는 신식민지에 있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을 통해서만 갖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처음 월러스틴의 책을 이곳 저곳의 논문에서 짜집기하듯 읽었다. 역사적으로 자본의가 태어날 때부터 한 국가가 아닌 '세계경제'를 배경으로 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신식민지, 종속적, 이런 것보다는 공간적 은유인 주변부, 또는 반주변부라는 개념이 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같다.
 
<근대세계체제>는 '1450년 당시에 유럽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등장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체제제는 두 가지 핵심적인 제도, 즉 어느 일정지역 안에 자리잡은 "세계적" 범위의 분업과 관료제적인 국가기구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경제는 세 지역, 반주변부(semiperiphery), 핵심부(core), 주변부(periphery)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나뉜다.'(p.106)고 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나는 월러스틴이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과 어떤 주의, 주장에 헌신하는 것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어떤 주의, 주장에 헌신하지 않는 사회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과학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한다.(p.25)
그리고 "진리는 변화하는데, 그것은 사회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어진 시간에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동시대적이다. 심지어 지나간 것까지도 그렇다. 그리고 현재 안에서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배경, 우리가 받은 훈련, 우리의 개성과 사회적 역할, 그리고 우리가 그 속에서 활동하는 구조화된 압력들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이다."라고 말한다.(p.26)
따라서 "객과성이란, 전체 사회체제의 한 함수이다. 사회체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특정한 종류의 연구활동이 특정 집단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한 그 연구결과는 이 특정 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향될 것이다. 객관성이란, 이러한 활동이 세계체제의 모든 주요 집단에 기반을 둔 사람에 의해서 균형 있게 수행되도록 해주는, 사회적 투자 분배의 벡터이다. 객관성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객관적인 사회과학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이 가까운 장래에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목표는 아니다."(p.27)

이렇게 월러스틴의 이야기를 쓰게된 동기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근 한겨레신문에서 제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특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특집의 내용은 위 '사회구성체 논쟁'의 21세기적 형식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한겨레-지식논쟁
한겨레신문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① 조정환, 왜 제국인가 - 제국주의는 죽었다, 21세기는 지구  제국 시대
   ② 정성진, 왜 제국주의인가 - '지구제국'은 허상이다, 제국주의 되레 격화
   ③ 이진경, 제3의 시각 '과잉제국주의' - 제국주의는 과거형, 지구제국은 미래형

조정환, 정성진, 이진경의 주장을 읽으면서 불현듯 월러스틴이 <근대세계체제>에서 쓴 글이 생각났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독특한 특징은, 경제적 결정은 주로 세계경제를 지향한 반면, 정치적 결정은 주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더 작은 구조들-세계경제 내의 국가들(민족국가, 도시국가, 제국)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제 및 정치의 이중 지향성 또는 "차별성"은 여러 집단들의 자기 정체성에 관한, 즉 집단 이해관계의 합당한 표명에 관한 혼란과 신비화의 근원이다."(p.109)
경제적인 세계화를 기본으로 사태를 판단하는 조정환과 상대적으로 정치적 국가를 중시하는 정성진은 이런 혼란과 신비화의 도정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나는 감성적으로는 여전히 정성진에 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진경의 지적처럼 유럽연합 등을 살펴볼 때, "경제 및 정치의 이중 지향성"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합류하고, 전지구적인 제국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현재 '경향적'으로 이런쪽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성적으로는 이진경을 지지한다.

(요즘은 이진경을 지지하는 판단에 회의가 든다. 경향성이란 말도 여러 가지 잠재성 중에 하나이고, 어떤 조건에서는 다른 것이 나타날 수가 있다. 또 국가라는 물질적 실재가 언제 없어질까? 정성진의 주장에 '감성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지만 감성 자체가 합리적 이성의 기초이기도 하다. 2009.3.20 update)

이진경의 '과잉'제국주의에서 과잉의 의미를 어떻게 볼까? 국가론에서 보면 함자 알라비(맞나?)가 과대성장국가이론을 말하는데, 그때의 '과잉'과 친연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91년 여름 내내 나는 과대성장국가이론을 한국에 적용하여 분석하는 작업을 했었다. 그리고 에세이 한편을 썼는데 언제가 이것도 posting을 하겠다.) 한 국가차원에서 상부구조가 과잉성장한다는 것과 여러 국가들의 연합을 통해서 제국주의가 과잉(성장)하다는 것. 그런데 전자가 그렇게 되기에 필요한 역사적 배경(식민경험이라는)이 있었던 것처럼 후자가 성립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제국주의간의 경쟁, 아니면... 이진경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장기 16세기'의 유럽과 제국 중국을 비교하면서 자본주의의 탄생을 살피는데, 제국이 자본주의 발전을 담보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과거 역사에서의 제국과 조정환의 제국은 어떻게 다른가? 경제와 정치의 분절(이중 지향성)이 경제적 착취구조를 감싸는 이데올로기적(신비화) 기제는 아닌가? 이것이 합치될 때는 계급투쟁에서 피아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고 있다.

여하튼 나는 "진리는 변화하는데, 그것은 사회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어진 시간에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동시대적이다. 심지어 지나간 것까지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월러스틴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사회체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특정한 종류의 연구활동이 특정 집단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한 그 연구결과는 이 특정 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향될 것"이며 이를 정정하기 위해서는 알뛰세르의 말처럼 막대를 반대로 구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대세계체제 1 - 10점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나종일 외 옮김/까치글방
근대세계체제 2 - 10점
중상주의와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 1600-1750년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유재건 외 옮김/까치글방
근대세계체제 3 - 10점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의 두 번째 시대 1730-1840년대
이매뉴얼
2007/09/15 10:17 2007/09/1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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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브란스병원 암병동

밤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 있었다.
세브란스병원 암병동
버스 밖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처럼
간밤 자다깨다 있어던 일들,
삐걱대는 철제 침대, 그림자 없이 다가서는 발자국 소리
속을 끄집에 내는 기침에 구토, 물내리는 소리들은
졸리운 눈처럼 기억도 하기 힘들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기억은 더 어려지고
젊은 날 결혼한 어린 아내를 찾고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곳이 어딘지를 묻는다
시간이 더 흘러 기억이 더 젊어지면
전쟁 속에 헤어진 어머니,
굶주린 배를 안고 헤메던 전장을 기억하고
배가 고파도 자꾸 배가 불러오는 오늘처럼
몸을 뒤척이던 어린 날들이 무섭게 덮칠 것이다

차창 밖 비 방울 방울마다 새겨진 세상이
검은 아스팔트 위로 부서져 흐르듯
세브란스병원 암병동 기억 없이 지샌 밤들,
숨 죽여 속으로 속으로 울던 그 불안한 나날들,
삶이 아무 소리도 못내고 죽음 속으로
이렇게 흘러들어가 버린 날들
하지만 어느 날, 내 나이보다 기억이 더 어려지는 날
사진보다 뚜렷하게 기억이 떠오르고
오늘이 된 그날엔 하늘 무너지듯
엉엉 큰 소리내어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2007.8.4>

아내가 산책을 가자고하여 급히 저장을 하다가 글을 날려 다시 썼다. 다시 쓰면 새로운 글이 되고 맛이 다르다. 지난 주부터 하루걸러 한번씩 병실에서 밤을 보낸다. 아침에 병실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밖에 비오는 거리를 찍었다. 아무 의미없는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의미가 되어 덮칠 때가 있다. 이보다는 우리가 중요한 것들을 쉽게 잊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몇년만에 다시 시를 쓴다. 시는 세상과의 갈등(부적응) 때문에 몸이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비명 소리인가 보다. 죽음을 앞두고 또 몸이, 존재가 마구 흔들린다.

"이러한 힘이 없다면 삶은 아무 소리도 못내고 죽음 속으로 흘러들어가 버렸을 것이다."<계몽의 변증법, p.181, 문예출판사> 요즘 죽어라고 이책만 읽고 있다. 서너번, 수십번을 읽겠다는 생각이다. 굳이 많은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사람들이 사서삼경을 매일 읽고, 외운 것처럼 끊임없이 읽다보면 새로운 것이 계속 들어난다. 뒷장을 보니 이책을 95년10월 23일에 샀다. 십년이 넘어섰는데 요즘에야 이해가 가는 것 같다. 또 십년이 지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사실 인용한 구절은 본문에서 보면 시의 맥락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처한 상황이 이 한 줄을 건져올리도록 한 것이다.

2007/08/04 20:51 2007/08/04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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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네 이웃을 비정규직을 사랑하라! (2008.05.21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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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2007년 7월 26일 "비정규직 법을 고치려는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이전보다 노동계에 결코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일단 비정규직법을 안착시키면서 한편으로 악용 사례를 차단할 수 있는 보완 입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랜드그룹의 비정규직 대량해고에 대해서도 "법을 악용하는 사용자의 자질이 문제"라며 '법의 문제'가 아닌 '개별 기업가의 부도덕성'에서 원인을 찾았다. (한겨레신문, 2007.7.27, 13면)

법 자체가 이런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법을 악용하는 사용자의 자질"과 "개별 기업가의 부도덕성"만을 문제삼아야 할까? 정치체가 아닌 기업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노동자들)이 법 아래서 자유롭다는 것은 개별기업가의 선의를 통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닌 법 아래서 모두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기업가의 선의를 통해야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이 법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닌 기업가에게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를 유지하려면 (기업가, 전제군주, 또는 독재자의) 임의적 자유재량권의 요소가 없는 정치 체제하에서 살아야 하며 시민권이 국가의 지배자, 지배 집단, 혹은 또 다른 권력자의 선의에 의존해야만 하는 가능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입법의 유일한 권력이 인민 혹은 그들이 신임하는 대표들에게 있는, 그리고 정치체의 모든 개별적 구성원들이-지배자와 시민 다 함께-그들이 자신에게 부과한 그 어떤 법에도 평등하게 복종하는 체제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치 정부 체제하에서 살아야만 지배자들의 강압적 임의 재량권을 박탈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시민들을 지배자의 선의에 의존하게 해 노예의 지위로 전락시킬 수 있는 그 어떤 폭군의 등장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주의, 푸른역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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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 위원장의 주장은 결국 "어떤 법에도 평등하게 복종하는 체제"가 아닌 '기업가들의 강압적 임의재량권',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을 기업가의 선의에 의존하게 해 노예의 지위로 전락'시키려는 것 아닌가? 자유, 법 앞에서의 자유는 정치체만이 아닌 모든 권력에 대한 제한을
요구한다.
2007/07/28 15:43 2007/07/2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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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유목민족들이 만들어낸 세계

툰유쿠크의 비문과 '비분강개'한 문체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돌궐 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p.57)

나는 최근 이 이야기를 두번 들었다. 한번은 신문에서 읽은 것 같고 다른 한번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이다. 이 이야기를 두번 듣는 사이에 이책을 샀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유목민 이야기 - 4점
김종래 지음/꿈엔들(꿈&들)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뢰즈의 <천의 고원>과 이책에 대한 해석인 이진경의 <노마디즘1,2>를 읽으면서이다. 이 책에서는 유목민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노마디즘과 탈주의 철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진경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더 많았었는데 최근 일어난 두번의 우연한 만남 때문에 김종래기자의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게 되었다.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은 후 내용보다도 문체(style)의 장중함이 더 깊이 다가왔다. 그런데 문체의 장중함은 아주 비극적인 내용들과 뒤섞여 나오면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기상을 끌어내는 듯 했다. 그러면서 읽지도 않은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이 생각난 것은 왜 일까? 김훈의 예전 직업과 김종래의 지금 직업이 겹쳐지면서 '기자들이 신문이 아닌,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쓰는 문체'가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 이야기>의 부제는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인데 과거의 유목주의가 디지털 사회와 만나면서 새로운 형태로 코드화되는 듯하다. 나는 톤유쿠크의 비문을 보면서 다시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기동전과 진지전이 떠올랐고, 유라시아 초원과 세계적인 대제국을 만들어 냈던 유목민족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묻게 되었다.

과거의 역사를 살피는 이유

그람시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이동하면 반드시 망할 것이며, 성을 쌓고 사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라고 뒤집어 생각해야 하는가?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것(역사)를 살피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를 되뇌일려고 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있는 맥락(context)나 구조(structure)를 보고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톤유쿠크의 비문은 척박한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리저리 옮겨다여야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초원에 성을 쌓고 살려고 한다면 양들, 말들과 함께 굶어죽을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톤유쿠크가 유목민인 자신의 민족에게 남긴 이야기인 것이다.

그람시의 이야기를 덧붙이면 시민사회가 발전이 안된 러시아에서는 레닌의 기동전(유목민의 전술과 비슷한)을 통해 혁명에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시민사회(성곽, 진지와 요새, 보루)가 발전한 서유럽에서는 기동전으로 휩쓸고 지나간다해도 그 뒷쪽에 여전히 강고한 성곽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순간적으로 빼앗을 수는 있으되 계속해서 지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목민 이야기>에 나오는 원제국의 운명도 이런 틀로 이해할 수 있지않을까? 물론 자본주의 국가체제가 아니긴 하지만 그람시의 틀을 하나의 은유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기동전 - 진지전 - 화력전


1990년 걸프전을 보면서, 그리고 현존하던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력전'에 대해여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진지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기동하는 부대를 화력으로 지원하거나 화력으로 기동로를 봉쇄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것은 당시 유행하던 그람시의 책들과 한참 읽기 시작하던 알뛰세르의 책들 영향도 있었다. 1996년 군대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하면서 화력과 기동에 기반한 군사전술, 전략과 함께 이런 생각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지금 <유목민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정보의 디지털화는 (하나의 개념적 은유인) 화력전의 범위를 전세계화 한다. 인터넷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게 한다는 것은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동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정보(이 정보들 모두 객관적 투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것들이다)인데, 이 정보는 특정지점(진지)에서 출발한다.

인터넷 내에서도 정보의 소통은 평등한 것이 아니며 위계적이며 제국이 지배한다. 제국의 언어(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형태인 언어)가 아닌 변방의 언어로는 이 세계를 지배하기 어렵다. 구글의 검색은 원격조정되거나 자동항법장치를 갖춘 스마트 폭탄처럼 정확하게 목표를 명중시킨다. 이렇게 할 때 구글의 거대한 검색DB는 진지인 것이다. 구글의 거대한 검색DB에 매시간 새로운 데이터를 긁어오는 로봇(crawler)들은 기동하는 유목민처럼 전세계의 데이터 베이스를 떠돈다.
 
구글이 제국이라면 제국이 된데는 이렇게 유목이 아닌 진지가 있는 것이다. 또 한국에서 네이버가 제국이라면 마찮가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디지털 노마디즘 운운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착취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제국(정보사회)에 대한 나팔수 노릇을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내 블로그의 제목도 디지털 노마디즘이다.) 언젠가 화력전에 기댄 에세이를 하나 써야겠다. 이런 생각은 이미 10년전에 갖기 시작했지만!

시간 대 장소: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

유목민은 정착민과 달리 시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사고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개를 묶는 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끈으로 개의 목을 걸어 끈의 길이로 개의 행동반경을 통제한다. 그런데 몽골에서는 두 뼘도 안되는 끈을 가지고 앞발 중 하나의 관절을 반으로 접어서 끈으로 칭칭 감아 절름발이 걸음으로 만든다. 우리가 해오던 방식이 공간을 제한시켜 개의 활동력을 구속하는 것이라면, 유목민의 것은 시간(개의 속도)을 구속하여 개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이다.(p.93)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은 결국 행동을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행동해봐야 한다. 세계는 한가지 얼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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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2 17:00 2007/07/22 17:00
From. 코코도르 2007/07/25 09:40Delete / ModifyReply
이런 엄청난 글에 처음 댓글 단다는게 신기합니다. 어중간하게 떠돌던 생각이 정돈된 글을 보니 놀랍고요. 늘 징기스칸 얘기 들을 때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궁금했었는데 침공은 할 있지만 지배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일부 설명 해 주네요. 근데 또 노마드를 보게된 처음 이유인 "성안에 있기"의 위험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니 결국은 ?
dckorea 2007/08/05 14:54Delete / Modify
그래서 화력전을 생각하는 겁니다. 화력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죠. 쉽게 떠오르는 것이 소총부터 대륙간 탄도 미사일까지 있습니다. 화력의 특징은 특정한 진지에서 출발하여 적진(또는 적의 몸안)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요즘은 진지가 움직이죠. 핵항공모함이나 핵잠수함 등등은 전략적입니다. 무장하고 있는 화력을 사용할 경우 작은 나라정도는 쑥대밭을 만들 수 있죠. 전통적인 진지전이 성과 참호, 그리고 그것을 채운 사람(병사)의 체계였다면 지금은 아닙니다. 진지에는 다른 것, 화력으로 채워져 있죠. 이 화력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순식간에 움직일 수 있습니다. 기갑부대, 자주포부대, 미사일부대, 항공기, 전자전 등등을 생각하면 됩니다. 전략과 전술이 전쟁에서 나온 것처럼 최신의 전쟁체계를 끌어다 기업, 정치 등의 전략, 전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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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 8점
켄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푸른역사

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만들어진 자유주의 개념은 아주 "공화주의"적이다. "인간 개개인의 육체가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혹은 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처럼, 국민과 국가의 조직체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원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 의지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데 제약받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이다, 자유국가란 자유로운 인격체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가라는 뜻이다. 즉 자유국가란 정치의 행위가 하나의 전체로서의 그 구성원들의 의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p.81)"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자유주의는 "사적 개인으로서 침해받을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형성된 자유주의 개념은 "순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타인의 혹은 외부의 간섭이 없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며, "정치 제도와도 상관없이 어떤 체제하에서도 느릴 수 있는 것"이라는 현재의 개념이 아니었다. 현재 사용되는 이런 의미의 자유는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는 자유인 못지않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7세기 공화주의적인 자유주의 개념을 기준으로 현재, 또는 과거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많은 문제들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 국주의의 식민지배를 한국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해서 엄격하게 한국민은 모두 노예상태였으며, 주인(일본)의 시혜없이는 자신의 의지대로는 무엇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아닌 자유주의적인 시각으로도.

60~80년대의 군부정치에 대해서도 똑같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단 전제군주와 같이 한사람만 자유로운 체제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독재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국민들이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의 발전과 같은 경제성장 논리, 현재의 신자유주의를 공화주의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반대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부르조아 정치학 비판"을 통해 비판적인 국가이론을 정립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영국 유학을 생각한적이 있다. 그리고 계급이 없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모든 개인이 자유로운 사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단순하게 진행된 논리, 생각은 아니지만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이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공화국"은 궁극적으로 계급이 사멸한 국가이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를 제약하는 조건들의 제거를 숙고하는 곳에는 경제적 지배관계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개인의 재산행사의 자유, 사적자유의 영역이 아닌 '의지의 자유'로 읽을 때, 이런 개인들의 의지의 자유로운 발현을 제약하는 사회경제적인 권력구조가 존재할 때 그것 자체가 노예상태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때, 현재의 자유를 포장하고 있는 형식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로 변화될 수 있게된다.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형식성을 탈피한 실질적인 경제적 민주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17세기의 혁명적인 자유주의 이론이 현재의 미국독립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기반한 자유주의!



2007/07/21 00:51 2007/07/21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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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의 딜레마
book, (2007/07/17 13:17)

 이글은 2005년 말에서 2006년 초 게임이론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쓴 것이다. 최근 한반도에서 "핵위기"가 해결될 조짐이 보여 다행이다. 하지만 언제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죄수의 딜레마"를 이런 시각으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 - 6점
윌리엄 파운드스톤 지음, 박우석 옮김/양문

죄수의 딜레마』(양문, 2004)를 구입한 날짜는 2005년 6월 16일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내내 '서평' 비슷한 것을 써야지 생각하면서도 손을 대지 못하다 벌써 반년이 넘게 지났다. 이 책은 " 존 폰 노이만 | 핵폭탄 | 게임이론"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나는 당시 '게임이론'에 대한 관심으로 간략한 입문서를 찾다가 '게임이론'을 확립한 사람(존 폰 노이만)에 대한 전기와 게임이론을 핵무기, 냉전 등에 대한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 적고 있는 이 책을 선택한 것으로 기억된다. 먼저 존 폰 노이만, 게임이론에 대하여 간략히 이야기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서평(감상 또는 추천사)'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말하도록 하겠다.

존 폰 노이만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리고 당신이 이글을 읽을 때도 우리가 존 폰 노이만이라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왜냐하면 폰 노이만은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에서와 같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마다 수천 개의 스위치와 회로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주기억장치(Main Memory)에 내장시켜 놓고 명령어를 하나씩 불러 실행시키는 개념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의 컴퓨터 구조를 ‘폰 노이만 구조’라고 한다. (p.116 이하)

‘천재’ 수학자인 폰 노이만은 1903년 헝가리에서 태어났고, 1957년 골수암으로 미국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저서로는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 『힐베르트 공간론』, 『게임이론과 경제행위』등이 있다. 특히, 그는 20세기 전반 냉전 시기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정치, 경제, 과학 분야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앞에서 이야기한 컴퓨터 구조 이야기를 떠나서) 체스와 같은 2인게임에서 착안한 게임이론을 통용하여 정치, 군사, 경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우리의 삶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임이론

게임이론은 ‘어떤 행동의 결과가 게임(놀이)에서와 같이 참여자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다른 참여자의 행동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상황하에서, 자기 자신에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는 것을 분석하는 수리적 접근법(數理的接近法)’을 말한다.

개구쟁이 아이들 둘이서 케이크 조각을 나누어 먹게 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을 통해 손쉬운 게임이론의 예를 들면 이렇다. ‘부모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잘라도, 한 아이(또는 둘 다)는 자신이 더 작은 조각을 가졌다고 느낀다. (게임이론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한 아이로 하여금 케이
크를 자르게 하고 다른 아이에게 원하는 조각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탐욕이 공정한 분할을 보장해준다. 첫째 아이는 케이크가 똑 같은 크기로 나누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케이크를 잘랐기 때문이다. 둘째 아이는 케이크 조각을 자신이 선택한 것이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 깔끔한 예는 폰 노이만이 의미하는 바의 게임일뿐만 아니라 게임이론의 기초가 되는 ‘최소최대’ 원리의 가장 단순한 예시이기도 하다. 케이크 문제는 이익의 갈등에 관한 것이다. 두 아이 모두 똑 같은 것(가능한 한 많은 양의 케이크)를 원한다. 케이크의 궁극적 분할은 한 아이가 어떻게 케이크를 자르느냐와 다른 아이가 어떤 조각을 고르느냐 모두에 의존한다. 각각의 아이가 다른 아이가 어떻게 할지를 예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그 상황을 폰 노이만의 의미에서 게임이 되게 만든다. 게임이론은 게임의 답(합리적 결과)을 탐색한다. 케이크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첫번째 아이의 최선의 전략인데, 왜냐하면 가장 큰 조각을 고르는 것이 다른 아이의 전략이리라는 것을 그가 예견하기 때문이다. 이 해결책은 한 아이의 관대함이나 공정한 경쟁심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아이 모두 자기 이익에 의해 강요된다. 게임이론은 바로 이런 종류의 해결책들을 추구한다.’

이렇듯 ‘게임이론은 오직 승리에만 관심이 있는 완벽하게 논리적인 경기자에 관한 것이다. 상대방이 합리성과 승부욕 양자 모두를 지녔다고 인정하고 당신 스스로 최선의 결과를 도모하도록 경기할 때, 그 게임은 게임이론의 분석 대상이 된다.’ (pp.68~69)

최소최대의 원리와 탐욕과 불신으로 점철된 세계

위 케이크 자르기의 예를 이용해서 최소최대의 원리를 설명하면 이렇다. 자르는 아이는 ‘무제한의 전략’ (자기 마음대로 자를 수 있음)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크게 보면 2개의 전략이 가능하다. 한 전략은 케이크를 똑같이 이등분하지 않는 것, 다른 전략은 가능한 똑같이 이등분하는 것이다. 두번째 아이(선택자)도 큰 조각을 고르거나 작은 조각을 고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현실적으로 ‘어떤 케이크 나누기도 완벽하지 않다는’(즉,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전제하는 것과 같은 완벽한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적 문제를 인정해야 해야 한다. 이렇게 한 후 케이크 자르기에 참여하는 아이 모두 ‘합리성과 승부욕’을 지녔다는 전제하에서 보면, 자르는 아이는 자신에게 남을 케이크의 조각이 작을 것이라는 것에서 최소 수량을 최대화하려고 할 것(거의 절반에 가깝게 자르려고 할 것)이다. 즉, 선택하는 아이가 자르는 아이에게 남길 최소를 최대화하도록 행동한다. 선택하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더 큰 조각을 선택하려고 할 것이고, 이것은 자르는 아이가 가질 최대 수량의 최소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자르는 아이가 취할 최선의 현실적 결과는 최소 수량의 최대화(자신에게 남을 수의 최대화)이고, 선택하는 아이의 최선의 결과는 최대 수량의 최소화(자르는 아이가 가장 적게 갖도록 하는 것)가 된다. 이렇게 최대최소와 최소최대가 동일할 때 그 결과를 ‘안장점’이라고 하고, 어떤 게임이 안장점을 지날 때, 그 지점이 해당 게임의 답이며 합리적 게임에서 기대되는 결과이다. 이러한 답(안장점)이 나오는 것은 게임 참여자들의 ‘탐욕과 불신’에 있다. 게임 참가자 누구도 적수를 도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pp.81~85)

이렇게 폰 노이만은 ‘완벽한 의사소통과 완벽한 정직성이 없는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고, 이곳은 ‘수많은 협조와 변절이 얽혀 있는 갈등의 세계’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뷰티플 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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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eautiful Mind (뷰티플 마인드)』
폰 노이만이 살던 냉전시대 지식인들을 정신

구조와 게임이론이 발전되는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존 내쉬는 게임이론 내에서 중요한 이론(내쉬균형)을 정립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현대 국가(권력)가 어떻게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개입하고, 또 사람들을 피폐화시키는가하는 것도 볼 수 있다.
감 독: 론 하워드
출연자: 러셀 크로우, 에드 해리스, 제니퍼 코넬리, 크리스토퍼 플러머, 폴 베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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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 폭격설'과 예방전쟁

앞에서 우리는 간략히 폰 노이만과 게임이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게임이론’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현재 우리가 서있는 남북 분단이라는 삶의 조건, 핵과 전쟁이라는 실존적이면서도 사회구조적인(차라리 월러스타인이 말하는 ‘세계체제’ 내에서의) 불안에 대한 역사적이고 이론적 통찰,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정책(전략적 행위, 선택들)에 의해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뉴스를 장식하는 말들에 대한 이해를 이 책이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시, 북한 선제공격 가능
나는 '영변 폭격설'이 횡행하고 핵위기가 고조되던 1994년에 군 복무를 하고 있었고, 북한의 김일성씨가 죽었을 때도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대한 후에 북핵 관련 위기때 마다 나오는 북한의 특정지역에 대한 폭격설에 대해 더욱 몸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더욱 몸을 떨었던 것'은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동원령에 의해 군에 복귀를 해야하고, 처와 어린 아이만이 난리통에 의지할 곳 없이 서울 어디엔가 남아있게 될 것이라는 좀 더 구체적이고, 지켜야할 것이 생긴 자로서 갖게 되는 그런 불안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국내외에서 공격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국외자로서의 태도 아닌가 하는 판단에서 나온 심한 '적개심'과 '그런 결정자들 먼저 전쟁에 자식을 보내라'는 감정상태에 빠져있었다. 이런 감정은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연루된 '병역비리'와 '국적문제' 등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화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폭격설이 핵폭탄이 발명된 이후 '평화'라는 미명하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주장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2차세계대전 후에는 소련(舊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서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사전에 소련에 핵을 투하하자는 "예방전쟁론"을 이 책은 소개하고 있고, "정당화 가능한 전쟁의 조건들"에 대한 논의(주장)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pp.120~124) 이런 '예방전쟁'을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우리도 잘아는 영국의 철학자 버틀란트 러셀이다. 훗날, 소련이 핵무장을 공식화 후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이런 주장을 철회하고 '진정한 의미'의 평화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것들은 북한에 대한 부시정부와 우리사회 매파들의 주장의 전반적인 기조와 동일하다. 영변이든 어딘든간에 북한의 핵개발 의혹시설을 폭격하고, "폭정의 전초기지"이고, "인권"을 유린하는 북한정권을 공격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고속도로 겁쟁이 게임과 북한과 미국의 외교정책, 그리고 남한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 미국, 그리고 남한의 외교정책이 '고속도로 겁쟁이 게임'과 유사한 것처럼 보였다. 이 게임은 고속도로에서 두 운전자가 서로 마주보면서 질주를 하는 것인데, 서로가 상대운전자의 결정을 모르는 채로 각각 도로에서 벗어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이 온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이 게임의 진짜 요점은 자신은 벗어나지 않고 상대 운전자는 벗어나게 함으로써 사내다움을 과시하는 것이다. 자신은 생존하여 흐뭇해하고 상대 경기자는 '겁쟁이'가 된다. 겁쟁이가 되는 것은 차악이며, 최악의 경우는 죽음일 것이다. (pp.290~291)

이제 운전자에 북한과 미국을 넣고, 고속도로를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이해관계로, 그리고 자동차 운전을 핵개발 강행과 북한 폭격(선제공격)으로 대입해 보자. '진실의 순간'이 끊임없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두 난폭한 운전자는 서로 마주보며 질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겁쟁이 게임에서는 어느 한쪽이라도 실제 '겁을 먹었고, 겁먹은 것이 탄로가 난다'면 거의 상황이 끝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더욱 거세게 몰아부치고 벼랑 끝까지 간 것처럼 (또는 가겠다는 듯이)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북한의 "벼랑 끝 전술/전략"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물러서는 순간 '겁쟁이'가 되고, 체제 자체의 붕괴까지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미국 또한 마찮가지이다. 북한을 그대로 두고 물러선다면 자신들의 세계지배전략이 무너져내릴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은? 두 게임 주체의 '벼랑끝전술'에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닌가? 양쪽 모두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싸움을 말리거나, 경제적인 부담/지원을 떠맡는 꼴일 수도 있겠다. 좀 더 비약을 한다면 두 게임 주체는 남한에게 '평화'를 볼모로하여 자신들의 이해에 따르도록 이끌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즉, 두 나라가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게임의 결과, 칼날은 남한에 닿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속도로 겁쟁이 게임'에서도 협동의 결과가 있다. 두 운전자 모두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데, 둘다 살아남고, 그 누구도 상대를 겁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p.291) 하지만 핵문제에서 이런 결과는 북한과 미국 모두 남한에게 평화를 볼모로한 더 큰 경제적 희생(양보)을 강요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그 결과가 전쟁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다소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여기, '협동의 결과'에서 남한 정부의 역할(또는 전략)을 유추해 낼 수 있는데, 남한이 어느정도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두 이해당사자들이 명분을 가지고 '고속도로에서 벗어나게 하기'가 아닐까? 두 게임 주체가 약간씩의 양보가 전제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독도문제, 또 다른 게임

이젠 어느 정도 게임이론(특히, 겁쟁이 게임)에 대해서 알았다면 한국과 일본 간의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도 이속에서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의 경험, 기억과 영토의 문제로 좀처럼 양보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 자명해보이며, 운전자(노무현대통령)가 고속도로에서 상대를 향해 가속페달을 밟은 상태이고, 상대도 현재 물러설 태세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양국 모두 가속 페달을 밟고나면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물러나기 어려워 보인다.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 독도를 지배하고하고 있는 한국이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실속이 없어보이는데, 이것이 며칠전까지 유지된 '조용한 외교'의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게임이론 관련 책을 한번 읽고 한국의 외교전략을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떤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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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in Hopkins의 예방전쟁을 지지하는 '호전적인' 노래가사 (p.124)

오! 우리는 그 일을 해낼 폭탄을 갖고 있다네.
왜 폭군을 그냥 두나?
미래의 왕국을 위해
그들을 날려버려.
야만인, 폭력배를 살려둬선 안 돼!

버틀란트 러셀의 쿠바 위기에 관한 진술 (평화운동 시기, pp.302~303)

당신은 죽을 것이다. 자연의 노정에 따라서가 아니라 몇 주 내에 그리고 당신 혼자서가 아니라 당신의 가족, 당신의 친구, 그리고 영국의 모든 거주자, 그리고 다른 곳의 수억의 죄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왜? 부유한 미국인들이 쿠바인들이 선호하는 정부를 싫어하고, 이 부의 일부를 사용하여 그것에 관한 거짓말을 유포하기 때문에.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거리나 시장으로 나가 "잔인하고 미친 살인자들에게 굴복하지 마라. 당신들의 수상과 미국의 대통령이 죽으라고 할 때 죽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고 상상하지 마라. 오히려 당신 가족, 당신 친구,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 그리고 당신이 선택할 경우 영광되고 행복하고 자유로울 미래의 세계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기억하라"고 외칠 수 있다.
그리고 기억하라! 묵종은 죽음을 의미한다, 저항만이 삶의 희망을 준다.

1962년 10월 23일 버틀란트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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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2006년 2월 2일 쓰기 시작하여 오늘(4.26)에야 끝냈다. 왜 이리 일이 많은지! 그리고, 책을 산지 1년이 넘어서는 현재도 우리를 둘러싼 불안한 평화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서글프다. 그리고, 러셀이 쿠바위기에 대한 진술을 한지 몇십년이 지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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