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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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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에 해당되는 글 7건
디지털 모자이크 - 10점
스티븐 홀츠먼 지음, 이재현 옮김/커뮤니케이션북스

학문적 관심이 없다면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나는 8장 디지털의 한계와 9장 모자이크를 재미있게 읽었다. "각기 동일한 것일지라도 다른 맥락에 있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게 된다."(p.180)

어제 쓴 글에서 현장성/가시성을 이야기하면서 참조하라고 말했던 책이다. 책을 들쳐보니 이 책 내용이 아니다.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와 <The World As Phantom And As Matrix>(Gunther Anders) 올해 읽은 책들의 내용이 범벅이 되어 만들어낸 '착각'이다.

작년말부터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계속해서 맴돌고 있는 생각/주제들이 있다. "매스미디어와 개인미디어의 결합/공생 관계", "현실/사건을 가지고 유령(Phantom)/가상을 만들어내는 미디어", "매스 미디어의 사회적 역할 - 공감, 정서적 연대 등의 관점에서", "개인미디어의 진보적 성격",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입장" 등

지난해부터 관심을 가진 벤야민의 맥락(aura)에 대한 관심이 생각과 독서를 여기까지 진전시켰다. <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귄터 안더스>에 대해서는 올초 강의를 하면서 진중권씨의 글을 참조했었고 최근 미국에 있는 선배에게 독일어의 영어 번역본을 받았다. 놀랍게도 11페이지 밖에 안되는 짧은 에세이였다! 아마 진중권씨의 주석이 더 긴듯하다.

미디어가 어떻게 사실/맥락을 왜곡하는지에 대해서는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를 읽으면 좋을듯하다.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게 본 것 중 하나이다. 돈벌이만 좇는 미디어가 사회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다른 한권은 박영욱의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라는 들뢰즈와 데리다에 관련된 책이다. '난해한'한 두 프랑스 철학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로 훌륭하다. 들뢰즈 책만 책꽂이 한칸을 넘게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다. 그를 읽는다며 혼자 앉아 '오해/오독'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 - 10점
W. 랜스 베넷 지음, 유나영 옮김/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미디어의 현재와 미래, 사회적 책임 등에 관심있다면 꼭 읽어볼 책. 미국에서 뉴미디어을 포함한 미디어산업에 투기적 자본이 들어와 어떻게 망쳤나를 알고 싶어도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10점
박영욱 지음/김영사

창의성/창조적 상상력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싶다면 세계/존재 자체가 다양체라는 것을 알면 된다. 쉽다고 말은 했지만 여전히 만만찮을 수 있다.

아래는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면서 7.14일 적은 메모가 있다. (메모는 책 내용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은 것임)

7.24일 메모

"미디어는 노상강도이다. 맥락에서 특정 장면을 빼앗아 온다"
"노상강도가 강탈적으로 만든 세계는 모자이크이다"
"나는 노상강도처럼 책을 읽는다. 이책 저책 띄엄 띄엄"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텔레비전론>,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남수영의 <이미지 시대의 역사 기억>, <디지털 모자이크>,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등과 김종철의 <텔레비전과 민주주의>등의 신문기사를 함께 읽으면서 나온 메모이다.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는 그 뒤에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이책 저책 읽다보니 아직도 읽고 있다. 매주 열댓장씩)

이즈음 메모들 사이에 "텔레비전은 상상력을 위축시키고, 아동의 정서적, 지적 능력의 정상적 발달을 가로막고,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김종철의 글(7.25일 한겨레신문)과  아마도 다른 란에서 백은하씨가 <찬란한 유산>을 평가하며 "허구적 매체는 ...... 새로운 문화적 대안을 제시한다"고 이야기가 쓰여있다.

2009.12.24. 17시 update --------------------------------------------------------

인용한 "문화적 대안"에 대한 이야기는 백은하의 글이 아니다. 백은하가 <찬란한 유산>을 칭찬하며 문화적 대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때 읽고 있던 <인권의 발명> 9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허구적 매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전부터 새로운 문화적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은 "드라마, 공감, 정서적 연대"라는 측면에서 읽고 있었다. 보편적 인권 관념이 어떻게 형성/구성되는가 하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TV라는 매스미디어가 어떤 진보성을 갖을 수 있는가로 고민을 하고 있다. 사회적 통합 기능(이전 같으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부숴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을게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개인미디어가 어떤 시각에서보면 사회적 분열을 극심하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매스미디어(객관적 관념론 경향을 갖음)과 개인미디어(주관적 관념론/유아론적 세계가 될 수 있음)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어떻게 만들까? 요즘 매달리는 화두 중 하나이다.)

"허구적 매체(TV)는 객관적 관념론을 만든다. 2가지 방향으로. 보도/뉴스는 현실을 관념화시켜 보수화하는대로, 드라마는 이상을 관념화시켜 급진화하는 대로. 역도 가능하다. 결국 TV는 보수화 또는 급진화될 수 있다." 어떻게 사용할지 용법/선택의 문제이다. 선택은 사회적(또는 개인적) 선택이며 구조적인 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아래 메모를 볼 것)
 
8.2일 메모

인권의 발명 - 10점
린 헌트 지음, 전진성 옮김/돌베개

나는 책을 읽으면 얼토당토 않은 방향으로 읽어댄다. 인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미디어의 논리, "미디어의 효과-경험-정서"라는 것을 읽으려 했다. 세계는 다양체이고, 일원론적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반영한다는 믿음 속에

인터넷/뉴미디어 관련된 일을 하면서 솔직히 백은하의 말보다 김종철의 말에 더 공감이 간다. “싫어하는 것에 반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조절하기 위해 스위치를 끄는 곳이 어디인가를 알아두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footnote]마샬 매클루언,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미래(1966)>, 스테파니 매클루언, 데이비드 스테인즈 편저, 『매클루언의 이해: 그의 강연과 대담』, 커뮤니케이션북스, p.139[/footnote] 나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다.

매클루언의 이해 - 10점
스테파니 매클루언.데이비드 스테인즈 지음, 김정태 옮김/커뮤니케이션북스

미디어 현상에 관심있다면 아래 책을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매클루언의 <미디어의 이해>보다 읽기 편하고, 내용주는 시사점도 더 많았다.

그런 까닭에 무엇보다 "이념(스위치 끄는 곳)"의 문제에 천착하려했었다. 그런데 벌써 1년이 다갔다. (SBS콘텐츠허브 입사 이래 가장 바쁘고 힘든 한해였던 것 같다.)

2008년 말 잡았던 에세이의 순서이다. 벤야민을 통해 다른 미디어 철학/사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몇가지 현상을 분석하기로 했었다.

벤야민
벤야민과 아도르노
벤야민과 매클루언
벤아민과 군터 그라스?
벤야민과 브루디외
벤야민과 플루서
---------------------------------------------
산만함
미세지각
시민종교, 아우라
블로그, 신화적 사고
유동적 자아매몰
흐름, 체험
미디어와 정서
(개인 미디어가 만든) 유아론적 세계
(매스미디어가 만든) 객관적 관념론의 세계
모자이크와 퍼즐

연초에 <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빌렘 플루서, 그리고 기술적 복제 시대의 우리>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200자 원고지 100매 정도를 쓰다가 중단했다. 회사 일을 마치고 밤새 글을 쓸 열정도 식고, 머리에 든 것도 없고, 또 여러 핑계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8~9월에 다시 <테크놀로지와 문화, 그리고 우리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50매 정도를 쓰다가 중단했다. 앞에 썼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이다. 이 글을 쓰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잉여가치학설사>의 지대 관련 장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미디어2.0>에서 이야기했던 기술지대 개념과 사례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비판적 미디어론으로의 초대>라는 제목으로도 긁적댔다. <방송통신융합의 철학과 비전>이라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나온 글을 보고 열을 받은 상태에서였다. 박사들도 미디어를 연구하면서 (앞뒤 자르고 말하는) 공력을 쌓았나 철학자들의 주장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며 '용비어천가'성 이야기를 유포하는듯 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앞의 세이야기의 주제를 합쳐 <기술, 경험, 정서, 그리고 이념의 문제>라는 제목만 지어놓고 이 책 저 책 들척이면서 밤마다 놀고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올해 사 본 책들이다. 이것 저것 들고 띄엄 띄엄 웹서핑하듯이 읽었고, 또 읽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장 주관적인 매체라는 책"의 내용이 이리 저리 통접(연접+이접)되어 이상한 모습을 띄는듯하다. 한권의 책에서 주는 생각의 연속성이 깨지고 단절과 비약이 심해 비선형적인 웹서핑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11월 ----------------------------------------------
공간 속의 시간(도시사 연구 총서 1)(양장본) 외 3개
텔레비전과 동물원
미술사의 역사
기나긴 혁명 (문화사, 대중문화에 대해)
벤야민 & 아도르노(지식인마을30) 외 2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데리다 들뢰즈)

10월 ----------------------------------------------
미디어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는가 외 2개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 (<디지털 모자이크>에서 말한 '모자이크'에 대해 역사/예술 내에서 알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기술지대의 발생 동력인 기술혁신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9월 ----------------------------------------------
공론장의 구조변동: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외 3개 (부르조아 미디어/공론장의 생성과 발전에 대해 알기 위해)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비평정신1)
유혹하는 에디터
뉴스, 허깨비를 좇는 정치
군림천하. 21

8월 ----------------------------------------------
참회록(성 어거스틴의)
인권의 발명
디지털 모자이크

7월 ----------------------------------------------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외 3개
비판과 화해(아도르노의 철하과 미학)
미술의 불복종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군림천하. 20
강연과 논문 - 마르틴 하이데거 (이학문선 03)(양장본) 외 1개
비트겐슈타인(하룻밤의 지식여행 51)

6월 ----------------------------------------------
군중심리(완역본) 외 4개 (인터넷에서의 군중심리를 어떻게 이해할까 생각해 보기 위해)
사회학의 문화적 전환 (시민종교로서의 미디어, 공감과 연대에 대한 접근법을 보기 위해)
이미지시대의 역사기억
텔레비전론
생각의 탄생 (몸으로 생각한다는 것, 미세지각에 대한 사례를 보기 위해)

5월 ----------------------------------------------
진중권의 이매진 외 2개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촛불에 길을 잃다: 쇠고기 수입협상에서 정권퇴진 운동까지 (촛불반대 논리를 살펴보기 위해 구입한 책, 진보적이라 생각한다면 사보지 말것)

4월 ----------------------------------------------
몸의 역사(살림지식총서 274) 외 1개
휴대폰이 말하다(아로리총서 4)

3월 ----------------------------------------------
서양 미술사. 1 외 1개
일방통행로

2월 ----------------------------------------------
매클루언의 이해: 그의 강연과 대담 외 3개 (맥루한에 관심이 있다면 이책을 볼 것, <미디어의 이해>보다 더 재미있다고 생각됨)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자본주의적 문화, 예술론의 시발점을 이해하기 위해)
발칙하고 기발한 사기와 위조 행진 (예술에서 모작, 원본이 없는 기술적 복제 등에 대한 이해를 위해)
아빠의 몰락

1월 ----------------------------------------------
문화예술경제학 (예술, 문화의 경제학적 함의를 살피기 위해, 기술지대 관련)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폭력에 대한 성찰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다시 사회구성체론으로(부커진 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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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2009/12/24 01:26 2009/12/24 01:26
From. Jeremy 2009/12/29 09:32Delete / ModifyReply
철학과 아니랄까바. ㅋㅋ 30일 소주나한잔하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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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부터 몇권을 책을 읽고 있다. 맨 먼저 읽기 시작한 책은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이다. 기원전부터 18세기까지 유라시아대륙에서 흥망성쇠한 유목민들이 세운 국가에 대한 역사 책이다. 이 책은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유목민 이야기>에서 잠깐 말한 것 처럼 이진경 교수의 <노마디즘>을 읽으면서 한번 읽겠다고 생각했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10점
르네 그루쎄/사계절출판사

상고시대에서 13세기까지 스키타이와 훈족에서 시작하여 돌궐, 위구르, 거란, 투르크와 이슬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돌궐, 거란과 여진은 우리 역사에도 가끔 등장하고, 최근 사극 <대조영>에서 발해가 건국될 당시 중요한 세력으로 나왔었다.

중반부는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에 대한 이야기 이고, 마지막은 티무르, 킵착 칸국(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칭기스칸 후예 몽골인들), 샤바니조, 차가다이인, 그리고 몽골리아의 마지막 제국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찾아보기>까지 800여 페이지가 넘는 두터운 책인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중반 이후 계속 되는 몽골인들의 이야기가 생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잘 알아 식상한 것도 아니기 때문인 듯하다. '적당한 관심, 사전 지식, 새롭운 사실들, 드라마틱한 제국의 흥망성쇠' 등이 긴 여정을 길지않게 만든듯 하다.

유목민, 유목민의 군대, 유목민의 전투기술

유목민의 군대는 기원전 750년경의 스키타이 시대부터 칭기스칸 그리고, 그의 후예들이 최후를 맞은 18세기까지 말과 활로 이루어진 '기마궁사'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많은 경우 '도시 없이' 소위 '움직이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을 지니고, 계절적 이동에 따른 마차 위에 여인들과 재산들을 실고 다녔다.[footnote]<유라시아 유목제국사>, p.44[/footnote]

이들의 전술 또한 기원전 7세기에서 12세기 칭기스칸까지도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데 앞에서 후퇴하면서 적들을 약올려 들판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게 만든 후 적들을 초원에서 몰이사냥을 하듯이 격파하는 것이다.[footnote]같은 책, p.47[/footnote]

유목민들은 전투에서 적을 급습할 때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른다. 만약 적이 저항하면 흩어졌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돌아오면서 도중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뒤엎어버린다. 그들은 요새나 진지를 어떻게 함락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놀랄 만큰 먼 거리에서 쇠같이 단단하고 날카로운 뼈로 촉을 만든 화살을 쏘는 기술에서 그들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footnote]같은 책, p.132를 볼 것[/footnote]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이야기했던 톤유쿡[footnote]<유목민 이야기>의 톤유쿠크와 동일인물이다. 또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pp.178-180을 보면 <유목민 이야기>에 나오는 비문에 씌여있는 톤유쿡의 말의 배경을 알수 있다. 톤유쿡의 주군인 빌게 카간이 투르크인들을 획정된 지역에 정착시키고 오르콘 지역에 중국식의 성곽도시를 건설하고 불교 사원과 도관을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다.[/footnote]은 투르크의 장점을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또 상황이 나쁘면 피해서 도망칠 수 있는 유목민으로서의 기동성에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돌궐은 그 수가 중국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들은 물과 풀을 찾아 떠돌고 사냥을 한다. 그들은 정해진 주거가 없고 늘 전투하는 연습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다고 느끼면 나타나고, 약하다고 생각하면 물러나 숨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보다 수가 많은 중국의 이점을 상쇄하고 그것을 쓸모없게 만들 수 있다. 만약 당신[빌게 카간]이 돌궐을 성곽이 있는 도시에 살게 하고 중국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를 당한다면, 설사 그것이 단 한 번일지라도 당신은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부처와 노자는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니 그런 가르침은 전사에게 맞지 않는다."[footnote]같은 책, p.180[/footnote]
이런 유목민과 한민족과의 친연성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고구려의 주몽 설화, 말타는 고분벽화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기마궁사의 모습과 순장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순장은 스키타이인, 투르크-몽골인, 그리고 삼국시대의 한반도에서도 찾아  수 있다. 이런 관습은 이미 서아시아나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진 장례의식이다.[footnote]같은 책, p.45[/footnote]

고구려 쌍영총 기마무인도
 ▲ 고구려 쌍영총에서 발견된 기마무인도의 모습[footnote]그림출처: 아쉽다, <왕 의남자>의 옥에 티, 오마이뉴스, 2006.2.18[/footnote]

'야만인들'인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되면서 새로운 중세가 시작되는 것처럼 이 책을 읽다보면 유라시아 초원에서의 작은 폭풍이 전체 세계 역사에 얼마나 거대한 충격을 주고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지를 볼 수 있다. "초원의 한쪽 끝에서 발생한 작은 자극으로 인해 민족이동이 가능한 이 엄청나게 광대한 지역의 구석구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이 초래"된다.[footnote]같은 책, p.81[/footnote]

야만과 문명, 그리고 국가라는 문제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빠져든 화두는 '야만'과 '문명' 그리고, 국가라는 문제이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의 경우 씨족사회를 기반으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면서 몽골 일족들은 '문명화 과정'을 거쳐 초원이 강요했던 강인한 생명력(유목민의 전투력)을 잃어버리고 문명의 수호자가 된다. 또 달리 보면 국가 자체가 문명을 요구하거나, 문명이 국가를 요구한다고 할 수도 있다.

먼저 이들의 '야만성'은 어느 정도였을까? 또 어떻게 하여 문명의 수호자가 되었을까? "그[석륵]은 유목민적인 성향도 못지않게 강했고, 특히 그의 흉노인 후예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석륵의 계승자인 석호(334-349)는 자기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던 아들을 사형에 처할 정도로 방탕한 짐승이었다. 그 아들은 완전히 괴물로서 자신의 가장 예쁜 첩을 불에 구워서 탁자에 내오게 할 정도로 변태적인 타타르 냉혈한이었다. 석호는 가장 열렬한 불교의 보호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문명의 마력에 처음 접하면서 빠져버리는 야만인 사이에 흔히 나타날수 있는 이상현상이다."[footnote]같은 책, p.111, 문화적 보호에 대해서는 p.112도 볼 것[/footnote]

탁발도의 경우 "새로운 통치자의 어머니가 과부로서 가질 수 있는 야망, 탐욕, 또는 질투가 빚어낼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황제 즉위 이전에 그녀를 죽이는 야만적인, 그러나 사려 깊은 투르크-몽골의 관습을 그대로 보존하였다"고 한다.[footnote]같은 책, p.118을 볼 것[/footnote]

아틸라 더 훈 (406년~453년)
3-5세기 훈족에 대한 서구(아마 로마시대) 역사서의 묘사를 보면 이렇다. 아이의 뺨에 수염이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깊은 상처를 냈다. 음식을 요리하거나 얌념을 치지 않고, 안장 밑에 놓아두어 부드럽게 된 들풀의 뿌리와 고기를 먹었다.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이나 고정된 거처가 없다. 늘 유목생활을 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추위, 배고픔, 갈증으로부터 단련되었다. 모임도, 장사도, 마시거나 먹는 일 심지어는 말을 탄 채 자기도 했다. 이런 생활과 함께 괴물같은 인상과 염소가죽으로 '대충' 만든 복장을 한 모습을 본 서구(로마와 게르만 세계)는 공포에 떨었다.[footnote]같은 책, pp.131-132를 볼 것. 블로그 훈족 이야기를 참고 할 것[/footnote]

581년 중국의 사가들이 돌궐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혈기가 왕성할 때 우대를 받는다. 염치와 예의를 모르고, 이런 점에서 옛 흉노와 비슷하다. 여기서의 흉노는 서양에서 말하는 훈이라는 학설이 존재한다. 또 사람이 죽으면 자손이나 친척들이 양이나 말을 잡아 그의 천막 앞에 그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놓아둔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애도하는 울음을 내면서 그 천막 주위를 일곱 바퀴 돈 다음에 그 천막 앞에 와서는 얼굴을 칼로 그어서 피가 눈물과 함께 흐르게 한다. 장례를 치르는 날 그와 가까웠던 친족이나 그와 가까왔던 다른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고 말을 달리며, 죽었던 날과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을 칼로 긋는다. 장례 이후에 고인이 생전에 죽인 사람의 숫자만큼의 돌을 그의 무덤 주위에 둔다. 아버지나 백부나 숙부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나 어린 동생 혹은 조카가 미망인과 그녀의 자매와 결혼한다. 그들은 악령과 정령을 숭배하고 무당을 믿는다. 전투에서 죽는 것이 그들에게는 영광이고, 병에 걸려 죽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footnote]같은 책, p.148을 볼 것. 우리 표현에 '피눈물을 흘렸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이 먼 과거의 습속이 우리 말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우리나라에 있는 무당은 유라시아 유목민들에게서 흔하게 발견된다.[/footnote]

이 정도면 야만이라는 표현이 가리키고 있는 유목민의 생활상을 어느 만큼 알 수 있다.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문명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문명화과정>을 볼 것)

문명의 마력이란 물리적 힘을 사용하지 않고도 권위를 부여하고 충성을 하도록 만들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주는 기술들인듯 하다. 종교가 지배자를 신이나 하늘의 대리인으로 만들고, 문명국의 궁정은 '움직이는 도시'에서 보여줄 수 없는 거대한 즐거움을 야만적 지배자들에게 선사한다. 많은 의례적인 절차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같은 친족/씨족 내에서도 왕과 왕이 아닌 자에 대한 차별성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의례들을 통해 친족 살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문명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예를들면 과부인 어머니가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만듬으로써.

하지만 문명화의 결과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목적 생활에서 나온 전투력의 약화에 의한 문명으로부터 패퇴 또는 너무 문명화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는 형태로 나온다. "그들[타브가치(탁발)[footnote]탁발은 5세기 북중국을 지배한 유목민족이다.[/footnote]]은 북중국의 다른 투르크-몽골계 국가들을 통일한 뒤 너무 한화(漢化)되어 부족이나 왕조 모두 중국인 대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더욱이 불교를 위한 그들의 열의는 기독교에 대한 카롤링거와 메로빙거의 열정의 재판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크 자신이 게르만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대항에 로마 전통의 보호자가 되려고 했던 것처럼, 탁발도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초원 깊숙한 곳에서 미개인으로 남아 있었던 몽골계 부족들을 상대로 황하에서 '라인 강의 파수꾼'이 되었다."[footnote]같은 책, pp.113-114[/footnote]

유목제국들은 야만과 문명이 만나는 초기에는 아주 강한 힘을 갖게 된다. 탁발의 경우를 통해 보면 반쯤은 한화된 투르크-몽골계 부족인 탁발은 '중국에 대해서 모든 고유한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면서도 여전히 북방의 야만적인 부족들에 비해 우월감을 갖게 해주는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429년 타브가치의 왕 탁발도[북위의 태무제]가 몽골의 유연을 상대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중국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다. 풋내나는 망아지와 송아지들이 호랑이와 늑대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유연 그들은 여름에 북쪽에서 방목하고, 가을이 되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겨울에 우리의 변경을 약탈한다. 우리는 단지 여름에 방목장에 있는 그들을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 그때 그곳의 말은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숫말들은 암말과 교미에 정신이 없고 어미말은 망아지와 지내기 바쁘다. 만약 우리가 그곳으로 가서 그들의 목초지와 물을 없애버리기만 한다면 며칠 이내로 그들을 잡든지 아니면 붕괴시켜버릴 것이다." 정확한 판단이다. 유목민의 조직은 여름이 되면 모두 흩어져(전투조직이 와해되어) 있다 겨울에 약탈을 위해 뭉치는 '국가'가 아닌 전투 연맹체 정도이다.

탁발도가 말한 이와 같은 이중의 우위는 이후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원의 황제)가 남송과 카이두 몽골부족을, 그리고 초기의 만주족(청)이 최후의 중국인 반란과 마지막 몽골의 호전성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이중의 이점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탁발, 쿠빌라이조, 만주도 완전히 한화되는 때는 반드시 찾아왔다. 그러면 그들은 북방의 부족들에게 패배하였고, 중국에서 쫓겨나거나 아니면 그 속에 흡수되어버렸다. 이것이 (야만과 문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중국과 몽골 역사의 기본적인 리듬이다.[footnote]같은 책, p.117, 비슷한 이야기는 pp.120-121에서도 볼 수 있다.
http://ko.wikipedia.org 에서 북위(북조)를 검색하면 다음 내용을 볼 수 있다. "도무제중국 전통의 국가체제를 채용하여 탁발부 밑에 있던 여러 부족을 해산시키고, 족장이하 부족민은 모두 중국의 호적에 편입시켜 한족과 혼합시켰다. 더불어 한족 출신의 명족(名族) 인재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나라를 공격해 하남을 빼앗고, 이어 태무제(太武帝)는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차례로 멸망시켜,439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서역에서 조공을 바쳐오는 나라만 해도 20여개국에 이르니 북위의 국세는 크게 울려퍼졌다.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태무제[탁발도]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또한 남조 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과 강북을 빼앗았고, 이때 도사 구겸지가 도교 교단을 확립하고, 한인 관료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삼무일종의 폐불 첫번째) 이 시기에 선비족의 한인 동화와 도시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footnote]

용문석굴
탁발의 경우 황제였던 탁발홍은 471년 승려가 되기 위해 어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고, 그의 아들인 탁발굉(효문제, 471-499)은 용문 석굴을 만들게한 장본인이다. 탁발은 중국의 문화와 불교의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투르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인하고 늠름한 기상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게 된다. 한번 보살의 자비로운 손길에 스친 사나운 전사들은 승려의 인문주의적인 가르침에 너무나 감화되어 원초적인 호전성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방어마저 게을리하게 된다.[footnote]같은 책, pp.119-121[/footnote]

8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위구르 쿠르크 제국의 경우 "피냄새로 진동하는 야만인들의 습속이 유행하던 나라가 채소를 먹는 사람들의 땅으로 바뀌었다. 살인이 자행되는 나라가 선이 권장되는 나라로 바뀌었다"고 쓰고 있는데 마니교와 기독교의 영향이다.[footnote]같은 책, p.195[/footnote] 이런 내용은 모든 유목민족의 역사에서 나오는 듯하다. 더 이상 이런 사례를 열거하지 않겠다.

유목민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넘어오는 사이에 국가가 존재한다. 정주민의 땅을 차지한 유목민은 그들을 통치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고, 그 국가에 그들이 '포획'되면서, 즉 야만성을 잃고 문명화되면서 다시 그 '국가-정주민의 땅'을 잃거나 '민족/부족' 자체가 정주민에게 동화되어버린다.

문명화 과정을 거친 유목민의 운명, 그리고 그람시적 진지와 기동

'중국화=문명화' 과정을 거친 유목민의 운명은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유목부족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중국의 한족처럼 변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한족이 유목민에 비교하여 절대적 다수라는 단순한 사실에 기인한다.

둘째, 문명화 과정은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니 그런 가르침'이어서 유목민의 호전성을 사그라들게 만들어 전투력을 잃었을 때 수적으로 소수인 그들을 다시 초원으로 몰아내버리거나, 다른 초원의 호전적 유목민의 사냥감이 되도록 만든다. 문명세계의 발명품인 국가는 유목민에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면서도 다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은 목적은 국가의 형성, 체제의 변환 또는 이행, 진지와 기동이라는 그람시적 은유 등에 대해 해석을 위한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용에 빗대 그람시의 이야기를 해석해 보자.

첫번째의 경우는 가지고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말했던 그람시의 진지전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다. 만일 '노동자가 절대적 다수'라면 그람시의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노동계급의 존재론적 위치와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이라는 문제 등과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존재론적 당위가 아닌, 사실을 보면 부르조아 사회에서 부르조아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임금노동자라고 해도 노동계급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 생각을 한다해도 존재론적 당위가 전제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닌가?
결국 '문명화'된 사회에서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계급은 다수가 아닌 정치적 소수인 것이다.

두번째 경우를 가지고는 반대로 어렵지만 하나의 가능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계급적 헤게모니를 구성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야만성을 '문명화'할 수 있는 조직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그람시의 진지는 문명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과 이것의 현실화쪽으로 '접합'시켜나가기 위한 장(場)을 만든다. 이속에서 '폭력에 대한 독점'으로 정의되는 '계급적' 국가를 '문명화' 시킬 수 있을까? 이 과정은 앞에서 살펴 본 수적(數的) 소수에서 다수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의 경제적, 존재론적 위치가 아닌 '어떤 다른' 심급에서.

이런 관점에서 그람시는 마키아벨리적 군주에 빗대 현대적 군주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하며,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많은 유목민의 군주들이 자신들의 민족을 문명화시키려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에 대한 어렴풋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진지(성곽) 내에서 벌어지는 과정은 이데올로기적(문화적) 과정이다. 톤유쿡의 지적처럼 '전사에게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는 부처와 노자와 같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곳이다. 불교 사원과 도관이 있다. 도망가 숨을 곳이 없을 때, 즉 기동전이 불가능할 때 진지전이 필요하다면 이것의 전제조건은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다. 전체주의에서는 국가 안에서 전체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시민권을 쫓아내 버린다.

전체주의의 기원 1 - 10점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한길사

이런 생각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와 함께 읽은 책들의 내용이 결합되어 나왔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를 읽고 있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의) 동화의 강력한 방해 요인은 이른바 주도 민족들이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러시아나 유대계 주민들은 폴란드의 문화가 자신의 문화보다 더 우수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폴란드인이 전 주민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사실에도 특별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footnote]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p.498 (한길사)[/footnote]
이글을 반대로 읽으면 수적, 문화적 우월성이 동화의 핵심 동력이다. 이런 아렌트의 지적이 맞다면 문명에 쉽게 젖어드는 유목민의 경우 정주문명의 우월성을 느끼고, 정주민들이 수적으로 월등히 많다면 어쩔 수 없는 필연인 것이다.

함께 읽은 책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으면서 문명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을 함께 읽기 시작하였다. 문명의 시작은 어쩌면 '차이; 피지배계급보다 자신들이 났다는 우위의 표현체계'일 수도 있다. 훈족을 보면서 놀랐던 중세 초의 유럽인들처럼 현재의 우리도 중세의 유럽인을 보면 '야만인'이라고 놀랄 것 같다. <문명화과정>에서는 궁정사회의 예절 등이 어떻게하여 일반화되어 '민족의식'이 되고, 다시 근대적 국가(nation, 민족국가)가 성립되는지를 추적한다. 현재 <전체주의의 기원>과 같이 읽고 있다.

문명화과정 1 - 10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한길사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Who Sings the Nation-state?>도 함께 읽었다.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유란 무엇인가 되묻고, 스피박은 국가적 추상구조라는 개념을 통해 재분배와 사회복지기능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무거운 주제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 10점
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주해연 옮김/산책자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기 시작한 것도 버틀러가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학교에 대닐 때 아렌트를 아주 멀리서 '소비에트'를 공격하는 우파 지식인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또 이런 선입관 때문에 손이 가지 않았었다. 내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알뛰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가 '인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아렌트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

인권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보통 학교에서 '천부인권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설(說)이 단순한 주의, 주장에서 사회적인 힘을 가지고 정치적 사실이 되는 과정, 신화가 현실이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렇게 만들어진 현실이 사실은 '신화적 현실'이었음을, 인간에게 사실상 인권이 없었음을 주장하는 듯하다. 신화가 현실이 되는 과정은 이데올로기가 사실/진리가 되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또 문명과 차별성(차이)의 문제로 <유한계급론 - 문화, 소비, 진화의 경제학>을 사들었다. 베블린의 책을 해설해 놓은 것이다. 베블린의 책은 대학시절 일별했었는데, 마르크스 이외에는 이단시 되었던 풍토에서 공부한 관계로 선배한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기억뿐이다.
이번에 1997년 3월 3일 을지서적에서 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을 함께 읽어야겠다. 10여년전 책 뒤에 써 놓은 글이 있다. 1996년 말 제대를 하면서 바로 취직을 한 후 6개월이 체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방황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인데, 지금도 ... 
"나에게 투쟁정신이 필요하다. 나는 절망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구별짓기>도 사람간/계급간의 차별화 전략에 대한 분석이다.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에 대한 분석인 <유한계급>에서 시작된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문명화과정> 역시 비슷한 내용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구별짓기 -상 - 10점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새물결

이론적 정확도를 떠나 느낌이지만 문명을 습속으로, 탈주해서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식적 좌파들이다. 하지만 문명을 떠나 정말 '밖에서' 생각할 수 있을까?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넘어설 수 있을까? 넘어선다면 어떤 개인이 넘어서는 것이 아닌 '문명' 자체가 넘어서는/넘어서고있는 것은 아닐까? 유목주의(노마디즘)은 결국 문명세계에 의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완전히 기병으로 구성된 금나라(여진족) 군대는 중국 남방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다. 그곳에는 범람하는 땅, 서로 얽히는 강들, 논과 운하가 있었고, 조밀한 인구가 언제 그들을 기습하고 포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footnote]르네 그루쎄, 같은 책, p.215[/footnote]
휴가가 끝났다.

미주 ------------------------------------------------------------------
2008/08/20 02:02 2008/08/20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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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룡 교수 - 민족주의론 강의, 1992년 2학기
1992년 최상룡교수의 민족주의론을 들으며 제출한 레포트이다. 몇가지 과제 중 내가 선택한 것은 '박헌영은 민족주의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였다. 최상룡교수는 박헌영을 민족주의자로 묘사했는데 아래 글은 그에 대한 반론 성격으로 씌어졌다. 수업 중 아래 글을 발표하자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정외과 수업에 타과생이 와서 담당 교수와 다른 논조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논의 전개했고, 그 결과 레포트는 폰트 10의 크기로 A4지 15장 분량으로 1시간 동안 발제하고 토론하기에 '아주 긴' 내용이었다.

민족주의론은 대학 마지막 학기에 들은 수업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이 레포트는 대학 4년동안 공부한 결과의 결산인듯도 싶다. 당찬 '반론'에 최상룡교수는 재미있어하면서 좋아했고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러면서 나는 이 수업 덕에 우리의 현대사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시간적으로 보면 보론으로 작성된 「남한 사회에서의 국가 형성 - 과대성장국가이론을 중심으로」가 1991년 여름에 씌어졌고, 아래 글은 1992년 가을에 썼다. 앞의 글을 안읽었다면 그것을 먼저 읽는 것이 좋다.

박헌영의 8월테제의 Nationalism적인 요소

머리말

처음에는 '민족주의자로서의 박헌영이란 판단은 가능한가'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에 대해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러한 접근방법이 문제의식을 극명하게 한다는 잇점은 있지만, 반대로 그의 삶을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에는 다소 장애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으로 무장된,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싸워 온 한 혁명가를 민족주의라는 '잣대'를 가지고 재단하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글에서는 먼저 역사적인 서술방식을 채택하여 그의 삶을 간략히 시기별로 정리하고 그 역사성(구체적 상황의 전개과정)에 기반하여 1945년 8월 15일 조선의 해방부터 1946년 7월 신전술이 제기될 때까지 그의 사상적, 실천적 기조를 이룬 8월테제를 분석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서술 자체가 그의 8월테제와 신전술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극명하다. 왜냐하면 박헌영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지 해방 직후의 경제, 정치, 사회적 구조를 분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매꾸려고 박헌영을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되는 글을 이 글의 뒤 부분에 「보론」식으로 첨가했다.

먼저 나는 앞에서 말했듯이 박헌영의 개인사를 서론 부분에서 살피고, 본론에서는 짧지만 8월테제와, 그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그밖의 문건들을 가지고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박헌영을 우리가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제시해보겠다.

제1기 출생과 성장과정 (1900~1920)

박헌영은 1900년 5월 1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 금광마을에서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이학규)은 금광마을 근처에서 주막을 하면서 생활을 했다. 그의 집안은 '중농(동산과 부동산을 합쳐 당시 돈 약 1만원 정도)' 정도로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1운동이 났던 1919년 졸업을 했다. 3.1운동에 그가 참가했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1947년 2월 24일 발표한 글인 「3.1운동의 의의와 그 교훈」에서는 이 운동을 반제민족해방투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민족대표의 투항주의와 무저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제2기 사회주의 사상의 학습과 사회주의 선전 (1920~1932)

그 후 박헌영은 1920년 일본을 거쳐서 상해로 가서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약 6개월간 학습하고, 1921년 4월경부터 상해에 있던 '사회주의연구소'에 드나들면서 공상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박헌영은 그곳에서 사회주의를 계속 연구하면서 여운형과도 친교를 맺는다. 그 당시 그는 '사회주의라는 것은 사회가 모든 사람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註1)이라고 생각해 좋은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1921년 9월에는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하지만 1922년 3월에 사회주의 선전을 위해 귀국할 것을 결심하고 자퇴를 한 후에 귀국하던 중에 체포(1922.4)되어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 받았다.

1924년 1월에 출옥한 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약 6개월간(1924.4~10)하다가 신문사를 나와서 집에서 문필생활을 하면서 개벽지에 기고를 했다. 그때 발표한 글이 「국제청년 데이의 의의」(1924.8.18.)와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1925.10.29.)이다.
 
그리고 1925년 4월 18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의(이하 공청)를 결성한다. 공청은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는 별개 조직으로서 공산주의를 선전, 교양하는 기관으로서 단지 조공과 이념상의 상호연락관계를 유지했다. 즉 조공이 당적인 차원의 운동이었다면 공청은 그보다 낮은 단계의 대중운동 차원에 있었던 것이다. 공청은 25월 12월 박헌영이 신의주경찰서에서 한 진술을 토대로 해서 살펴 볼 때 그가 22년 귀국 시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 선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건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 했다.

"1924년 1월에 출감하였으나 전날의 사명은 결코 방기할 수 없다는 결의 아래, 경성에서 사회주의 연구를 계속했다. --- 나는 경성에서 바삐 다니던 중, 자신과 같은 뜻을 지닌 자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고 드디어 1925년 4월 19일 내 집에 --- 사람을 모아 고려공산청년회의를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註2)

조공은 1925년 4월 27일 창당되었는 데 박헌영은 해방 때까지 정식으로 입당 수송을 밟아 공산당원이 될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의 엄중한 탄압과 1928년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결정하는 등 외적 조건이 나빳기 때문이다.註3)

박헌영은 공청사건으로 1925년 12월 검거되어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되어 28년 8월에 국외로 탈출하여 29년 6월 모스크바로 가서 마르크스학원에 입학하여 러시아어와 공산주의를 연구하다가 중도에 자퇴하고 브라디보스톡으로 와서 조선일 초등교사를 하였다.

제3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 (1932~1946)

32년 12월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공산당 재건 운동을 준비하다가 이것이 밝혀져 33년 상해에서 체포당해 국내로 압송되서 6년간 복역 후 39년에 출옥했다. 그후 박헌영은 콤그룹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41년 6월과 12월에 관련자가 대부분 검거되자 광주 벽돌 공장에 피신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숨어서 지냈다.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박헌영은 20일에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이하 재건위)를 조직하고 재건위의 정치노선과 활동방침으로 8월테제-「현정세와 우리의 임무」(이하 임무)註4)를 발표한다. 재건위의 의미는 25년 창당되어 28년 해체된註5) 조공을 재조직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서 이는 과거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당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45년 9월 15일에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선포한다. 이것은 이전의 서울계, ML계, 화요계가 만든 '장안당'을 흡수, 통일된 당 형태를 조직하는 형태를 띠고 이루어졌다.

'신전술'(1946.7) 이전까지의 이 시기에서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소-영-미-중"註6)이라고 하면서 미국을 우호적으로 표현하였다. 실제로 당시에 있어서 남로당의 '미군정에 대한 좌익의 정책은 우의적 친선 방향'註7)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 초기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이 그 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평화적 방법으로의 이행이라는 노선에 서 있었다.註8)

제4기 자주적인 민족국가건설의 실패와 신전술 (1946~1953)

신전술은 해방 조선에서 그간 실시된 미군정의 정책과 그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8월테제에서 박헌영이 주장한 정치노선이 국가라는 조직된 가장 강력한 물리력에 의해 실패되면서 박헌영은 미국을 이제 과거의 일본과 동일한 위치에 놓는다.註9) 이제 그는 시민사회에서의 혁명적 열망을 조직해 식민지적, 파쇼적 국가기구(미군정)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이 한반도 전체적인 차원에서 일어났던 계급투쟁의 최고차적 형태인 내전(한국전쟁)이었다.

신전술의 정신은 이렇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군정에 협력하여 왔으며 미군정을 비판함에 있어서는 미군정을 직접 치지않고 --- 간접적으로 미군정을 비판하였으나 앞으로는 우리가 이런 태도를 버리고 미군정을 노골적으로 치자 --- 지금까지는 미군정과 그 비호 하의 반동들의 테러에 대하여 그저 맞고만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맞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 갚자."註10)

이러한 신전술 아래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났고 박헌영은 체포령이 떨어져 월북했다.註11)

몸말

임무」(8월테제)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Nationalism)적인 요소와 이에 대한 이해

'임무'에서는 해방조선에서의 혁명의 단계를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설정함으로써 서구에서 그와 같은 단계의 혁명 결과로서 나타난 것들 - 민족국가의 설립과 봉건적인 토지제도의 철폐를 전략적 과제로 설정했다. 즉 "금일 조선은 부루주아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를 걸어가고 있나니, 민족적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과업으로 서있다. 즉, 다시 말하면 일본의 세력을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구축하는 동시에 모든 외래자본에 의한 세력권의 결정과 식민지화 정책을 반대하고 근로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정권을 내세우는 문제와 동시에 토지문제의 해결이다."註12)

여기서 '일본세력을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구축'한다는 것은 두가지의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민족적 완전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세력을 완전히 구축해야 된다"註13)는 것과 "--- 반제투쟁의 과업 --- 완수 ---, 즉 조선으로부터 --- 친일세력을 일소하였느냐 하는 문제"註14)의 해결이다. 이와 함께 "전쟁시기에 군사적 제국주의적 전시계엄상태 밑에서 모든 운동은 물론이고 하찮은 자유사상의 언사까지도 극악의 탄압"을 했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대중적 검거는 비합법적 조직운동을 극도로 위축"註15)시켰는데 이런 파시즘적인 상황을 제거한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박헌영이 제기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정치적 내용은 반제반파쇼민주주의혁명이었다. 그런데 반파시즘전선이라는 것은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에 부과된 外來的인 것이라는 점에서 실제적으로는 반제국주의적인 투쟁의 한 요소로서 포함될 것이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쟁점과 과제' 삽화 사진 - 고대대학원신문, 1993.1.11, 정해구 (레포트와 함께 철해져있던 에세이)
이런 정치적 목표달성을 위해 박헌영이 내세우는 것은 '혁명적 민주정권, 혁명적 민주주의 조선, 인민정부'이다. 이것은 "--- 조선의 완전독립을 달성하기 위야는 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를 숙청[하고] ---, 조선인민의 이익을 위하야 --- 실지로 투쟁 --- 하며, 세계평화와 전쟁방지를 위하야 민주주의제국과 친선할 것[이고] ---,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장 잘 실천하는 조선공산당과 협력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註16)인 "진보적 민주주의 제단체의 집결로서 전조선민족통일전선"註17)을 결성하고 이 "민족적 통일전선"註18)의 기초 위에서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연합군에 의해서 조선이 해방된 상황 속에서도 반제라는 문제와 민족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문제를 하나의 전략적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가장 민족주의적인 해결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박헌영의 이런한 정치노선의 민족주의적인 성격은 장안파의 주장과 레닌이 1905년 러시아혁명 시에 제시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라는 테제와 비교해 본다면 더욱 뚜렷해 진다.

장안파는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자의 긴급임무」와 「현단계의 정세와 우리의 임무」註19)를 발표했는데 앞의 것에서는 '8.15일 이래 조선혁명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대상으로 하는 혁명의 제1단에 돌입하였고, 이제 조선이 독립됨으로써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 과업이 거의 완수되었으므로 금일부터는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혁명에로 단계적, 서열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혁명이 동시에 수행되면서 전자가 후자의 일부분으로서 그 안에 포함된 형태에서 전개되어 나가는 제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동시혁명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뒤의 문건에서는 이제 혁명이 제2단계로 돌입하였으므로 세력배치가 '자유주의적 민족부르조아의 반동적 저항을 진압하고 농촌 중농과 도시상공층의 동요, 불확실성을 견인 혹은 중립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의 영도 아래 농업 프롤레타리아와 인구의 압도적 다수인 반프롤레타리아(빈농)의 강고한 혁명적 동맹을 통하여 농촌 및 도시 소부르조아와 일정한 통일적 전선체제의 광범위한 형성'註20)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극좌적 경향'이라고 비판하면서 "금일 있어서 벌써 우리가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의 중요과업(완전독립과 토지혁명)을 완전해결은 커녕 이제 시초의 찻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처지"註21)라고 주장하면서 '반민주주의적 경향을 가진 반동단체(한국민주당 등), 대지주,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와 친일파들과 싸울 것을 주장한다.註22) 즉 그는 장안파와는 달리 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를 청산할 때까지 민족부르조아를 포함한 전민족적인 연합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레닌이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두가지 전술」에서 제시한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단계에서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라는 테제와 비교해보아도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레닌의 테제는 박헌영의 8월테제보다도 장안파의 주장에 훨씬 더 가깝다. 왜냐하면 레닌은 1848년 독일혁명을 마르크스가 분석하면서 어떻게 혁명을 가속화시켜 連續的(또는 同時的)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까지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러시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열기가 부르조아의 나약함을 극복하고, 혁명의 단계를 中層的으로 결정하면서 부르조아혁명을 넘어서까지 나갈 것이라고 보고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로 속히 넘어가게 만들기 위하여 그 전제조건인 제문제, 반제-반봉건투쟁으로 그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고 또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의 수립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확립이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족적 통일전선의 실현을 강조"註23)하면서, 그는 "일본제국주의 잔존세력 構築과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세력을 완전히 근멸-청소하기위한 --- 투쟁과업을 실행하지 않고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다"註24)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는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을 해방조선에서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독자적인 혁명단계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해방조선에서 어떠한 정치적 당파보다도 더욱 더 민족주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8월테제를 근거로할 때 박헌영은 '민족주의적'이었다. 구체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서 그가 취한 실천과 정치노선을 볼 때 그를 따라갈만큼 확고한 민족주의자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실천 속에서 드러난 이런 민족주의적인 속성은 미군정의 실체를 파악하면서부터는 더욱 더 강화되고 확실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민족주의자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은 실제 식민지적인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운동을 전개했던 한 혁명가가 도출해낸 해방을 향한 도정의 일부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조선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로 속히 넘어가게 만들기 위하여 그 전제조건인 제문제, 즉 반제-반봉건투쟁으로 그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고 또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의 수립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확립이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족적 통일전선의 실현을 강조"註25)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헌영이라는 사회주의라는 단호한 사상으로 무장된 역사적 인물의 양면성을 볼 수 있다. 즉 그의 사상과 현실의 갈등이다. 문제는 여기서 무엇이 그의 본질(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의 본질을 공산주의자 박헌영에 놓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의 사회적 역관계 속에서 엄연한 공산주의사회(사회주의사회)를 추구하는 정치적 당파의 지도자였고, 그의 실천행위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와 그의 사상성으로부터 논리적, 역사적으로 추론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민족주의적'이었다. 그것은 한 인간이 토대의 제약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가장 공산주의적인 실천 자체가 가장 민족주의적인 실천이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서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실체는 하나지만 그 속성은 무한한 것이다. 그리고 한 공산주의자에게 있어 그 속성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결정지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 해방 조선, 미군정 하의 조선이라는 상황이 그를 민족주의자로서 판단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나왔다는 의미에서 나는 박헌영을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라고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민족주의적'이라는 형용사가 '공산주의자'라는 실체를 규정지으면서 '박헌영 자체'를 역사적인 인물로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라는 판단은 해방 이후 왜곡되어 온 우리의 역사를 볼 때 훨씬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된다. 「보론」을 보면 뚜렷해지듯이 박헌영이 주장했던 일제청산 - 억압적인 국가기구의 청산이야 말로 현시대에 우리 민족, 즉 그 주체인 노동자 민중의 가장 큰 과제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미제국주의에 의한 종속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걸어 온 우리 민족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모색의 과정에서 기존 보수 우파와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글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는 박헌영의 노선에 대한 역사적인 비판이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글의 성격상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헌영에 대한 현시점에서의 평가와 반성은 없다. 둘째는 글 자체가 '박헌영을 민족주의자로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것에 촛점이 되면서 그런 측면을 너무 부각 - '과잉 결정'했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글이 전체적으로 그의 사상(정치노선)에 한정지어 살핌으로써 이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고 할 수 없는 정치적 실천(구체적인 정치적 사건들에 의한 그의 실제적인 행동들)과의 유기적인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이글은 8월테제에 나타난 '정치적 담화'와는 어느 정도 모순되게 나타나는 (이것을 '좌익적'이었다라고 김남식은 평가했다.) '실제 행동'을 극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는 데에 「보론」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註26)

후주 --------------------------------------------------

1) 김남식, 심지연 편저. 『박헌영 노선비판』(도서출판 두리, 1986, 서울), p.16.
2) 같은 책, 「(자료 8) 피의자 신문조서」, pp.94~98. (강조는 필자)
3) 같은 책, pp.20~21. 코민테른의 조공해체 결정내용은 다음과 같다. (1)지도부가 거의 지식계급과 학생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2)계급적 혁명당이 아니라 소부르조아 정당이며, (3)파벌싸움이 중요한 害黨的 요소라는 점을 지적하고, (4)과거를 청산하고 새 방향에서 당을 재건하라고 결정했다. (방인후, 『北韓朝鮮勞動黨의 形成과 發展』(고려대출판부, 1967), 같은 책, p.29에서 재인용)
4) 8월테제를 발표(45.8.20.)한 후위 정치상황, 특히 콤그룹의 반대세력인 장안파의 주장과 움직임 등을 이미 발표된 8월테제에 반영시켜 9월 25일에 발표한 것이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것이다. 이글에서 다루는 것은 '임무'이다.
5) 주3)을 참고할 것.
6) 같은 책, 박헌영, 「임무」, p.181. (강조는 필자)
7) 같은 책, 박헌영, 「10월 인민항쟁」, p.449.
8) 하지만 8월테제가 적용되던 이 시기(1945.8.15~1946.7.)는 시민사회에서 압도적 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좌익의 힘이 일제하에서 '과대성장된' 국가기구가 해체(파괴)되지 않음으로서 그 국가기구(미군정)에 의해 파괴되고 우익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던 기간이었다. 「보론」을 참고하기 바란다.
9) 박헌영은 미국의 대한정책이 처음부터 자유독립의 방향이 아니라 침략적인 것으로서, 독립을 원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점령하려는 것이며 반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 「人民에게 告함」(48.4.12.), 『박헌영 노선비판』, p.80에서 재인용. 강조는 필자)
10) 김남식, 『南勞黨 硏究』(돌베개, 1984, 서울), pp.235~236. (강조는 필자)
11) 박헌영의 생애에 대한 시기구분은 역사적인 사건에 의한 것보다도 박헌영 자신이 의 도했던 특정시기의 정치적 실천을 통해했다. 참고로 역사적인 사건에 의한 구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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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성, 『朴憲永論』(인간사랑, 1992, 서울), pp.32~42.
12) 같은 책, 박헌영,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9.25.), p.182. (강조는 필자)
13) 같은 책, 박헌영, 「朝鮮共産黨의 主張 - 朝鮮民族統一戰線結成에 對해」(1945.10.30.), p.202.
14) 앞의 책, p.202.
15) 같은 책, 「임무」, p.184.
16) 같은 책, 박헌영, 「朝鮮共産黨의 主張 - 朝鮮民族統一戰線結成에 對해」, p.203.
17) 앞의 책, p.203.
18) 같은 책, 박헌영,「임무」, p.195.
19) 전자는 장안당이 만들어지면서 발표된 것이고, 후자는 장안당이 재건위에 통합되어 조공이 재창당되던 날(45.9.15.) 발표된 것이다.
20) 같은 책, 박헌영,「임무」, p.194에서 재인용. (강조는 필자)
21) 앞의 책, p.182.
22) 앞의 책, p.194.
23) 앞의 책, p.195.
24) 같은 책, 박헌영, 「단결력으로 싸우자」(1945.11.15.) (강조는 필자)
25) 같은 책, 박헌영,「임무」, p.195. (강조는 필자)
26) 8월테제가 가지고 있는 토지혁명의 문제를 몸말에서는 다루지않았다. 그 이유는 토지혁명이라는 것을 두고 보면 다양한 견해가 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이글에서 다루려는 민족주의적인 풍모를 가진 박헌영이라는 주제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토지문제를 박헌영이 생각함에 있어서는 다소 모순된 주장을 스스로 전재하지만 부르조아혁명에서 나타나는 토지개혁 이상까지 나갔다는 것이고, 이것과 그의 실제적인 정치적인 실천을 근거로하여 박헌영을 좀 더 레닌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라는 테제와 근사한 수준까지를 추론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동유럽과 북한의 경험을 통해 볼 때 8월테제의 노성이 성공했다면 곧장은 아니더라도 인민민주주의 정권으로까지 발전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했다(실제 박헌영의 정치노선의 깊숙한 곳에는 이런 판단이 내재되어 있다). 이글에서는 그곳까지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보론」에서 실제 쓰여진 기본적인 관점은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의 가능성이라는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글에서는 그런 측면을 배제하려고 노력을 했다. 왜냐하면 이글에서 살피려는 것은 박헌영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것이지 사회구조나 변혁의 방향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측면까지 쓴다면 글의 양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보론」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이런 이유로 나는 박헌영 개인이 말하고, 썼던 1차 자료에만 충실하려고 노력을 했다. 따라서 「보론」과 이글에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1992년 고려대 최상룡교수의 민족주의론 레포트 표지
     ▲ 2008년 1월 이사짐 정리 중 발견한 최상룡교수의 '민족주의론' 레포트
         누렇게 변해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15년이 넘었다.

연꽃 - 내용 나눔 그림막대

남한 사회에서의 국가 형성 - 과대성장국가이론을 중심으로
1. 우리가 단순화시켜 생각한다면 “8•15로부터 한국전쟁이 완료되는 1953년까지의 시기는 ‘갑작스런’ 해방에 의해 식..
2008/03/14 23:36 2008/03/14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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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부터 <근대세계체제 1, 2, 3>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사놓은지는 몇년 지났는데 계속 이어 끝까지 읽은 적은 없다. 대충 필요한 부분이거나 아니면 관심이 가는 장을 찾아 읽다가 던져놓곤 하였다.

책이 97년에 출간된 것을 보니 군대를 제대하고 산 것 같은데 아마 '생일선물'로 받은 것 같다. 2만원짜리 3권을 한번에 사는 경우는 이럴 때가 아니곤 여간해선 없다. 또 읽고는 싶었어도 꼭 사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드는 것이 아니면 비싸니 '선물로 받아야지'하고 생각하고 뒤로 미뤄둔다. 며칠 전 생일에도 이런 식으로 책을 한권 받았는데, 한권 가격(59,000원, 1200페이지가 넘는다!)이 만만찮아 둘이 함께 사달라고 했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1>이다. 2권은 내년에나 손에 들어오지 않은까?

아케이드 프로젝트 1 (양장합본) - 10점
발터 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새물결

왜 <근대세계체제>를 읽기 시작했지? 방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에 책이 꽂혀 있어서였나. 책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버릇이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쓴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책이 한국어로 출판되기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에 다닐 때,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함께 잦아들고 있었다. 아마 3학년 아니면 4학년(91~92년) 때였나보다. 한참 혼자서 국가론과 사회구성체(사회형성체) 논쟁을 관련 논문들을 읽고 있었다. 그때 한국 사회성격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신식민지'는 개념이 담고있는 의미나 한국에서 전개된 논쟁, 운동의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다시 남아메리카에서 발전한 '종속적'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쪽도 그리 맞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종속적'이라는 개념은 신식민지와 같이 일본과 조선, 미국과 한국 등의 한국가와 다른 한국가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더 낮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국제적인 경제현상은 다자간의 관계이며, 어떤 층위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요즘의 BRICs처럼 당시에 NICs(아시아 신흥공업국)에 대한 논의들이 많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종속적이라는 개념을 국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주도적이지 못한 위치에 있는 일군의 국가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종속적이라는 개념이 마음에 들지않았던 것은 소위 '제국주의' 국가들도 전체/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보면 얼마나 자율적일까 하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운명도 이 체제에 '의존적'이지 않은가? 자신들의 운명이 '종속적' 상태에 있는 국가들에 달려있지 않은가? 이때 한국 자본주의에 '개량의 물적 기반'이 있는가, 없는가의 논쟁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것의 밑에는 한국 자본주의가 일본, 미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다국적 자본)처럼, 수준의 문제이긴 하지만,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것은 파시즘 체제가 아닌 민주적 체제로 이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운명도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 의존적 이라는 말은 민주적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은 새로운 시장(신민지 또는 신식민지에 있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을 통해서만 갖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처음 월러스틴의 책을 이곳 저곳의 논문에서 짜집기하듯 읽었다. 역사적으로 자본의가 태어날 때부터 한 국가가 아닌 '세계경제'를 배경으로 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신식민지, 종속적, 이런 것보다는 공간적 은유인 주변부, 또는 반주변부라는 개념이 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같다.
 
<근대세계체제>는 '1450년 당시에 유럽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등장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체제제는 두 가지 핵심적인 제도, 즉 어느 일정지역 안에 자리잡은 "세계적" 범위의 분업과 관료제적인 국가기구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경제는 세 지역, 반주변부(semiperiphery), 핵심부(core), 주변부(periphery)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나뉜다.'(p.106)고 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나는 월러스틴이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과 어떤 주의, 주장에 헌신하는 것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어떤 주의, 주장에 헌신하지 않는 사회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과학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한다.(p.25)
그리고 "진리는 변화하는데, 그것은 사회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어진 시간에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동시대적이다. 심지어 지나간 것까지도 그렇다. 그리고 현재 안에서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배경, 우리가 받은 훈련, 우리의 개성과 사회적 역할, 그리고 우리가 그 속에서 활동하는 구조화된 압력들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이다."라고 말한다.(p.26)
따라서 "객과성이란, 전체 사회체제의 한 함수이다. 사회체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특정한 종류의 연구활동이 특정 집단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한 그 연구결과는 이 특정 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향될 것이다. 객관성이란, 이러한 활동이 세계체제의 모든 주요 집단에 기반을 둔 사람에 의해서 균형 있게 수행되도록 해주는, 사회적 투자 분배의 벡터이다. 객관성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객관적인 사회과학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이 가까운 장래에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목표는 아니다."(p.27)

이렇게 월러스틴의 이야기를 쓰게된 동기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근 한겨레신문에서 제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특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특집의 내용은 위 '사회구성체 논쟁'의 21세기적 형식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한겨레-지식논쟁
한겨레신문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① 조정환, 왜 제국인가 - 제국주의는 죽었다, 21세기는 지구  제국 시대
   ② 정성진, 왜 제국주의인가 - '지구제국'은 허상이다, 제국주의 되레 격화
   ③ 이진경, 제3의 시각 '과잉제국주의' - 제국주의는 과거형, 지구제국은 미래형

조정환, 정성진, 이진경의 주장을 읽으면서 불현듯 월러스틴이 <근대세계체제>에서 쓴 글이 생각났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독특한 특징은, 경제적 결정은 주로 세계경제를 지향한 반면, 정치적 결정은 주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더 작은 구조들-세계경제 내의 국가들(민족국가, 도시국가, 제국)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제 및 정치의 이중 지향성 또는 "차별성"은 여러 집단들의 자기 정체성에 관한, 즉 집단 이해관계의 합당한 표명에 관한 혼란과 신비화의 근원이다."(p.109)
경제적인 세계화를 기본으로 사태를 판단하는 조정환과 상대적으로 정치적 국가를 중시하는 정성진은 이런 혼란과 신비화의 도정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나는 감성적으로는 여전히 정성진에 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진경의 지적처럼 유럽연합 등을 살펴볼 때, "경제 및 정치의 이중 지향성"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합류하고, 전지구적인 제국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현재 '경향적'으로 이런쪽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성적으로는 이진경을 지지한다.

(요즘은 이진경을 지지하는 판단에 회의가 든다. 경향성이란 말도 여러 가지 잠재성 중에 하나이고, 어떤 조건에서는 다른 것이 나타날 수가 있다. 또 국가라는 물질적 실재가 언제 없어질까? 정성진의 주장에 '감성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지만 감성 자체가 합리적 이성의 기초이기도 하다. 2009.3.20 update)

이진경의 '과잉'제국주의에서 과잉의 의미를 어떻게 볼까? 국가론에서 보면 함자 알라비(맞나?)가 과대성장국가이론을 말하는데, 그때의 '과잉'과 친연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91년 여름 내내 나는 과대성장국가이론을 한국에 적용하여 분석하는 작업을 했었다. 그리고 에세이 한편을 썼는데 언제가 이것도 posting을 하겠다.) 한 국가차원에서 상부구조가 과잉성장한다는 것과 여러 국가들의 연합을 통해서 제국주의가 과잉(성장)하다는 것. 그런데 전자가 그렇게 되기에 필요한 역사적 배경(식민경험이라는)이 있었던 것처럼 후자가 성립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제국주의간의 경쟁, 아니면... 이진경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장기 16세기'의 유럽과 제국 중국을 비교하면서 자본주의의 탄생을 살피는데, 제국이 자본주의 발전을 담보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과거 역사에서의 제국과 조정환의 제국은 어떻게 다른가? 경제와 정치의 분절(이중 지향성)이 경제적 착취구조를 감싸는 이데올로기적(신비화) 기제는 아닌가? 이것이 합치될 때는 계급투쟁에서 피아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고 있다.

여하튼 나는 "진리는 변화하는데, 그것은 사회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어진 시간에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동시대적이다. 심지어 지나간 것까지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월러스틴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사회체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특정한 종류의 연구활동이 특정 집단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한 그 연구결과는 이 특정 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향될 것"이며 이를 정정하기 위해서는 알뛰세르의 말처럼 막대를 반대로 구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대세계체제 1 - 10점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나종일 외 옮김/까치글방
근대세계체제 2 - 10점
중상주의와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 1600-1750년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유재건 외 옮김/까치글방
근대세계체제 3 - 10점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의 두 번째 시대 1730-1840년대
이매뉴얼
2007/09/15 10:17 2007/09/1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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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섀도우 포스터
7월 29일 댄싱섀도우를 봤다. 댄싱섀도우는 차범석의 <산불>을 뮤지컬로 만든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나쉬탈라, 마마 아스터, 신다, 솔로몬이고 태양군(太陽軍)과 달군(月軍)의 전쟁, 그리고 두 군대가 연합한 후 (가상의) 외국군대와의 전쟁이란 시대적 상황 속에 있는 산촌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사실 뮤지컬보다 뮤직컬로 만들어지기 전의 <산불>의 줄거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잘 다가온다. 점례, 사월, 인텔리인 규복, 그리고 6.25전쟁 시 소백산맥에의 어느 산골마을, 밤을 지배하는 빨치산과 낮을 지배하는 국군.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칙들의 대립

여기서 이런 줄거리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뮤지컬을 보면서 나는 태양군 대 달군, 북한과 남한,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칙들의 대립을 보았다. 이것은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지않을까? 원칙과 이상에는 나쉬탈라가 정점에 서있고, 현실('삶'이라고 해야 할까?)의 정점에는 마마 아스터가 있다. 그리고 그사이에 현실주의에 가까운 이상주의자인 솔로몬이, 또 이상주의에 가까운 현실주의자인 신다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도 그 극단 사이 어디엔가 서있을 것이다.

그런데, 희망의 원천은 무엇일까?

댄싱섀도우의 주제의식은 희망일 것이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어지는 희망! 그런데,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미래의 어느 시점에 우리가 원하던 어느 상태에 도달할 것을 기대하는 것일까? 하지만 실제 희망의 모습은 이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어떤 희망도-희망에 대한 이야기도-미래가 아닌 현재의 비극성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행동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은 새로운 세계가, 다가올 미래의 상태가 아닌 이미 존재하고 하고 있는 세계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희망-오지않은 미래-이 아닌 엄연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세계를 하나의 원칙으로서 주장하고, 몸으로 만들며 그 세계에서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주의의 원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를 보면 '공산주의는 현실 노동운동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도 이런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댄싱섀도우에서 나쉬탈라와 솔로몬의 희망은 복고적(과거에 얽매여있다는 의미로)이기 조차하다.

나는 궁극적으로 이상주의자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주의는 현실의 모순, 삶의 어려움의 반영이다. 이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넘어서려는 가장 '현실주의자'이다. 다만 현실을 넘어선 세계가 어떤 세계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이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따라서 공상(다가올 미래라기 보다 새롭게 만들 세상)과 과학(현실 분석) 속에서 좌충우돌해야 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현재의 어려움과 신념, 이들을 추종하하는 대중들의 시선은 이런 좌충우돌, 내면적인 갈등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하튼 가야만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베르그송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삶이란, 베르그송이 장벽을 돌파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사실 홍수처럼 밀려오는 야만성이며 사회적인 모임 속에서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자기주장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들의 이런 행동이 선택할 수 없는, 따라서 피할 수 없는 자기 운명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하고 슬플 따름이다.

마마 아스터의 입에서 튀어나온 희망이란 단어를 볼때 그렇다면 희망은 현실주의자의 몫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주의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희망'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뱉는 말일 뿐이다. 댄싱섀도우에서 보면 딸인 신다가 자궁 속의 아이를 버리고, 숲을 버리고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딸을 설득해서 살려놓으려는 아주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오는 희망이다. 이들이 말하는 희망이란 비루한 현실을 인정하고 목숨을 유지하자는 판단에 근거한다. 이렇다면 삶이란 욕체적 생명, 종족 보존 이외에 무엇일까? 하지만 우리가 만든 문화가 인간적인 삶이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고 가르키며 삶, 생존, 또는 거창하게 생명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이것은 '현실에 만족하고 살어라, 돼지처럼!',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래도 살아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 역시 독특한 정신문명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초인'이 아닌 생물적 존재인 인간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가 얽혀져 만들어진 '자궁 속의 태아',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느쪽에도 서지못하는 기회주의자의 몫이다. 희망은 "이곳을 떠나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절망"(현실주의자의 현실)이거나, 꿈이 이뤄질까 물어오는 "회의의 핏줄기에 가볍게 붙어 기생하는" 것(이상주의자의 이상)이거나, 이 둘 모두에게 있는 "몰락의 자각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는 극 속에서
댄싱섀도우
전형화된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가 아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회주의자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자체의 비극적 기반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주제는 감동으로 다가오면서 어디에서 오는지 모를 '불안'감과 언젠가 내가 겪은듯한 기식감으로 몸과 마음을 '뒤틀'게 만든다.

댄싱섀도우, 상기된 과거들

1992년 사북탄광
댄싱섀도우를 보면서 오래전에 쓴 2편의 시와 편지글 형식의 일기가 떠올랐다. 모두 90년대의 세계를 대변한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와 같다고, 자기동일성을 주장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뮤지컬(연극)의 또하나의 기능은 상기(想起)시키는 것이다.

내가 불현듯 1991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말까지 있었던 정선군 임계면이 떠오른 것은 뮤지컬의 소품인 사과상자 덮어놓은 듯한 누추한 집들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갈등구조 때문이다. 그 집들과 똑같은 집들을 그때 고한과 사북에서 봤고, 그런 갈등을 지금도 겪으며 살고있다. 사진은 댄싱섀도우의 한장면이고, 바로 옆의 그림은 사북에서 광부들이 '살았던' 집을 그린 것이다.

1992년 3월 3일 화요일

아침도 어제 먹다남은 식빵 한 조각으로 떼웠습니다. 전화를 신청하는데 돈을 다쓰고 2,000원이 남아 그것으로 빵과 우유를 산 것입니다. 아침 일찍 낙천리를 가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이른 것 같아 10시에 출발했습니다. ㅈ씨에게 신문배달하는 자전거를 빌려타고요. 사실 10시에 출발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자전거를 아침 신문 돌리며 쓰기 때문이죠. 이곳은 동아일보 3월3일자가 아침에 나옵니다.(1992년 동아일보는 석간이었다.)

자전거로 한 30분 걸렸습니다. 그런데 길이 비포장이라 흙탕물이 튀겨 신, 양말, 바지, 잠바 등부분까지 다 버렸습니다. 어제 말했듯이 가면서 내를 끼고 또 산 밑으로 집이 띄엄 띄엄 있습니다. 그리고 고개가 나오죠. 그것을 넘어야 낙천리입니다.

낙천리에는 당원이 삽니다. ㄴ씨라고 교회 집사이고 농사를 짓습니다. 진짜 촌사람같이 꺼벙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도 좀 꿈뜨게합니다. 낙천리에서 택백가는 시외버스 길 옆으로 가게가 있고 그 집에 공중전화가 달려있습니다. 그 집이 이 동네의 모든 정보가 집중되는 곳인 것 같습니다. 방에 40~50대의 아저씨들이 하나 차있고 그 집 둘레의 햇빛을 따라 임계에 나올 화장한 아줌마들이 모여 있습니다.

여기서 좋았던 것은 젊은 30대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집에 선전물을 돌리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정운환씨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민중당이 뭐냐?"하는데 "정운환씨가 위원장 아냐?"하고 한 사람이 받았죠. 나는 신이나 "맞습니다......"이라고 말했습니다. 젊은이가 났습니다.

버스 길가로 낙천1리고 "樂川"을 건너 산 골짜기에 형성된 촌락으로 가면 낙천2천입니다. 이곳에는 젊은이가 거의 없고 낮에도 소여물을 썰거나 아니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녹화된 방송을 트는 유선방송을 보고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 처음 보이는 흰건물이 낙천교회입니다. ㄱ씨가 전도사이고 ㄴ씨가 집사죠.

ㄱ씨는 둥근 얼굴에 안경을 쓰고 작은 못집의 퉁퉁한 사람입니다. 연고자 카드에는 '적극적 지지자'라고 되어 있는데, 오늘 ㄴ씨와 만나 이야기하니 '아직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실 아직 모릅니다. 한번 정도 만나보고 정선사무실에서 분류한 것이니까요. 좀 더 지켜보고 만나봐야겠지요. 교회가 보여 다리를 건너는데 교회가 등지고 있는 산 모퉁이를 돌아 한 30여집이 있었습니다.

1992년 임계 낙천리
한집 지붕이 보여 찾아가면 또 한 집이 보이고 그런 식이지요. 그리고 한 5~6미터씩, 또는 10미터씩 떨어져 있는 집을 두고 가기가 그래서 [선거 홍보물을] 돌리다 보면 몇개 골짜기를 헤메는 겁니다. 낙천2리를 돌리고 전도사에게 ㄴ씨 집을 물어 찾아갔습니다. ㄴ씨는 임계에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었습니다.

ㄴ씨와 사랑방 좌담회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한 5만원 투자해서 술 좀 사고 윷놀이를 하면 사람이 올까 오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민주자유당 후보인] 박우병씨가 낙천3리에는 10만원을 주고가서 마을 잔치를 3일간 했다고 합니다. 이에 나는 "우리당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과일하고 음료수, 과자를 좀 사서 해보자"고 했습니다. ㄴ씨가 "교인 한 50여명을 초대하면 늙은이는 안오고 20~30명 정도가 올거다."라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후보와 유권자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ㄴ씨를 이지역의 진보를 위한 정치적 구심으로 서게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당 활동과 함께! 이런 하나 하나의 작업이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에게 정치적 교육도 필요합니다. 아주 많은 정치적으로 교육받은 사람을 이땅은 요구합니다. [돌아오는데] 3~4시간 헤멘듯 합니다.

ㅇ씨가 태백에서 왔나 봅니다. 그리고 오늘 되리라던 전화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울로 전화를 하려다 그만 두었습니다. 오후에는 좀 쉬다가 (다리가 아픕니다) ㅇ씨가 ㄱ씨를 소개해줘 술을 한잔 했습니다. 그러다 다른 곳에서 ㅈ씨가 술을 한다고해 그곳으로 가 자리를 합쳤습니다. 그곳에서 ㄱ씨, ㅇ씨, ㅇ씨 등과 정식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이죠. 그리고 어떤 젊은 사람이 거기서 나오는데 "힘들게 일한다는 것을 안다. 수고한다"라고 할 때, 힘이 났습니다. 인사치례일지라도 말입니다.

좀 더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계라도"에 대해서. 그리고 "보안관 ㅇ"씨에 대해서. 이것은 내일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ㅂ이 씁니다

추신: 오늘은 터미널에서 차에 올라 선전지를 돌렸습니다. 뻔뻔하게요. 언젠가 지붕의 모습도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 술자리에서 있던 것하고요. <1992.3.3>

     태생

여지껏 악다구니도 없이 쉽게
겁 먹고 무너져 내렸다 비겁을 참지 못한
심장만 감정에 복받쳐 덜컹거렸고 머리는
가난이 몸에 밴 어머니의 처세술과
아버지가 남겨준 우유부단한 이상에 감사했다
나는 기회주의와 이상주의의 혼혈아였다
어머니의 인생에는 여름 한낮 김 매며
속살까지 검게 탄 평생 갈 화상이 있었고
그걸 보며 자란 가슴 깊숙히에는
가난에 대인 자국이 있었다 아버지의 평생은
제 한몸도 못가눌 처지에 짐을 진 어두운 여름밤
전등 불빛 속으로 날아든 풍뎅이의 좌충우돌,
나의 가슴 속 한 구석에는 날개 꺽인
지친 희망의 버둥거림이 있었다
가슴 속 희망이 버둥거릴 때마다
가난에 대인 화상이 쓸려 내내 비명을 질렀고
그래도 언제나 덜컹대며 뛰는 붉은 심장은
피비린내 질펀한 가슴 속에서 이젠
끝장을 보자고 싸워댔다 칼에 배인 흉터
세월에 깊게 패여 주름이 되고 썩은 피
흐르던 고랑에서 겁 없이 풀이 자랐다
                                                  <1995.8.13>

    불안한 희망
     - 1997년 4월 30일


투명하게, 투명하게 살려는 것은 어려운 것일까
의심을 하며 내심 불안해 했다
언제나 꿈 꿔온 세상은 불안스럽게 흔들리고
그전에 내가 먼저 흔들리며 주저하고 머뭇거렸다

삶의 투명성이나 정직성을 믿지 못하겠다
하지만 투명한 세상를 만들고 싶다는
믿기 힘든 생각이 내 몸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세상은 너무 처참한 모습이다
떠날 수 있다면 벌써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이곳을 떠나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절망이
불안하게도 희망이 된다

필연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이곳에서 누가 자유로운 수 있을까
회의의 핏줄기가 폭풍우가 되어
가볍게 붙어 기생하는 희망을
몸 속에서 쓸어내버리려 한다

지난 여름 뿌리채 뽑혀 쓸려내려가던
나무둥치와 돼지와 소, 희망을 보았다
꿈 꾸던 자리엔 쓸쓸한 폐허의 자취만이 남고
강변엔 도깨비 불만 날아 도깨비 불만 날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밤새 떨며 어둠 속에
파랗게 반짝이며 갈피를 못 잡는, 도깨비 불
갈피를 못잡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엇이 남았을까 마음의 빈자리에는
파헤쳐진 무덤의 볼상사나운 자취
그 자릴 차지한 절망의 가시덩굴들
일상의 폭발하는 파편에 박혀
불구가 되어버린 머리와 뒤틀린 몸일까
희망을, 신념을 포기 못하는 것은
차라리 절망의 두려움이었다
이 세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몰락의 자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불안한 희망을 갖고
불안한 현재를 생각해 보면
투명하게, 투명하게 살려는 것은 어려운 것일까
의심을 하며 내심 또 불안해 한다
강가에는 밤새 도깨비 불만 날고 도깨비 불만 날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밤새 떨며 어둠 속에
기다린다, 절망을 먹고 자라나는 불안한 희망
                                                      <1997.5.1>

과거들이 현재의 내 몸 속에서 불안하게 숨을 쉬고 있다. 결코 지금 만날 수 없는 '미래는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 희망처럼!

총선에서 지고 임계를 떠나면서 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찾아갈 것을 약속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임계에서 한 약속은 아직까지도 가슴에 쌓여 빚으로 남아있다. 그때 그분들이 약속을 모두 잊었을지 몰라도 나의 핏 속에 희망이나 꿈이라는 단어가 남아 흐르는 동안은 계속 거친 숨을 내쉬면서 살아 꿈틀댈 것이다. 사실 그것은 변치않겠다는, 언젠가 돌아가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2007/07/31 15:36 2007/07/3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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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유목민족들이 만들어낸 세계

툰유쿠크의 비문과 '비분강개'한 문체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돌궐 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p.57)

나는 최근 이 이야기를 두번 들었다. 한번은 신문에서 읽은 것 같고 다른 한번은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이다. 이 이야기를 두번 듣는 사이에 이책을 샀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유목민 이야기 - 4점
김종래 지음/꿈엔들(꿈&들)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뢰즈의 <천의 고원>과 이책에 대한 해석인 이진경의 <노마디즘1,2>를 읽으면서이다. 이 책에서는 유목민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노마디즘과 탈주의 철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진경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더 많았었는데 최근 일어난 두번의 우연한 만남 때문에 김종래기자의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게 되었다. <유목민 이야기>를 집어들은 후 내용보다도 문체(style)의 장중함이 더 깊이 다가왔다. 그런데 문체의 장중함은 아주 비극적인 내용들과 뒤섞여 나오면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기상을 끌어내는 듯 했다. 그러면서 읽지도 않은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이 생각난 것은 왜 일까? 김훈의 예전 직업과 김종래의 지금 직업이 겹쳐지면서 '기자들이 신문이 아닌,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쓰는 문체'가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 이야기>의 부제는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인데 과거의 유목주의가 디지털 사회와 만나면서 새로운 형태로 코드화되는 듯하다. 나는 톤유쿠크의 비문을 보면서 다시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말한 기동전과 진지전이 떠올랐고, 유라시아 초원과 세계적인 대제국을 만들어 냈던 유목민족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묻게 되었다.

과거의 역사를 살피는 이유

그람시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이동하면 반드시 망할 것이며, 성을 쌓고 사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라고 뒤집어 생각해야 하는가? 사실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것(역사)를 살피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를 되뇌일려고 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 있는 맥락(context)나 구조(structure)를 보고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톤유쿠크의 비문은 척박한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리저리 옮겨다여야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초원에 성을 쌓고 살려고 한다면 양들, 말들과 함께 굶어죽을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톤유쿠크가 유목민인 자신의 민족에게 남긴 이야기인 것이다.

그람시의 이야기를 덧붙이면 시민사회가 발전이 안된 러시아에서는 레닌의 기동전(유목민의 전술과 비슷한)을 통해 혁명에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시민사회(성곽, 진지와 요새, 보루)가 발전한 서유럽에서는 기동전으로 휩쓸고 지나간다해도 그 뒷쪽에 여전히 강고한 성곽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순간적으로 빼앗을 수는 있으되 계속해서 지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목민 이야기>에 나오는 원제국의 운명도 이런 틀로 이해할 수 있지않을까? 물론 자본주의 국가체제가 아니긴 하지만 그람시의 틀을 하나의 은유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기동전 - 진지전 - 화력전


1990년 걸프전을 보면서, 그리고 현존하던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력전'에 대해여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진지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기동하는 부대를 화력으로 지원하거나 화력으로 기동로를 봉쇄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것은 당시 유행하던 그람시의 책들과 한참 읽기 시작하던 알뛰세르의 책들 영향도 있었다. 1996년 군대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하면서 화력과 기동에 기반한 군사전술, 전략과 함께 이런 생각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지금 <유목민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정보의 디지털화는 (하나의 개념적 은유인) 화력전의 범위를 전세계화 한다. 인터넷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게 한다는 것은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동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정보(이 정보들 모두 객관적 투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것들이다)인데, 이 정보는 특정지점(진지)에서 출발한다.

인터넷 내에서도 정보의 소통은 평등한 것이 아니며 위계적이며 제국이 지배한다. 제국의 언어(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형태인 언어)가 아닌 변방의 언어로는 이 세계를 지배하기 어렵다. 구글의 검색은 원격조정되거나 자동항법장치를 갖춘 스마트 폭탄처럼 정확하게 목표를 명중시킨다. 이렇게 할 때 구글의 거대한 검색DB는 진지인 것이다. 구글의 거대한 검색DB에 매시간 새로운 데이터를 긁어오는 로봇(crawler)들은 기동하는 유목민처럼 전세계의 데이터 베이스를 떠돈다.
 
구글이 제국이라면 제국이 된데는 이렇게 유목이 아닌 진지가 있는 것이다. 또 한국에서 네이버가 제국이라면 마찮가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디지털 노마디즘 운운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착취할 수 있게 만들어진 제국(정보사회)에 대한 나팔수 노릇을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내 블로그의 제목도 디지털 노마디즘이다.) 언젠가 화력전에 기댄 에세이를 하나 써야겠다. 이런 생각은 이미 10년전에 갖기 시작했지만!

시간 대 장소: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

유목민은 정착민과 달리 시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사고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개를 묶는 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끈으로 개의 목을 걸어 끈의 길이로 개의 행동반경을 통제한다. 그런데 몽골에서는 두 뼘도 안되는 끈을 가지고 앞발 중 하나의 관절을 반으로 접어서 끈으로 칭칭 감아 절름발이 걸음으로 만든다. 우리가 해오던 방식이 공간을 제한시켜 개의 활동력을 구속하는 것이라면, 유목민의 것은 시간(개의 속도)을 구속하여 개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이다.(p.93)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은 결국 행동을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행동해봐야 한다. 세계는 한가지 얼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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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2 17:00 2007/07/22 17:00
From. 코코도르 2007/07/25 09:40Delete / ModifyReply
이런 엄청난 글에 처음 댓글 단다는게 신기합니다. 어중간하게 떠돌던 생각이 정돈된 글을 보니 놀랍고요. 늘 징기스칸 얘기 들을 때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궁금했었는데 침공은 할 있지만 지배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일부 설명 해 주네요. 근데 또 노마드를 보게된 처음 이유인 "성안에 있기"의 위험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니 결국은 ?
dckorea 2007/08/05 14:54Delete / Modify
그래서 화력전을 생각하는 겁니다. 화력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죠. 쉽게 떠오르는 것이 소총부터 대륙간 탄도 미사일까지 있습니다. 화력의 특징은 특정한 진지에서 출발하여 적진(또는 적의 몸안)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요즘은 진지가 움직이죠. 핵항공모함이나 핵잠수함 등등은 전략적입니다. 무장하고 있는 화력을 사용할 경우 작은 나라정도는 쑥대밭을 만들 수 있죠. 전통적인 진지전이 성과 참호, 그리고 그것을 채운 사람(병사)의 체계였다면 지금은 아닙니다. 진지에는 다른 것, 화력으로 채워져 있죠. 이 화력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순식간에 움직일 수 있습니다. 기갑부대, 자주포부대, 미사일부대, 항공기, 전자전 등등을 생각하면 됩니다. 전략과 전술이 전쟁에서 나온 것처럼 최신의 전쟁체계를 끌어다 기업, 정치 등의 전략, 전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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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 8점
켄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푸른역사

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만들어진 자유주의 개념은 아주 "공화주의"적이다. "인간 개개인의 육체가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혹은 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처럼, 국민과 국가의 조직체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원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 의지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데 제약받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이다, 자유국가란 자유로운 인격체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가라는 뜻이다. 즉 자유국가란 정치의 행위가 하나의 전체로서의 그 구성원들의 의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p.81)"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자유주의는 "사적 개인으로서 침해받을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형성된 자유주의 개념은 "순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타인의 혹은 외부의 간섭이 없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며, "정치 제도와도 상관없이 어떤 체제하에서도 느릴 수 있는 것"이라는 현재의 개념이 아니었다. 현재 사용되는 이런 의미의 자유는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는 자유인 못지않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7세기 공화주의적인 자유주의 개념을 기준으로 현재, 또는 과거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많은 문제들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 국주의의 식민지배를 한국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해서 엄격하게 한국민은 모두 노예상태였으며, 주인(일본)의 시혜없이는 자신의 의지대로는 무엇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아닌 자유주의적인 시각으로도.

60~80년대의 군부정치에 대해서도 똑같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단 전제군주와 같이 한사람만 자유로운 체제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독재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국민들이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의 발전과 같은 경제성장 논리, 현재의 신자유주의를 공화주의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반대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부르조아 정치학 비판"을 통해 비판적인 국가이론을 정립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영국 유학을 생각한적이 있다. 그리고 계급이 없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모든 개인이 자유로운 사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단순하게 진행된 논리, 생각은 아니지만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이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공화국"은 궁극적으로 계급이 사멸한 국가이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를 제약하는 조건들의 제거를 숙고하는 곳에는 경제적 지배관계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개인의 재산행사의 자유, 사적자유의 영역이 아닌 '의지의 자유'로 읽을 때, 이런 개인들의 의지의 자유로운 발현을 제약하는 사회경제적인 권력구조가 존재할 때 그것 자체가 노예상태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때, 현재의 자유를 포장하고 있는 형식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로 변화될 수 있게된다.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형식성을 탈피한 실질적인 경제적 민주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17세기의 혁명적인 자유주의 이론이 현재의 미국독립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기반한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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