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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해당되는 글 1건
최상룡 교수 - 민족주의론 강의, 1992년 2학기
1992년 최상룡교수의 민족주의론을 들으며 제출한 레포트이다. 몇가지 과제 중 내가 선택한 것은 '박헌영은 민족주의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였다. 최상룡교수는 박헌영을 민족주의자로 묘사했는데 아래 글은 그에 대한 반론 성격으로 씌어졌다. 수업 중 아래 글을 발표하자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정외과 수업에 타과생이 와서 담당 교수와 다른 논조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논의 전개했고, 그 결과 레포트는 폰트 10의 크기로 A4지 15장 분량으로 1시간 동안 발제하고 토론하기에 '아주 긴' 내용이었다.

민족주의론은 대학 마지막 학기에 들은 수업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이 레포트는 대학 4년동안 공부한 결과의 결산인듯도 싶다. 당찬 '반론'에 최상룡교수는 재미있어하면서 좋아했고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러면서 나는 이 수업 덕에 우리의 현대사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시간적으로 보면 보론으로 작성된
「남한 사회에서의 국가 형성 - 과대성장국가이론을 중심으로」가 1991년 여름에 씌어졌고, 아래 글은 1992년 가을에 썼다. 앞의 글을 안읽었다면 그것을 먼저 읽는 것이 좋다.

박헌영의 8월테제의 Nationalism적인 요소

머리말

처음에는 '민족주의자로서의 박헌영이란 판단은 가능한가'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에 대해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러한 접근방법이 문제의식을 극명하게 한다는 잇점은 있지만, 반대로 그의 삶을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에는 다소 장애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으로 무장된,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싸워 온 한 혁명가를 민족주의라는 '잣대'를 가지고 재단하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글에서는 먼저 역사적인 서술방식을 채택하여 그의 삶을 간략히 시기별로 정리하고 그 역사성(구체적 상황의 전개과정)에 기반하여 1945년 8월 15일 조선의 해방부터 1946년 7월 신전술이 제기될 때까지 그의 사상적, 실천적 기조를 이룬 8월테제를 분석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서술 자체가 그의 8월테제와 신전술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극명하다. 왜냐하면 박헌영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지 해방 직후의 경제, 정치, 사회적 구조를 분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매꾸려고 박헌영을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되는 글을 이 글의 뒤 부분에 「보론」식으로 첨가했다.

먼저 나는 앞에서 말했듯이 박헌영의 개인사를 서론 부분에서 살피고, 본론에서는 짧지만 8월테제와, 그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그밖의 문건들을 가지고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박헌영을 우리가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제시해보겠다.

제1기 출생과 성장과정 (1900~1920)

박헌영은 1900년 5월 1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 금광마을에서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이학규)은 금광마을 근처에서 주막을 하면서 생활을 했다. 그의 집안은 '중농(동산과 부동산을 합쳐 당시 돈 약 1만원 정도)' 정도로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1운동이 났던 1919년 졸업을 했다. 3.1운동에 그가 참가했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1947년 2월 24일 발표한 글인 「3.1운동의 의의와 그 교훈」에서는 이 운동을 반제민족해방투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민족대표의 투항주의와 무저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제2기 사회주의 사상의 학습과 사회주의 선전 (1920~1932)

그 후 박헌영은 1920년 일본을 거쳐서 상해로 가서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약 6개월간 학습하고, 1921년 4월경부터 상해에 있던 '사회주의연구소'에 드나들면서 공상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박헌영은 그곳에서 사회주의를 계속 연구하면서 여운형과도 친교를 맺는다. 그 당시 그는 '사회주의라는 것은 사회가 모든 사람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註1)이라고 생각해 좋은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1921년 9월에는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하지만 1922년 3월에 사회주의 선전을 위해 귀국할 것을 결심하고 자퇴를 한 후에 귀국하던 중에 체포(1922.4)되어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 받았다.

1924년 1월에 출옥한 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약 6개월간(1924.4~10)하다가 신문사를 나와서 집에서 문필생활을 하면서 개벽지에 기고를 했다. 그때 발표한 글이 「국제청년 데이의 의의」(1924.8.18.)와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1925.10.29.)이다.
 
그리고 1925년 4월 18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의(이하 공청)를 결성한다. 공청은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는 별개 조직으로서 공산주의를 선전, 교양하는 기관으로서 단지 조공과 이념상의 상호연락관계를 유지했다. 즉 조공이 당적인 차원의 운동이었다면 공청은 그보다 낮은 단계의 대중운동 차원에 있었던 것이다. 공청은 25월 12월 박헌영이 신의주경찰서에서 한 진술을 토대로 해서 살펴 볼 때 그가 22년 귀국 시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 선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건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 했다.

"1924년 1월에 출감하였으나 전날의 사명은 결코 방기할 수 없다는 결의 아래, 경성에서 사회주의 연구를 계속했다. --- 나는 경성에서 바삐 다니던 중, 자신과 같은 뜻을 지닌 자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고 드디어 1925년 4월 19일 내 집에 --- 사람을 모아 고려공산청년회의를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註2)

조공은 1925년 4월 27일 창당되었는 데 박헌영은 해방 때까지 정식으로 입당 수송을 밟아 공산당원이 될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의 엄중한 탄압과 1928년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결정하는 등 외적 조건이 나빳기 때문이다.註3)

박헌영은 공청사건으로 1925년 12월 검거되어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되어 28년 8월에 국외로 탈출하여 29년 6월 모스크바로 가서 마르크스학원에 입학하여 러시아어와 공산주의를 연구하다가 중도에 자퇴하고 브라디보스톡으로 와서 조선일 초등교사를 하였다.

제3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 (1932~1946)

32년 12월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공산당 재건 운동을 준비하다가 이것이 밝혀져 33년 상해에서 체포당해 국내로 압송되서 6년간 복역 후 39년에 출옥했다. 그후 박헌영은 콤그룹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41년 6월과 12월에 관련자가 대부분 검거되자 광주 벽돌 공장에 피신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숨어서 지냈다.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박헌영은 20일에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이하 재건위)를 조직하고 재건위의 정치노선과 활동방침으로 8월테제-「현정세와 우리의 임무」(이하 임무)註4)를 발표한다. 재건위의 의미는 25년 창당되어 28년 해체된註5) 조공을 재조직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서 이는 과거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당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45년 9월 15일에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선포한다. 이것은 이전의 서울계, ML계, 화요계가 만든 '장안당'을 흡수, 통일된 당 형태를 조직하는 형태를 띠고 이루어졌다.

'신전술'(1946.7) 이전까지의 이 시기에서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소-영-미-중"註6)이라고 하면서 미국을 우호적으로 표현하였다. 실제로 당시에 있어서 남로당의 '미군정에 대한 좌익의 정책은 우의적 친선 방향'註7)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 초기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이 그 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평화적 방법으로의 이행이라는 노선에 서 있었다.註8)

제4기 자주적인 민족국가건설의 실패와 신전술 (1946~1953)

신전술은 해방 조선에서 그간 실시된 미군정의 정책과 그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8월테제에서 박헌영이 주장한 정치노선이 국가라는 조직된 가장 강력한 물리력에 의해 실패되면서 박헌영은 미국을 이제 과거의 일본과 동일한 위치에 놓는다.註9) 이제 그는 시민사회에서의 혁명적 열망을 조직해 식민지적, 파쇼적 국가기구(미군정)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이 한반도 전체적인 차원에서 일어났던 계급투쟁의 최고차적 형태인 내전(한국전쟁)이었다.

신전술의 정신은 이렇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군정에 협력하여 왔으며 미군정을 비판함에 있어서는 미군정을 직접 치지않고 --- 간접적으로 미군정을 비판하였으나 앞으로는 우리가 이런 태도를 버리고 미군정을 노골적으로 치자 --- 지금까지는 미군정과 그 비호 하의 반동들의 테러에 대하여 그저 맞고만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맞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 갚자."註10)

이러한 신전술 아래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났고 박헌영은 체포령이 떨어져 월북했다.註11)

몸말

임무」(8월테제)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Nationalism)적인 요소와 이에 대한 이해

'임무'에서는 해방조선에서의 혁명의 단계를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설정함으로써 서구에서 그와 같은 단계의 혁명 결과로서 나타난 것들 - 민족국가의 설립과 봉건적인 토지제도의 철폐를 전략적 과제로 설정했다. 즉 "금일 조선은 부루주아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를 걸어가고 있나니, 민족적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과업으로 서있다. 즉, 다시 말하면 일본의 세력을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구축하는 동시에 모든 외래자본에 의한 세력권의 결정과 식민지화 정책을 반대하고 근로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정권을 내세우는 문제와 동시에 토지문제의 해결이다."註12)

여기서 '일본세력을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구축'한다는 것은 두가지의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민족적 완전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세력을 완전히 구축해야 된다"註13)는 것과 "--- 반제투쟁의 과업 --- 완수 ---, 즉 조선으로부터 --- 친일세력을 일소하였느냐 하는 문제"註14)의 해결이다. 이와 함께 "전쟁시기에 군사적 제국주의적 전시계엄상태 밑에서 모든 운동은 물론이고 하찮은 자유사상의 언사까지도 극악의 탄압"을 했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대중적 검거는 비합법적 조직운동을 극도로 위축"註15)시켰는데 이런 파시즘적인 상황을 제거한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박헌영이 제기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정치적 내용은 반제반파쇼민주주의혁명이었다. 그런데 반파시즘전선이라는 것은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에 부과된 外來的인 것이라는 점에서 실제적으로는 반제국주의적인 투쟁의 한 요소로서 포함될 것이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쟁점과 과제' 삽화 사진 - 고대대학원신문, 1993.1.11, 정해구 (레포트와 함께 철해져있던 에세이)
이런 정치적 목표달성을 위해 박헌영이 내세우는 것은 '혁명적 민주정권, 혁명적 민주주의 조선, 인민정부'이다. 이것은 "--- 조선의 완전독립을 달성하기 위야는 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를 숙청[하고] ---, 조선인민의 이익을 위하야 --- 실지로 투쟁 --- 하며, 세계평화와 전쟁방지를 위하야 민주주의제국과 친선할 것[이고] ---,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장 잘 실천하는 조선공산당과 협력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註16)인 "진보적 민주주의 제단체의 집결로서 전조선민족통일전선"註17)을 결성하고 이 "민족적 통일전선"註18)의 기초 위에서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연합군에 의해서 조선이 해방된 상황 속에서도 반제라는 문제와 민족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문제를 하나의 전략적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가장 민족주의적인 해결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박헌영의 이런한 정치노선의 민족주의적인 성격은 장안파의 주장과 레닌이 1905년 러시아혁명 시에 제시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라는 테제와 비교해 본다면 더욱 뚜렷해 진다.

장안파는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자의 긴급임무」와 「현단계의 정세와 우리의 임무」註19)를 발표했는데 앞의 것에서는 '8.15일 이래 조선혁명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대상으로 하는 혁명의 제1단에 돌입하였고, 이제 조선이 독립됨으로써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 과업이 거의 완수되었으므로 금일부터는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혁명에로 단계적, 서열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혁명이 동시에 수행되면서 전자가 후자의 일부분으로서 그 안에 포함된 형태에서 전개되어 나가는 제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동시혁명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뒤의 문건에서는 이제 혁명이 제2단계로 돌입하였으므로 세력배치가 '자유주의적 민족부르조아의 반동적 저항을 진압하고 농촌 중농과 도시상공층의 동요, 불확실성을 견인 혹은 중립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의 영도 아래 농업 프롤레타리아와 인구의 압도적 다수인 반프롤레타리아(빈농)의 강고한 혁명적 동맹을 통하여 농촌 및 도시 소부르조아와 일정한 통일적 전선체제의 광범위한 형성'註20)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극좌적 경향'이라고 비판하면서 "금일 있어서 벌써 우리가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의 중요과업(완전독립과 토지혁명)을 완전해결은 커녕 이제 시초의 찻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처지"註21)라고 주장하면서 '반민주주의적 경향을 가진 반동단체(한국민주당 등), 대지주,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와 친일파들과 싸울 것을 주장한다.註22) 즉 그는 장안파와는 달리 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를 청산할 때까지 민족부르조아를 포함한 전민족적인 연합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레닌이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두가지 전술」에서 제시한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단계에서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라는 테제와 비교해보아도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레닌의 테제는 박헌영의 8월테제보다도 장안파의 주장에 훨씬 더 가깝다. 왜냐하면 레닌은 1848년 독일혁명을 마르크스가 분석하면서 어떻게 혁명을 가속화시켜 連續的(또는 同時的)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까지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러시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열기가 부르조아의 나약함을 극복하고, 혁명의 단계를 中層的으로 결정하면서 부르조아혁명을 넘어서까지 나갈 것이라고 보고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로 속히 넘어가게 만들기 위하여 그 전제조건인 제문제, 반제-반봉건투쟁으로 그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고 또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의 수립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확립이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족적 통일전선의 실현을 강조"註23)하면서, 그는 "일본제국주의 잔존세력 構築과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세력을 완전히 근멸-청소하기위한 --- 투쟁과업을 실행하지 않고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다"註24)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는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을 해방조선에서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독자적인 혁명단계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해방조선에서 어떠한 정치적 당파보다도 더욱 더 민족주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8월테제를 근거로할 때 박헌영은 '민족주의적'이었다. 구체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서 그가 취한 실천과 정치노선을 볼 때 그를 따라갈만큼 확고한 민족주의자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실천 속에서 드러난 이런 민족주의적인 속성은 미군정의 실체를 파악하면서부터는 더욱 더 강화되고 확실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민족주의자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은 실제 식민지적인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운동을 전개했던 한 혁명가가 도출해낸 해방을 향한 도정의 일부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조선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로 속히 넘어가게 만들기 위하여 그 전제조건인 제문제, 즉 반제-반봉건투쟁으로 그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고 또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의 수립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확립이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족적 통일전선의 실현을 강조"註25)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헌영이라는 사회주의라는 단호한 사상으로 무장된 역사적 인물의 양면성을 볼 수 있다. 즉 그의 사상과 현실의 갈등이다. 문제는 여기서 무엇이 그의 본질(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의 본질을 공산주의자 박헌영에 놓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의 사회적 역관계 속에서 엄연한 공산주의사회(사회주의사회)를 추구하는 정치적 당파의 지도자였고, 그의 실천행위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와 그의 사상성으로부터 논리적, 역사적으로 추론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민족주의적'이었다. 그것은 한 인간이 토대의 제약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가장 공산주의적인 실천 자체가 가장 민족주의적인 실천이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서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실체는 하나지만 그 속성은 무한한 것이다. 그리고 한 공산주의자에게 있어 그 속성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결정지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 해방 조선, 미군정 하의 조선이라는 상황이 그를 민족주의자로서 판단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나왔다는 의미에서 나는 박헌영을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라고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민족주의적'이라는 형용사가 '공산주의자'라는 실체를 규정지으면서 '박헌영 자체'를 역사적인 인물로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라는 판단은 해방 이후 왜곡되어 온 우리의 역사를 볼 때 훨씬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된다. 「보론」을 보면 뚜렷해지듯이 박헌영이 주장했던 일제청산 - 억압적인 국가기구의 청산이야 말로 현시대에 우리 민족, 즉 그 주체인 노동자 민중의 가장 큰 과제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미제국주의에 의한 종속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걸어 온 우리 민족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모색의 과정에서 기존 보수 우파와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글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는 박헌영의 노선에 대한 역사적인 비판이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글의 성격상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헌영에 대한 현시점에서의 평가와 반성은 없다. 둘째는 글 자체가 '박헌영을 민족주의자로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것에 촛점이 되면서 그런 측면을 너무 부각 - '과잉 결정'했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글이 전체적으로 그의 사상(정치노선)에 한정지어 살핌으로써 이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고 할 수 없는 정치적 실천(구체적인 정치적 사건들에 의한 그의 실제적인 행동들)과의 유기적인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이글은 8월테제에 나타난 '정치적 담화'와는 어느 정도 모순되게 나타나는 (이것을 '좌익적'이었다라고 김남식은 평가했다.) '실제 행동'을 극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는 데에 「보론」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註26)

후주 --------------------------------------------------

1) 김남식, 심지연 편저. 『박헌영 노선비판』(도서출판 두리, 1986, 서울), p.16.
2) 같은 책, 「(자료 8) 피의자 신문조서」, pp.94~98. (강조는 필자)
3) 같은 책, pp.20~21. 코민테른의 조공해체 결정내용은 다음과 같다. (1)지도부가 거의 지식계급과 학생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2)계급적 혁명당이 아니라 소부르조아 정당이며, (3)파벌싸움이 중요한 害黨的 요소라는 점을 지적하고, (4)과거를 청산하고 새 방향에서 당을 재건하라고 결정했다. (방인후, 『北韓朝鮮勞動黨의 形成과 發展』(고려대출판부, 1967), 같은 책, p.29에서 재인용)
4) 8월테제를 발표(45.8.20.)한 후의 정치상황, 특히 콤그룹의 반대세력인 장안파의 주장과 움직임 등을 이미 발표된 8월테제에 반영시켜 9월 25일에 발표한 것이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것이다. 이글에서 다루는 것은 '임무'이다.
5) 주3)을 참고할 것.
6) 같은 책, 박헌영, 「임무」, p.181. (강조는 필자)
7) 같은 책, 박헌영, 「10월 인민항쟁」, p.449.
8) 하지만 8월테제가 적용되던 이 시기(1945.8.15~1946.7.)는 시민사회에서 압도적 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좌익의 힘이 일제하에서 '과대성장된' 국가기구가 해체(파괴)되지 않음으로서 그 국가기구(미군정)에 의해 파괴되고 우익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던 기간이었다. 「보론」을 참고하기 바란다.
9) 박헌영은 미국의 대한정책이 처음부터 자유독립의 방향이 아니라 침략적인 것으로서, 독립을 원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점령하려는 것이며 반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 「人民에게 告함」(48.4.12.), 『박헌영 노선비판』, p.80에서 재인용. 강조는 필자)
10) 김남식, 『南勞黨 硏究』(돌베개, 1984, 서울), pp.235~236. (강조는 필자)
11) 박헌영의 생애에 대한 시기구분은 역사적인 사건에 의한 것보다도 박헌영 자신이 의도했던 특정시기의 정치적 실천을 통해했다. 참고로 역사적인 사건에 의한 구분은 다음과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종성, 『朴憲永論』(인간사랑, 1992, 서울), pp.32~42.

12) 같은 책, 박헌영,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9.25.), p.182. (강조는 필자)
13) 같은 책, 박헌영, 「朝鮮共産黨의 主張 - 朝鮮民族統一戰線結成에 對해」(1945.10.30.), p.202.
14) 앞의 책, p.202.
15) 같은 책, 「임무」, p.184.
16) 같은 책, 박헌영, 「朝鮮共産黨의 主張 - 朝鮮民族統一戰線結成에 對해」, p.203.
17) 앞의 책, p.203.
18) 같은 책, 박헌영,「임무」, p.195.
19) 전자는 장안당이 만들어지면서 발표된 것이고, 후자는 장안당이 재건위에 통합되어 조공이 재창당되던 날(45.9.15.) 발표된 것이다.
20) 같은 책, 박헌영,「임무」, p.194에서 재인용. (강조는 필자)
21) 앞의 책, p.182.
22) 앞의 책, p.194.
23) 앞의 책, p.195.
24) 같은 책, 박헌영, 「단결력으로 싸우자」(1945.11.15.) (강조는 필자)
25) 같은 책, 박헌영,「임무」, p.195. (강조는 필자)
26) 8월테제가 가지고 있는 토지혁명의 문제를 몸말에서는 다루지않았다. 그 이유는 토지혁명이라는 것을 두고 보면 다양한 견해가 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이글에서 다루려는 민족주의적인 풍모를 가진 박헌영이라는 주제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토지문제를 박헌영이 생각함에 있어서는 다소 모순된 주장을 스스로 전재하지만 부르조아혁명에서 나타나는 토지개혁 이상까지 나갔다는 것이고, 이것과 그의 실제적인 정치적인 실천을 근거로하여 박헌영을 좀 더 레닌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라는 테제와 근사한 수준까지를 추론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동유럽과 북한의 경험을 통해 볼 때 8월테제의 노선이 성공했다면 곧장은 아니더라도 인민민주주의 정권으로까지 발전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했다(실제 박헌영의 정치노선의 깊숙한 곳에는 이런 판단이 내재되어 있다). 이글에서는 그곳까지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보론」에서 실제 쓰여진 기본적인 관점은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의 가능성이라는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글에서는 그런 측면을 배제하려고 노력을 했다. 왜냐하면 이글에서 살피려는 것은 박헌영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것이지 사회구조나 변혁의 방향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측면까지 쓴다면 글의 양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보론」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이런 이유로 나는 박헌영 개인이 말하고, 썼던 1차 자료에만 충실하려고 노력을 했다. 따라서 「보론」과 이글에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1992년 고려대 최상룡교수의 민족주의론 레포트 표지
     ▲ 2008년 1월 이사짐 정리 중 발견한 최상룡교수의 '민족주의론' 레포트
         누렇게 변해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15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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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사회에서의 국가 형성 - 과대성장국가이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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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4 23:36 2008/03/14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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