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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2.0 - 새로운 공간과 시간의 가능성],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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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에 해당되는 글 8건

부유한 사람들이 어떤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예절을 갖춤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 생활상태의 차이를 드러내는 은혜는 받는 사람에게 어떤 보이지 않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소박한 예절은 못 견딜 정도로 매혹적이 된다. 상냥함은 인간을 도취시키며 설사 세련이 덜 된 점도 반드시 불쾌하지만은 않다.  토크빌은 19세기 미국의 부유한 시민들은 예절을 알고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예의를 지킨다고 이야기 한다.(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II, 674)

이것은 19세기 이야기이고 지금의 미국은 그렇지않다. 박홍규 교수는 토크빌의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이점을 계속 지적한다. (박홍규,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242-256)


하지만 프랑스의 (구)귀족들은 19세기 미국의 부유한 사람들과 같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들(귀족들)과 평등해진 모든 사람을 억압자로 간주하게 되며, 그 억압자들의 운명은 아무런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들과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은 갖지 않는다.' (토크빌, 670)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귀족사회에서는 조상 숭배와 자녀 사랑을 낳는 가족적 결합, 동향적 결합, 계급적 결합, 은혜-종속의 봉건적 결합으로 인해 '거의 언제나 자기 밖의 어떤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민주사회에서 이런 귀족제적 성격이 무너져내리고, 개인주의적으로 변하고, 평등의 추구는 '민주적 전제정'이 될 수 있다. (박홍규, 224)

민주적 전제정에서는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권자가 전체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들에게 민주주의적 전제군주는 "물질적 향유를 만족시켜주고 그들의 운명을 지켜주는 거대하고 보호자적인 권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민주주의적 전제정의 출현은 민주주의 시대에 개인들이 교육과 자유라는 습속에 적응하지 못한 상황에서 물질적 쾌락의 욕구가 먼저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물질적 쾌락에 대한 강한 욕구는 각자의 사적인 재산과 공공의 번영과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홍태영, 몽테스키외 & 토크빌 - 개인이 아닌 시민으로 살아가기, 138)

(계급, 계층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귀족, 지도자, 부자에 대한 존경은 매혹, 매력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의 부자들에겐 이런 매력(예절)도 없고 짐승같은 힘의 논리, 갑을 관계로 가득 차있다. 세월호 보상에 대한 정권과 고위층의 행태는 동정심도 예절도 없어보이고, 땅콩회항 사건 등도 그렇다.

노동개혁을 이야기하면서 '가족(부모세대와 자식세대)' 간의 상호분열성을 확대하며, 생계(경제)와 (북한으로부터의) 안전에만 집중하게 하는 정권을 볼 때, 토크빌이 우려했던 민주주의적 전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상승한다.

우리사회가 형식적으로 민주주의적 제도가 작동하고 있다면, 내용적으로는 '귀족정'이거나 '전제정'인 듯 하다.  그들에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없고, '어떤 사람에게도 빚진 것이 없으며 또 아무 것도 기대하는 바도 없다'(토크빌, 669)는 '한국적/자수성가형' 개인주의가 만연한 것은 아닌지! 역설적이게도 이런 것을 '천민적'이라고 하나보다!

'노동개혁'을 하면 법인세율을 낮추고, 기업/국민 돈으로 정부가 '실업급여'를 올려주겠다는 이상한 주장도, 아버지의 급여를 깍아 자식에게 주겠다는 조삼모사도, 2년 계약직을 4년으로 늘리면 노동시장이 안정화된다는 이야기까지. 노사정위원회를 보면 정부는 선량한 균형자를 넘어 국민들을 (경제적) 공포에 몰아넣고 시장 침탈적이다. 이들이 부자에게 기울어져 있도록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시장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자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며 왜 우리는 이들에게만은 굴종적일까? 시장을 이야기하며 왜 국가의 개입에 너그러울까? 왜 자유를 주장하는 광범위한 결사를 만들어 이들을 견제하지 못할까?  왜 우파적 자유주의를 무기로 민주적 전제정에 대항하지 못하는가? 좌파적 국가 개입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일까? 우린 자유주의 내에 담겨있는 '진보성'을 다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모두를 넘어서려면 '물질적 쾌락의 욕구'(경제 발전)를 앞세워 국민을 닦달(das Gestell)
하는 전제군주(국가, 관료,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제한하고 자유의 습속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의 민주주의 2-10점
A. 토크빌 지음, 박지동.임효선 옮김/한길사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8점
박홍규 지음/글항아리
박홍규 교수의 주장이 강해 다른 글들과 비교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주장이 강한만큼 힘이 있고, 논지 파악을 명확하게 해주는 잇점이 있다.

몽테스키외 & 토크빌 : 개인이 아닌 시민으로 살기-10점
홍태영 지음/김영사
100년의 격차가 있지만 몽테스키외(1689년 1월 18일 ~ 1755년 2월 10일)는 홉스(1588년 4월 5일 - 1679년 12월 4일)보다 경험적이다. 이 말은 홉스가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정치이론에서 몽테스키외, 토크빌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전통은 홉스, 로크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계약론/자연권에 기반한 전통과 다른 길을 가는 듯 하다.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이란 공식이 적용되지않는다.

2015/09/13 22:34 2015/09/1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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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부터 몇권을 책을 읽고 있다. 맨 먼저 읽기 시작한 책은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이다. 기원전부터 18세기까지 유라시아대륙에서 흥망성쇠한 유목민들이 세운 국가에 대한 역사 책이다. 이 책은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유목민 이야기>에서 잠깐 말한 것 처럼 이진경 교수의 <노마디즘>을 읽으면서 한번 읽겠다고 생각했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 10점
르네 그루쎄/사계절출판사

상고시대에서 13세기까지 스키타이와 훈족에서 시작하여 돌궐, 위구르, 거란, 투르크와 이슬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돌궐, 거란과 여진은 우리 역사에도 가끔 등장하고, 최근 사극 <대조영>에서 발해가 건국될 당시 중요한 세력으로 나왔었다.

중반부는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에 대한 이야기 이고, 마지막은 티무르, 킵착 칸국(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칭기스칸 후예 몽골인들), 샤바니조, 차가다이인, 그리고 몽골리아의 마지막 제국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찾아보기>까지 800여 페이지가 넘는 두터운 책인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중반 이후 계속 되는 몽골인들의 이야기가 생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잘 알아 식상한 것도 아니기 때문인 듯하다. '적당한 관심, 사전 지식, 새롭운 사실들, 드라마틱한 제국의 흥망성쇠' 등이 긴 여정을 길지않게 만든듯 하다.

유목민, 유목민의 군대, 유목민의 전투기술

유목민의 군대는 기원전 750년경의 스키타이 시대부터 칭기스칸 그리고, 그의 후예들이 최후를 맞은 18세기까지 말과 활로 이루어진 '기마궁사'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많은 경우 '도시 없이' 소위 '움직이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을 지니고, 계절적 이동에 따른 마차 위에 여인들과 재산들을 실고 다녔다.[footnote]<유라시아 유목제국사>, p.44[/footnote]

이들의 전술 또한 기원전 7세기에서 12세기 칭기스칸까지도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데 앞에서 후퇴하면서 적들을 약올려 들판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게 만든 후 적들을 초원에서 몰이사냥을 하듯이 격파하는 것이다.[footnote]같은 책, p.47[/footnote]

유목민들은 전투에서 적을 급습할 때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른다. 만약 적이 저항하면 흩어졌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돌아오면서 도중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뒤엎어버린다. 그들은 요새나 진지를 어떻게 함락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놀랄 만큰 먼 거리에서 쇠같이 단단하고 날카로운 뼈로 촉을 만든 화살을 쏘는 기술에서 그들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footnote]같은 책, p.132를 볼 것[/footnote]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이야기했던 톤유쿡[footnote]<유목민 이야기>의 톤유쿠크와 동일인물이다. 또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pp.178-180을 보면 <유목민 이야기>에 나오는 비문에 씌여있는 톤유쿡의 말의 배경을 알수 있다. 톤유쿡의 주군인 빌게 카간이 투르크인들을 획정된 지역에 정착시키고 오르콘 지역에 중국식의 성곽도시를 건설하고 불교 사원과 도관을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다.[/footnote]은 투르크의 장점을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또 상황이 나쁘면 피해서 도망칠 수 있는 유목민으로서의 기동성에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돌궐은 그 수가 중국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들은 물과 풀을 찾아 떠돌고 사냥을 한다. 그들은 정해진 주거가 없고 늘 전투하는 연습을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다고 느끼면 나타나고, 약하다고 생각하면 물러나 숨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보다 수가 많은 중국의 이점을 상쇄하고 그것을 쓸모없게 만들 수 있다. 만약 당신[빌게 카간]이 돌궐을 성곽이 있는 도시에 살게 하고 중국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를 당한다면, 설사 그것이 단 한 번일지라도 당신은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부처와 노자는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니 그런 가르침은 전사에게 맞지 않는다."[footnote]같은 책, p.180[/footnote]
이런 유목민과 한민족과의 친연성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고구려의 주몽 설화, 말타는 고분벽화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기마궁사의 모습과 순장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순장은 스키타이인, 투르크-몽골인, 그리고 삼국시대의 한반도에서도 찾아  수 있다. 이런 관습은 이미 서아시아나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진 장례의식이다.[footnote]같은 책, p.45[/footnote]

고구려 쌍영총 기마무인도
 ▲ 고구려 쌍영총에서 발견된 기마무인도의 모습[footnote]그림출처: 아쉽다, <왕 의남자>의 옥에 티, 오마이뉴스, 2006.2.18[/footnote]

'야만인들'인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되면서 새로운 중세가 시작되는 것처럼 이 책을 읽다보면 유라시아 초원에서의 작은 폭풍이 전체 세계 역사에 얼마나 거대한 충격을 주고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지를 볼 수 있다. "초원의 한쪽 끝에서 발생한 작은 자극으로 인해 민족이동이 가능한 이 엄청나게 광대한 지역의 구석구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이 초래"된다.[footnote]같은 책, p.81[/footnote]

야만과 문명, 그리고 국가라는 문제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빠져든 화두는 '야만'과 '문명' 그리고, 국가라는 문제이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의 경우 씨족사회를 기반으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면서 몽골 일족들은 '문명화 과정'을 거쳐 초원이 강요했던 강인한 생명력(유목민의 전투력)을 잃어버리고 문명의 수호자가 된다. 또 달리 보면 국가 자체가 문명을 요구하거나, 문명이 국가를 요구한다고 할 수도 있다.

먼저 이들의 '야만성'은 어느 정도였을까? 또 어떻게 하여 문명의 수호자가 되었을까? "그[석륵]은 유목민적인 성향도 못지않게 강했고, 특히 그의 흉노인 후예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석륵의 계승자인 석호(334-349)는 자기를 암살하려고 기도했던 아들을 사형에 처할 정도로 방탕한 짐승이었다. 그 아들은 완전히 괴물로서 자신의 가장 예쁜 첩을 불에 구워서 탁자에 내오게 할 정도로 변태적인 타타르 냉혈한이었다. 석호는 가장 열렬한 불교의 보호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문명의 마력에 처음 접하면서 빠져버리는 야만인 사이에 흔히 나타날수 있는 이상현상이다."[footnote]같은 책, p.111, 문화적 보호에 대해서는 p.112도 볼 것[/footnote]

탁발도의 경우 "새로운 통치자의 어머니가 과부로서 가질 수 있는 야망, 탐욕, 또는 질투가 빚어낼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황제 즉위 이전에 그녀를 죽이는 야만적인, 그러나 사려 깊은 투르크-몽골의 관습을 그대로 보존하였다"고 한다.[footnote]같은 책, p.118을 볼 것[/footnote]

아틸라 더 훈 (406년~453년)
3-5세기 훈족에 대한 서구(아마 로마시대) 역사서의 묘사를 보면 이렇다. 아이의 뺨에 수염이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깊은 상처를 냈다. 음식을 요리하거나 얌념을 치지 않고, 안장 밑에 놓아두어 부드럽게 된 들풀의 뿌리와 고기를 먹었다.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이나 고정된 거처가 없다. 늘 유목생활을 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추위, 배고픔, 갈증으로부터 단련되었다. 모임도, 장사도, 마시거나 먹는 일 심지어는 말을 탄 채 자기도 했다. 이런 생활과 함께 괴물같은 인상과 염소가죽으로 '대충' 만든 복장을 한 모습을 본 서구(로마와 게르만 세계)는 공포에 떨었다.[footnote]같은 책, pp.131-132를 볼 것. 블로그 훈족 이야기를 참고 할 것[/footnote]

581년 중국의 사가들이 돌궐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노인을 존중하지 않고, 혈기가 왕성할 때 우대를 받는다. 염치와 예의를 모르고, 이런 점에서 옛 흉노와 비슷하다. 여기서의 흉노는 서양에서 말하는 훈이라는 학설이 존재한다. 또 사람이 죽으면 자손이나 친척들이 양이나 말을 잡아 그의 천막 앞에 그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놓아둔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애도하는 울음을 내면서 그 천막 주위를 일곱 바퀴 돈 다음에 그 천막 앞에 와서는 얼굴을 칼로 그어서 피가 눈물과 함께 흐르게 한다. 장례를 치르는 날 그와 가까웠던 친족이나 그와 가까왔던 다른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고 말을 달리며, 죽었던 날과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을 칼로 긋는다. 장례 이후에 고인이 생전에 죽인 사람의 숫자만큼의 돌을 그의 무덤 주위에 둔다. 아버지나 백부나 숙부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나 어린 동생 혹은 조카가 미망인과 그녀의 자매와 결혼한다. 그들은 악령과 정령을 숭배하고 무당을 믿는다. 전투에서 죽는 것이 그들에게는 영광이고, 병에 걸려 죽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footnote]같은 책, p.148을 볼 것. 우리 표현에 '피눈물을 흘렸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이 먼 과거의 습속이 우리 말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우리나라에 있는 무당은 유라시아 유목민들에게서 흔하게 발견된다.[/footnote]

이 정도면 야만이라는 표현이 가리키고 있는 유목민의 생활상을 어느 만큼 알 수 있다.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문명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문명화과정>을 볼 것)

문명의 마력이란 물리적 힘을 사용하지 않고도 권위를 부여하고 충성을 하도록 만들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주는 기술들인듯 하다. 종교가 지배자를 신이나 하늘의 대리인으로 만들고, 문명국의 궁정은 '움직이는 도시'에서 보여줄 수 없는 거대한 즐거움을 야만적 지배자들에게 선사한다. 많은 의례적인 절차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같은 친족/씨족 내에서도 왕과 왕이 아닌 자에 대한 차별성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의례들을 통해 친족 살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문명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예를들면 과부인 어머니가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만듬으로써.

하지만 문명화의 결과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목적 생활에서 나온 전투력의 약화에 의한 문명으로부터 패퇴 또는 너무 문명화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는 형태로 나온다. "그들[타브가치(탁발)[footnote]탁발은 5세기 북중국을 지배한 유목민족이다.[/footnote]]은 북중국의 다른 투르크-몽골계 국가들을 통일한 뒤 너무 한화(漢化)되어 부족이나 왕조 모두 중국인 대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더욱이 불교를 위한 그들의 열의는 기독교에 대한 카롤링거와 메로빙거의 열정의 재판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크 자신이 게르만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대항에 로마 전통의 보호자가 되려고 했던 것처럼, 탁발도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초원 깊숙한 곳에서 미개인으로 남아 있었던 몽골계 부족들을 상대로 황하에서 '라인 강의 파수꾼'이 되었다."[footnote]같은 책, pp.113-114[/footnote]

유목제국들은 야만과 문명이 만나는 초기에는 아주 강한 힘을 갖게 된다. 탁발의 경우를 통해 보면 반쯤은 한화된 투르크-몽골계 부족인 탁발은 '중국에 대해서 모든 고유한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면서도 여전히 북방의 야만적인 부족들에 비해 우월감을 갖게 해주는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429년 타브가치의 왕 탁발도[북위의 태무제]가 몽골의 유연을 상대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중국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다. 풋내나는 망아지와 송아지들이 호랑이와 늑대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유연 그들은 여름에 북쪽에서 방목하고, 가을이 되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겨울에 우리의 변경을 약탈한다. 우리는 단지 여름에 방목장에 있는 그들을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 그때 그곳의 말은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숫말들은 암말과 교미에 정신이 없고 어미말은 망아지와 지내기 바쁘다. 만약 우리가 그곳으로 가서 그들의 목초지와 물을 없애버리기만 한다면 며칠 이내로 그들을 잡든지 아니면 붕괴시켜버릴 것이다." 정확한 판단이다. 유목민의 조직은 여름이 되면 모두 흩어져(전투조직이 와해되어) 있다 겨울에 약탈을 위해 뭉치는 '국가'가 아닌 전투 연맹체 정도이다.

탁발도가 말한 이와 같은 이중의 우위는 이후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원의 황제)가 남송과 카이두 몽골부족을, 그리고 초기의 만주족(청)이 최후의 중국인 반란과 마지막 몽골의 호전성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이중의 이점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탁발, 쿠빌라이조, 만주도 완전히 한화되는 때는 반드시 찾아왔다. 그러면 그들은 북방의 부족들에게 패배하였고, 중국에서 쫓겨나거나 아니면 그 속에 흡수되어버렸다. 이것이 (야만과 문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중국과 몽골 역사의 기본적인 리듬이다.[footnote]같은 책, p.117, 비슷한 이야기는 pp.120-121에서도 볼 수 있다.
http://ko.wikipedia.org 에서 북위(북조)를 검색하면 다음 내용을 볼 수 있다. "도무제중국 전통의 국가체제를 채용하여 탁발부 밑에 있던 여러 부족을 해산시키고, 족장이하 부족민은 모두 중국의 호적에 편입시켜 한족과 혼합시켰다. 더불어 한족 출신의 명족(名族) 인재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나라를 공격해 하남을 빼앗고, 이어 태무제(太武帝)는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차례로 멸망시켜,439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서역에서 조공을 바쳐오는 나라만 해도 20여개국에 이르니 북위의 국세는 크게 울려퍼졌다.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태무제[탁발도]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또한 남조 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과 강북을 빼앗았고, 이때 도사 구겸지가 도교 교단을 확립하고, 한인 관료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삼무일종의 폐불 첫번째) 이 시기에 선비족의 한인 동화와 도시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footnote]

용문석굴
탁발의 경우 황제였던 탁발홍은 471년 승려가 되기 위해 어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고, 그의 아들인 탁발굉(효문제, 471-499)은 용문 석굴을 만들게한 장본인이다. 탁발은 중국의 문화와 불교의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투르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인하고 늠름한 기상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게 된다. 한번 보살의 자비로운 손길에 스친 사나운 전사들은 승려의 인문주의적인 가르침에 너무나 감화되어 원초적인 호전성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방어마저 게을리하게 된다.[footnote]같은 책, pp.119-121[/footnote]

8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위구르 쿠르크 제국의 경우 "피냄새로 진동하는 야만인들의 습속이 유행하던 나라가 채소를 먹는 사람들의 땅으로 바뀌었다. 살인이 자행되는 나라가 선이 권장되는 나라로 바뀌었다"고 쓰고 있는데 마니교와 기독교의 영향이다.[footnote]같은 책, p.195[/footnote] 이런 내용은 모든 유목민족의 역사에서 나오는 듯하다. 더 이상 이런 사례를 열거하지 않겠다.

유목민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넘어오는 사이에 국가가 존재한다. 정주민의 땅을 차지한 유목민은 그들을 통치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고, 그 국가에 그들이 '포획'되면서, 즉 야만성을 잃고 문명화되면서 다시 그 '국가-정주민의 땅'을 잃거나 '민족/부족' 자체가 정주민에게 동화되어버린다.

문명화 과정을 거친 유목민의 운명, 그리고 그람시적 진지와 기동

'중국화=문명화' 과정을 거친 유목민의 운명은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유목부족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중국의 한족처럼 변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한족이 유목민에 비교하여 절대적 다수라는 단순한 사실에 기인한다.

둘째, 문명화 과정은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니 그런 가르침'이어서 유목민의 호전성을 사그라들게 만들어 전투력을 잃었을 때 수적으로 소수인 그들을 다시 초원으로 몰아내버리거나, 다른 초원의 호전적 유목민의 사냥감이 되도록 만든다. 문명세계의 발명품인 국가는 유목민에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면서도 다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은 목적은 국가의 형성, 체제의 변환 또는 이행, 진지와 기동이라는 그람시적 은유 등에 대해 해석을 위한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용에 빗대 그람시의 이야기를 해석해 보자.

첫번째의 경우는 가지고 진지전, 기동전, 화력전, 그리고 유목민 이야기에서 말했던 그람시의 진지전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다. 만일 '노동자가 절대적 다수'라면 그람시의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노동계급의 존재론적 위치와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이라는 문제 등과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존재론적 당위가 아닌, 사실을 보면 부르조아 사회에서 부르조아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임금노동자라고 해도 노동계급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 생각을 한다해도 존재론적 당위가 전제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닌가?
결국 '문명화'된 사회에서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계급은 다수가 아닌 정치적 소수인 것이다.

두번째 경우를 가지고는 반대로 어렵지만 하나의 가능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계급적 헤게모니를 구성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야만성을 '문명화'할 수 있는 조직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그람시의 진지는 문명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과 이것의 현실화쪽으로 '접합'시켜나가기 위한 장(場)을 만든다. 이속에서 '폭력에 대한 독점'으로 정의되는 '계급적' 국가를 '문명화' 시킬 수 있을까? 이 과정은 앞에서 살펴 본 수적(數的) 소수에서 다수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의 경제적, 존재론적 위치가 아닌 '어떤 다른' 심급에서.

이런 관점에서 그람시는 마키아벨리적 군주에 빗대 현대적 군주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하며,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많은 유목민의 군주들이 자신들의 민족을 문명화시키려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에 대한 어렴풋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진지(성곽) 내에서 벌어지는 과정은 이데올로기적(문화적) 과정이다. 톤유쿡의 지적처럼 '전사에게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는 부처와 노자와 같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곳이다. 불교 사원과 도관이 있다. 도망가 숨을 곳이 없을 때, 즉 기동전이 불가능할 때 진지전이 필요하다면 이것의 전제조건은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다. 전체주의에서는 국가 안에서 전체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시민권을 쫓아내 버린다.

전체주의의 기원 1 - 10점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한길사

이런 생각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와 함께 읽은 책들의 내용이 결합되어 나왔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를 읽고 있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의) 동화의 강력한 방해 요인은 이른바 주도 민족들이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러시아나 유대계 주민들은 폴란드의 문화가 자신의 문화보다 더 우수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폴란드인이 전 주민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사실에도 특별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footnote]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p.498 (한길사)[/footnote]
이글을 반대로 읽으면 수적, 문화적 우월성이 동화의 핵심 동력이다. 이런 아렌트의 지적이 맞다면 문명에 쉽게 젖어드는 유목민의 경우 정주문명의 우월성을 느끼고, 정주민들이 수적으로 월등히 많다면 어쩔 수 없는 필연인 것이다.

함께 읽은 책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으면서 문명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을 함께 읽기 시작하였다. 문명의 시작은 어쩌면 '차이; 피지배계급보다 자신들이 났다는 우위의 표현체계'일 수도 있다. 훈족을 보면서 놀랐던 중세 초의 유럽인들처럼 현재의 우리도 중세의 유럽인을 보면 '야만인'이라고 놀랄 것 같다. <문명화과정>에서는 궁정사회의 예절 등이 어떻게하여 일반화되어 '민족의식'이 되고, 다시 근대적 국가(nation, 민족국가)가 성립되는지를 추적한다. 현재 <전체주의의 기원>과 같이 읽고 있다.

문명화과정 1 - 10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한길사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Who Sings the Nation-state?>도 함께 읽었다.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유란 무엇인가 되묻고, 스피박은 국가적 추상구조라는 개념을 통해 재분배와 사회복지기능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무거운 주제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 10점
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주해연 옮김/산책자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기 시작한 것도 버틀러가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학교에 대닐 때 아렌트를 아주 멀리서 '소비에트'를 공격하는 우파 지식인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또 이런 선입관 때문에 손이 가지 않았었다. 내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알뛰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가 '인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아렌트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

인권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보통 학교에서 '천부인권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설(說)이 단순한 주의, 주장에서 사회적인 힘을 가지고 정치적 사실이 되는 과정, 신화가 현실이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렇게 만들어진 현실이 사실은 '신화적 현실'이었음을, 인간에게 사실상 인권이 없었음을 주장하는 듯하다. 신화가 현실이 되는 과정은 이데올로기가 사실/진리가 되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또 문명과 차별성(차이)의 문제로 <유한계급론 - 문화, 소비, 진화의 경제학>을 사들었다. 베블린의 책을 해설해 놓은 것이다. 베블린의 책은 대학시절 일별했었는데, 마르크스 이외에는 이단시 되었던 풍토에서 공부한 관계로 선배한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기억뿐이다.
이번에 1997년 3월 3일 을지서적에서 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을 함께 읽어야겠다. 10여년전 책 뒤에 써 놓은 글이 있다. 1996년 말 제대를 하면서 바로 취직을 한 후 6개월이 체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방황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인데, 지금도 ... 
"나에게 투쟁정신이 필요하다. 나는 절망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구별짓기>도 사람간/계급간의 차별화 전략에 대한 분석이다.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에 대한 분석인 <유한계급>에서 시작된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문명화과정> 역시 비슷한 내용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구별짓기 -상 - 10점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새물결

이론적 정확도를 떠나 느낌이지만 문명을 습속으로, 탈주해서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식적 좌파들이다. 하지만 문명을 떠나 정말 '밖에서' 생각할 수 있을까?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넘어설 수 있을까? 넘어선다면 어떤 개인이 넘어서는 것이 아닌 '문명' 자체가 넘어서는/넘어서고있는 것은 아닐까? 유목주의(노마디즘)은 결국 문명세계에 의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완전히 기병으로 구성된 금나라(여진족) 군대는 중국 남방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다. 그곳에는 범람하는 땅, 서로 얽히는 강들, 논과 운하가 있었고, 조밀한 인구가 언제 그들을 기습하고 포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footnote]르네 그루쎄, 같은 책, p.215[/footnote]
휴가가 끝났다.

미주 ------------------------------------------------------------------
2008/08/20 02:02 2008/08/20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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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룡 교수 - 민족주의론 강의, 1992년 2학기
1992년 최상룡교수의 민족주의론을 들으며 제출한 레포트이다. 몇가지 과제 중 내가 선택한 것은 '박헌영은 민족주의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였다. 최상룡교수는 박헌영을 민족주의자로 묘사했는데 아래 글은 그에 대한 반론 성격으로 씌어졌다. 수업 중 아래 글을 발표하자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정외과 수업에 타과생이 와서 담당 교수와 다른 논조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논의 전개했고, 그 결과 레포트는 폰트 10의 크기로 A4지 15장 분량으로 1시간 동안 발제하고 토론하기에 '아주 긴' 내용이었다.

민족주의론은 대학 마지막 학기에 들은 수업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이 레포트는 대학 4년동안 공부한 결과의 결산인듯도 싶다. 당찬 '반론'에 최상룡교수는 재미있어하면서 좋아했고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러면서 나는 이 수업 덕에 우리의 현대사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시간적으로 보면 보론으로 작성된 「남한 사회에서의 국가 형성 - 과대성장국가이론을 중심으로」가 1991년 여름에 씌어졌고, 아래 글은 1992년 가을에 썼다. 앞의 글을 안읽었다면 그것을 먼저 읽는 것이 좋다.

박헌영의 8월테제의 Nationalism적인 요소

머리말

처음에는 '민족주의자로서의 박헌영이란 판단은 가능한가'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에 대해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러한 접근방법이 문제의식을 극명하게 한다는 잇점은 있지만, 반대로 그의 삶을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에는 다소 장애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으로 무장된,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싸워 온 한 혁명가를 민족주의라는 '잣대'를 가지고 재단하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글에서는 먼저 역사적인 서술방식을 채택하여 그의 삶을 간략히 시기별로 정리하고 그 역사성(구체적 상황의 전개과정)에 기반하여 1945년 8월 15일 조선의 해방부터 1946년 7월 신전술이 제기될 때까지 그의 사상적, 실천적 기조를 이룬 8월테제를 분석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서술 자체가 그의 8월테제와 신전술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극명하다. 왜냐하면 박헌영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지 해방 직후의 경제, 정치, 사회적 구조를 분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매꾸려고 박헌영을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되는 글을 이 글의 뒤 부분에 「보론」식으로 첨가했다.

먼저 나는 앞에서 말했듯이 박헌영의 개인사를 서론 부분에서 살피고, 본론에서는 짧지만 8월테제와, 그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그밖의 문건들을 가지고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박헌영을 우리가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제시해보겠다.

제1기 출생과 성장과정 (1900~1920)

박헌영은 1900년 5월 1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 금광마을에서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이학규)은 금광마을 근처에서 주막을 하면서 생활을 했다. 그의 집안은 '중농(동산과 부동산을 합쳐 당시 돈 약 1만원 정도)' 정도로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1운동이 났던 1919년 졸업을 했다. 3.1운동에 그가 참가했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1947년 2월 24일 발표한 글인 「3.1운동의 의의와 그 교훈」에서는 이 운동을 반제민족해방투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민족대표의 투항주의와 무저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제2기 사회주의 사상의 학습과 사회주의 선전 (1920~1932)

그 후 박헌영은 1920년 일본을 거쳐서 상해로 가서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약 6개월간 학습하고, 1921년 4월경부터 상해에 있던 '사회주의연구소'에 드나들면서 공상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박헌영은 그곳에서 사회주의를 계속 연구하면서 여운형과도 친교를 맺는다. 그 당시 그는 '사회주의라는 것은 사회가 모든 사람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註1)이라고 생각해 좋은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1921년 9월에는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하지만 1922년 3월에 사회주의 선전을 위해 귀국할 것을 결심하고 자퇴를 한 후에 귀국하던 중에 체포(1922.4)되어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 받았다.

1924년 1월에 출옥한 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약 6개월간(1924.4~10)하다가 신문사를 나와서 집에서 문필생활을 하면서 개벽지에 기고를 했다. 그때 발표한 글이 「국제청년 데이의 의의」(1924.8.18.)와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1925.10.29.)이다.
 
그리고 1925년 4월 18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의(이하 공청)를 결성한다. 공청은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는 별개 조직으로서 공산주의를 선전, 교양하는 기관으로서 단지 조공과 이념상의 상호연락관계를 유지했다. 즉 조공이 당적인 차원의 운동이었다면 공청은 그보다 낮은 단계의 대중운동 차원에 있었던 것이다. 공청은 25월 12월 박헌영이 신의주경찰서에서 한 진술을 토대로 해서 살펴 볼 때 그가 22년 귀국 시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 선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건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 했다.

"1924년 1월에 출감하였으나 전날의 사명은 결코 방기할 수 없다는 결의 아래, 경성에서 사회주의 연구를 계속했다. --- 나는 경성에서 바삐 다니던 중, 자신과 같은 뜻을 지닌 자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고 드디어 1925년 4월 19일 내 집에 --- 사람을 모아 고려공산청년회의를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註2)

조공은 1925년 4월 27일 창당되었는 데 박헌영은 해방 때까지 정식으로 입당 수송을 밟아 공산당원이 될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의 엄중한 탄압과 1928년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결정하는 등 외적 조건이 나빳기 때문이다.註3)

박헌영은 공청사건으로 1925년 12월 검거되어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되어 28년 8월에 국외로 탈출하여 29년 6월 모스크바로 가서 마르크스학원에 입학하여 러시아어와 공산주의를 연구하다가 중도에 자퇴하고 브라디보스톡으로 와서 조선일 초등교사를 하였다.

제3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 (1932~1946)

32년 12월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공산당 재건 운동을 준비하다가 이것이 밝혀져 33년 상해에서 체포당해 국내로 압송되서 6년간 복역 후 39년에 출옥했다. 그후 박헌영은 콤그룹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41년 6월과 12월에 관련자가 대부분 검거되자 광주 벽돌 공장에 피신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숨어서 지냈다.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박헌영은 20일에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이하 재건위)를 조직하고 재건위의 정치노선과 활동방침으로 8월테제-「현정세와 우리의 임무」(이하 임무)註4)를 발표한다. 재건위의 의미는 25년 창당되어 28년 해체된註5) 조공을 재조직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서 이는 과거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당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45년 9월 15일에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선포한다. 이것은 이전의 서울계, ML계, 화요계가 만든 '장안당'을 흡수, 통일된 당 형태를 조직하는 형태를 띠고 이루어졌다.

'신전술'(1946.7) 이전까지의 이 시기에서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소-영-미-중"註6)이라고 하면서 미국을 우호적으로 표현하였다. 실제로 당시에 있어서 남로당의 '미군정에 대한 좌익의 정책은 우의적 친선 방향'註7)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 초기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이 그 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평화적 방법으로의 이행이라는 노선에 서 있었다.註8)

제4기 자주적인 민족국가건설의 실패와 신전술 (1946~1953)

신전술은 해방 조선에서 그간 실시된 미군정의 정책과 그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8월테제에서 박헌영이 주장한 정치노선이 국가라는 조직된 가장 강력한 물리력에 의해 실패되면서 박헌영은 미국을 이제 과거의 일본과 동일한 위치에 놓는다.註9) 이제 그는 시민사회에서의 혁명적 열망을 조직해 식민지적, 파쇼적 국가기구(미군정)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이 한반도 전체적인 차원에서 일어났던 계급투쟁의 최고차적 형태인 내전(한국전쟁)이었다.

신전술의 정신은 이렇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군정에 협력하여 왔으며 미군정을 비판함에 있어서는 미군정을 직접 치지않고 --- 간접적으로 미군정을 비판하였으나 앞으로는 우리가 이런 태도를 버리고 미군정을 노골적으로 치자 --- 지금까지는 미군정과 그 비호 하의 반동들의 테러에 대하여 그저 맞고만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맞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 갚자."註10)

이러한 신전술 아래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났고 박헌영은 체포령이 떨어져 월북했다.註11)

몸말

임무」(8월테제)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Nationalism)적인 요소와 이에 대한 이해

'임무'에서는 해방조선에서의 혁명의 단계를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설정함으로써 서구에서 그와 같은 단계의 혁명 결과로서 나타난 것들 - 민족국가의 설립과 봉건적인 토지제도의 철폐를 전략적 과제로 설정했다. 즉 "금일 조선은 부루주아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를 걸어가고 있나니, 민족적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과업으로 서있다. 즉, 다시 말하면 일본의 세력을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구축하는 동시에 모든 외래자본에 의한 세력권의 결정과 식민지화 정책을 반대하고 근로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정권을 내세우는 문제와 동시에 토지문제의 해결이다."註12)

여기서 '일본세력을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구축'한다는 것은 두가지의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민족적 완전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세력을 완전히 구축해야 된다"註13)는 것과 "--- 반제투쟁의 과업 --- 완수 ---, 즉 조선으로부터 --- 친일세력을 일소하였느냐 하는 문제"註14)의 해결이다. 이와 함께 "전쟁시기에 군사적 제국주의적 전시계엄상태 밑에서 모든 운동은 물론이고 하찮은 자유사상의 언사까지도 극악의 탄압"을 했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대중적 검거는 비합법적 조직운동을 극도로 위축"註15)시켰는데 이런 파시즘적인 상황을 제거한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박헌영이 제기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정치적 내용은 반제반파쇼민주주의혁명이었다. 그런데 반파시즘전선이라는 것은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에 부과된 外來的인 것이라는 점에서 실제적으로는 반제국주의적인 투쟁의 한 요소로서 포함될 것이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쟁점과 과제' 삽화 사진 - 고대대학원신문, 1993.1.11, 정해구 (레포트와 함께 철해져있던 에세이)
이런 정치적 목표달성을 위해 박헌영이 내세우는 것은 '혁명적 민주정권, 혁명적 민주주의 조선, 인민정부'이다. 이것은 "--- 조선의 완전독립을 달성하기 위야는 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를 숙청[하고] ---, 조선인민의 이익을 위하야 --- 실지로 투쟁 --- 하며, 세계평화와 전쟁방지를 위하야 민주주의제국과 친선할 것[이고] ---,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장 잘 실천하는 조선공산당과 협력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註16)인 "진보적 민주주의 제단체의 집결로서 전조선민족통일전선"註17)을 결성하고 이 "민족적 통일전선"註18)의 기초 위에서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연합군에 의해서 조선이 해방된 상황 속에서도 반제라는 문제와 민족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문제를 하나의 전략적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가장 민족주의적인 해결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박헌영의 이런한 정치노선의 민족주의적인 성격은 장안파의 주장과 레닌이 1905년 러시아혁명 시에 제시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라는 테제와 비교해 본다면 더욱 뚜렷해 진다.

장안파는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자의 긴급임무」와 「현단계의 정세와 우리의 임무」註19)를 발표했는데 앞의 것에서는 '8.15일 이래 조선혁명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대상으로 하는 혁명의 제1단에 돌입하였고, 이제 조선이 독립됨으로써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 과업이 거의 완수되었으므로 금일부터는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혁명에로 단계적, 서열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혁명이 동시에 수행되면서 전자가 후자의 일부분으로서 그 안에 포함된 형태에서 전개되어 나가는 제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동시혁명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뒤의 문건에서는 이제 혁명이 제2단계로 돌입하였으므로 세력배치가 '자유주의적 민족부르조아의 반동적 저항을 진압하고 농촌 중농과 도시상공층의 동요, 불확실성을 견인 혹은 중립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의 영도 아래 농업 프롤레타리아와 인구의 압도적 다수인 반프롤레타리아(빈농)의 강고한 혁명적 동맹을 통하여 농촌 및 도시 소부르조아와 일정한 통일적 전선체제의 광범위한 형성'註20)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극좌적 경향'이라고 비판하면서 "금일 있어서 벌써 우리가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의 중요과업(완전독립과 토지혁명)을 완전해결은 커녕 이제 시초의 찻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처지"註21)라고 주장하면서 '반민주주의적 경향을 가진 반동단체(한국민주당 등), 대지주,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와 친일파들과 싸울 것을 주장한다.註22) 즉 그는 장안파와는 달리 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를 청산할 때까지 민족부르조아를 포함한 전민족적인 연합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레닌이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두가지 전술」에서 제시한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단계에서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라는 테제와 비교해보아도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레닌의 테제는 박헌영의 8월테제보다도 장안파의 주장에 훨씬 더 가깝다. 왜냐하면 레닌은 1848년 독일혁명을 마르크스가 분석하면서 어떻게 혁명을 가속화시켜 連續的(또는 同時的)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까지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러시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열기가 부르조아의 나약함을 극복하고, 혁명의 단계를 中層的으로 결정하면서 부르조아혁명을 넘어서까지 나갈 것이라고 보고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로 속히 넘어가게 만들기 위하여 그 전제조건인 제문제, 반제-반봉건투쟁으로 그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고 또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의 수립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확립이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족적 통일전선의 실현을 강조"註23)하면서, 그는 "일본제국주의 잔존세력 構築과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세력을 완전히 근멸-청소하기위한 --- 투쟁과업을 실행하지 않고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다"註24)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는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을 해방조선에서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독자적인 혁명단계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해방조선에서 어떠한 정치적 당파보다도 더욱 더 민족주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8월테제를 근거로할 때 박헌영은 '민족주의적'이었다. 구체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서 그가 취한 실천과 정치노선을 볼 때 그를 따라갈만큼 확고한 민족주의자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실천 속에서 드러난 이런 민족주의적인 속성은 미군정의 실체를 파악하면서부터는 더욱 더 강화되고 확실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민족주의자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은 실제 식민지적인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운동을 전개했던 한 혁명가가 도출해낸 해방을 향한 도정의 일부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조선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로 속히 넘어가게 만들기 위하여 그 전제조건인 제문제, 즉 반제-반봉건투쟁으로 그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고 또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의 수립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확립이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족적 통일전선의 실현을 강조"註25)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헌영이라는 사회주의라는 단호한 사상으로 무장된 역사적 인물의 양면성을 볼 수 있다. 즉 그의 사상과 현실의 갈등이다. 문제는 여기서 무엇이 그의 본질(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의 본질을 공산주의자 박헌영에 놓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의 사회적 역관계 속에서 엄연한 공산주의사회(사회주의사회)를 추구하는 정치적 당파의 지도자였고, 그의 실천행위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와 그의 사상성으로부터 논리적, 역사적으로 추론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민족주의적'이었다. 그것은 한 인간이 토대의 제약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가장 공산주의적인 실천 자체가 가장 민족주의적인 실천이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서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실체는 하나지만 그 속성은 무한한 것이다. 그리고 한 공산주의자에게 있어 그 속성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결정지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 해방 조선, 미군정 하의 조선이라는 상황이 그를 민족주의자로서 판단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나왔다는 의미에서 나는 박헌영을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라고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민족주의적'이라는 형용사가 '공산주의자'라는 실체를 규정지으면서 '박헌영 자체'를 역사적인 인물로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라는 판단은 해방 이후 왜곡되어 온 우리의 역사를 볼 때 훨씬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된다. 「보론」을 보면 뚜렷해지듯이 박헌영이 주장했던 일제청산 - 억압적인 국가기구의 청산이야 말로 현시대에 우리 민족, 즉 그 주체인 노동자 민중의 가장 큰 과제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미제국주의에 의한 종속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걸어 온 우리 민족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모색의 과정에서 기존 보수 우파와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글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는 박헌영의 노선에 대한 역사적인 비판이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글의 성격상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헌영에 대한 현시점에서의 평가와 반성은 없다. 둘째는 글 자체가 '박헌영을 민족주의자로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것에 촛점이 되면서 그런 측면을 너무 부각 - '과잉 결정'했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글이 전체적으로 그의 사상(정치노선)에 한정지어 살핌으로써 이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고 할 수 없는 정치적 실천(구체적인 정치적 사건들에 의한 그의 실제적인 행동들)과의 유기적인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이글은 8월테제에 나타난 '정치적 담화'와는 어느 정도 모순되게 나타나는 (이것을 '좌익적'이었다라고 김남식은 평가했다.) '실제 행동'을 극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는 데에 「보론」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註26)

후주 --------------------------------------------------

1) 김남식, 심지연 편저. 『박헌영 노선비판』(도서출판 두리, 1986, 서울), p.16.
2) 같은 책, 「(자료 8) 피의자 신문조서」, pp.94~98. (강조는 필자)
3) 같은 책, pp.20~21. 코민테른의 조공해체 결정내용은 다음과 같다. (1)지도부가 거의 지식계급과 학생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2)계급적 혁명당이 아니라 소부르조아 정당이며, (3)파벌싸움이 중요한 害黨的 요소라는 점을 지적하고, (4)과거를 청산하고 새 방향에서 당을 재건하라고 결정했다. (방인후, 『北韓朝鮮勞動黨의 形成과 發展』(고려대출판부, 1967), 같은 책, p.29에서 재인용)
4) 8월테제를 발표(45.8.20.)한 후위 정치상황, 특히 콤그룹의 반대세력인 장안파의 주장과 움직임 등을 이미 발표된 8월테제에 반영시켜 9월 25일에 발표한 것이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것이다. 이글에서 다루는 것은 '임무'이다.
5) 주3)을 참고할 것.
6) 같은 책, 박헌영, 「임무」, p.181. (강조는 필자)
7) 같은 책, 박헌영, 「10월 인민항쟁」, p.449.
8) 하지만 8월테제가 적용되던 이 시기(1945.8.15~1946.7.)는 시민사회에서 압도적 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좌익의 힘이 일제하에서 '과대성장된' 국가기구가 해체(파괴)되지 않음으로서 그 국가기구(미군정)에 의해 파괴되고 우익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던 기간이었다. 「보론」을 참고하기 바란다.
9) 박헌영은 미국의 대한정책이 처음부터 자유독립의 방향이 아니라 침략적인 것으로서, 독립을 원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점령하려는 것이며 반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 「人民에게 告함」(48.4.12.), 『박헌영 노선비판』, p.80에서 재인용. 강조는 필자)
10) 김남식, 『南勞黨 硏究』(돌베개, 1984, 서울), pp.235~236. (강조는 필자)
11) 박헌영의 생애에 대한 시기구분은 역사적인 사건에 의한 것보다도 박헌영 자신이 의 도했던 특정시기의 정치적 실천을 통해했다. 참고로 역사적인 사건에 의한 구분은 다음과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종성, 『朴憲永論』(인간사랑, 1992, 서울), pp.32~42.
12) 같은 책, 박헌영,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9.25.), p.182. (강조는 필자)
13) 같은 책, 박헌영, 「朝鮮共産黨의 主張 - 朝鮮民族統一戰線結成에 對해」(1945.10.30.), p.202.
14) 앞의 책, p.202.
15) 같은 책, 「임무」, p.184.
16) 같은 책, 박헌영, 「朝鮮共産黨의 主張 - 朝鮮民族統一戰線結成에 對해」, p.203.
17) 앞의 책, p.203.
18) 같은 책, 박헌영,「임무」, p.195.
19) 전자는 장안당이 만들어지면서 발표된 것이고, 후자는 장안당이 재건위에 통합되어 조공이 재창당되던 날(45.9.15.) 발표된 것이다.
20) 같은 책, 박헌영,「임무」, p.194에서 재인용. (강조는 필자)
21) 앞의 책, p.182.
22) 앞의 책, p.194.
23) 앞의 책, p.195.
24) 같은 책, 박헌영, 「단결력으로 싸우자」(1945.11.15.) (강조는 필자)
25) 같은 책, 박헌영,「임무」, p.195. (강조는 필자)
26) 8월테제가 가지고 있는 토지혁명의 문제를 몸말에서는 다루지않았다. 그 이유는 토지혁명이라는 것을 두고 보면 다양한 견해가 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이글에서 다루려는 민족주의적인 풍모를 가진 박헌영이라는 주제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토지문제를 박헌영이 생각함에 있어서는 다소 모순된 주장을 스스로 전재하지만 부르조아혁명에서 나타나는 토지개혁 이상까지 나갔다는 것이고, 이것과 그의 실제적인 정치적인 실천을 근거로하여 박헌영을 좀 더 레닌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라는 테제와 근사한 수준까지를 추론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동유럽과 북한의 경험을 통해 볼 때 8월테제의 노성이 성공했다면 곧장은 아니더라도 인민민주주의 정권으로까지 발전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했다(실제 박헌영의 정치노선의 깊숙한 곳에는 이런 판단이 내재되어 있다). 이글에서는 그곳까지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보론」에서 실제 쓰여진 기본적인 관점은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의 가능성이라는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글에서는 그런 측면을 배제하려고 노력을 했다. 왜냐하면 이글에서 살피려는 것은 박헌영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것이지 사회구조나 변혁의 방향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측면까지 쓴다면 글의 양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보론」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이런 이유로 나는 박헌영 개인이 말하고, 썼던 1차 자료에만 충실하려고 노력을 했다. 따라서 「보론」과 이글에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1992년 고려대 최상룡교수의 민족주의론 레포트 표지
     ▲ 2008년 1월 이사짐 정리 중 발견한 최상룡교수의 '민족주의론' 레포트
         누렇게 변해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15년이 넘었다.

연꽃 - 내용 나눔 그림막대

남한 사회에서의 국가 형성 - 과대성장국가이론을 중심으로
1. 우리가 단순화시켜 생각한다면 “8•15로부터 한국전쟁이 완료되는 1953년까지의 시기는 ‘갑작스런’ 해방에 의해 식..
2008/03/14 23:36 2008/03/14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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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소식에 거리로 나와 열렬히 환호하는 조선 民人
     사진출처: http://kr.blog.yahoo.com/cks21kj/folder/2675336.html

1.

우리가 단순화시켜 생각한다면 “8•15로부터 한국전쟁이 완료되는 1953년까지의 시기는 ‘갑작스런’ 해방에 의해 식민지시대의 어떤 계급도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두 가지 길, 즉 ‘혁명적 민주주의적 길’과 ‘신식민지적 자본주의적 길’ 간의 첨예한 투쟁이 전개되었던 시기”註1)라고 할 수 있다. 왜 이것이 ‘단순화’된 생각인가 하면 처음부터 이러한 두 가지 경향만이 역사적으로 선택될 가능성을 가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선택의 가능성들이 상존해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이 내외부적으로 조건 지워진 서로 다른 정치적 집단들의 투쟁이라는 역동적 과정 속에서 위의 두 경향이 서로 형성•강화되고, 서로 대립되면서 내전이라는 파국적 상황까지 달려나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당시의 한국사회가 서 있던 내외부적인 요소들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하여, 그것에 조건 지워져 서로 투쟁하는 상이한 계급•계층적 이해를 담지한 정치세력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 투쟁과정 속에서 두 가지 경향이 생성•대립하면서 특수하게 나타나는 남한 사회에서의 국가형성과정을 살피겠다.

2.

해방 이후의 남한 사회에서의 폭발적인 계급투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하에서 형성된 혁명과 반혁명의 물질적 기반을 살펴야 한다. 여기서는 반혁명의 기반을 이후 논의를 위해 좀 더 자세히 살피기로 하겠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한 부르주아국가와 거기에 수반되는 법적, 제도적 틀의 확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식민지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은 메트로폴리탄 부르주아에 의한 식민지 통치의 부과와 함께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나 식민지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메트로폴리탄 부르주아의 과제는 단순히 메트로폴리탄 국가 자체에서 확립했었던 국가의 상부구조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부가적으로 그것은 식민지 고유의 사회적 계급들 모두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기구를 창립해야만 한다. 따라서 신민지의 ‘상부구조’는 식민지의 ‘구조’와 관련하여, ‘과대성장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註2) 이것은 신민지 조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서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는 다른 식민지 국가와 비교해 볼 때 ‘과잉결정되어진’ 과대성장된 상부구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메트로폴리탄 국가(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일본의 상부구조의 형성은 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는 사뭇 다르게, 즉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은 고도의 중앙집권적인 상부구조(메이지 정부)를 가졌고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과대성장된 상부구조에 ‘더 부가된’ 상부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헨더슨은 일본의 식민주의가 유럽의 식민주의보다 더 혹독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전체적’이라고 표현한다.註3)

3.

해방 이후의 정치적 계급투쟁 속에서 반혁명적 경향이 강화되는 세력은 식민지 조선에서 경찰, 관료체제에 종사한 계층들과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재래의 토지관계를 인정받은 지주계급이었다. 이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일본의 지배에 협력한 관계가 있어 해방된 한국에서는 정치적 정통성이 결여註4)되어 있었지만, 1945년에는 지주제도의 유지, 공업의 개인소유, 부일협력자에 대한 무처벌 혹은 가벼운 처벌, 일본치하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의 권력유지 등을 주장하면서 시민사회에서 자신들을 제외한 아무런 동조자들이 없이 있다가註5) 미군정의 실시와 함께 무섭게 조직화되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직접적으로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한 미군정의 정책에 원인이 있었지만, 빠른 시간 동안에 관계의 역전이 가능했던 것은 시민사회를 압도하는 식민지적 국가기구의 부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에서의 과대성장된 상부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승주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대표적인 억압적 국가기구인 경찰의 확대 원인과 과정을 보여준다. “1945년, 한국이 일본의 36년 간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될 당시까지 일본 총독은 동경에 있는 일본 본국 정부에만 책임을 지면서 한국 민족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다. 총독의 주요 통치수단은 각종 제국법령과 계엄법, 선언, 행정명령이었다. 이러한 각종 법령은 그것이 한국 민족에게 어떻게 수용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은 채 발표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효과적이고 엄격히 조직된 경찰력을 필요로 하였다. 한국의 경찰관수는 한•일 합방 4년 전인 1906년에 3,359명에서 1919년 전국적인 항일시위가 있은지 4년 후인 1923년에는 20,758명으로 증가하였다. 경찰력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이 수준을 유지하였다. 1939년의 경우, 경찰력의 약 40%(23,268명 중 8,644명)가 한국인이었고, 한국인들은 대개 최하급 경찰관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시기 일본경찰은 한국의 정치•경제•문화활동•교육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전면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註6)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의 관료체제는 “한국사회의 상부에서 권위적이며 위압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상층계급과 식민지의 벼락출세자들-양반, 지주, 관료 등-하고만 연결도었으며, 그러한 연결조차 빈약한 것이었고, 국가의 업무에 실질적 참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을 해소 내지 물리치기 위한 방편에 그쳤다. 일반적으로 보아, 일본은 힘의 균형을 전환시키고자 자원을 미증유의 규모로 동원하고 수탈하는 수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한국에서의 중앙관료세력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주변과 희미하게 연결된 허약한 관료체계가 아닌, 위에서 밑바닥까지 침투하는 명령계통이 발전되었다.

한국의 정세를 식민지하의 베트남과 비교한다면, 프랑스는 1937년에 1천7백만 베트남인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행정인원 2,920명에 정규군 10,776명을 배치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은 2천1백만 한국인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그라쟌체프가 식민체제에 속했다고 분류한 분야에 일본인이 약 246,000명이 공공 및 전문직에 종사하였으며, 유사하지만 종속적인 지위에 한국인을 약 63,000명이나 채용하였다. 1937년에는 한국에 거주한 일본인의 42% 정도가 총독부에 종사하였다. 이에 비한다면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아주 얇은 계층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지명 같은 혁명지도자는 영국의 인도 통치에 비하여 많은 프랑스인들의 존재를 자주 지적했었다.”註7)

즉, 식민지 조선에서는 서구와 달리 시민사회의 형성도 있기 전에 전사회를 지배하는 근대적인 관료체계와 경찰력을 가진 ‘과대성장된’ 국가기관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시민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그것은 조선에서는 외래적인 것이어서 자신의 통치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국가기구의 비대화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4.

식민지 조선에서의 과대성장된 상부구조는 1945년 해방 이후 관찰되는 시민사회의 급속한 팽창 속에서 해체되어 간다. 이와 같은 시민사회의 팽창 현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일제의 식민지통치 체제를 지지하는 어용적 정치사회 단체를 제외하고는 밑으로부터 일체의 정치적, 사회적 요구의 자발적 표출을 금압하였던 억압적 통제기제가 갑작스레 제거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다.”註8) 물론 이러한 시민사회의 폭발이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 및 농민조합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조직경험이 있었다. …… [조선]노동총동맹은 특히1929년 3개월에 걸친 원산총파업을 일으키는데 큰 성공을 거둔 바 있었다. ……농민조합들은 ……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걸쳐 소작분쟁을 주도했을 때 거둔 성공 [경험이 있었다.] …… 당시의 적색농조들은 한국 전역의 군(郡)들에 1945년에 부활할 수 있는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註9) 식민지 조선 후반기에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자, 농민들의 조합이 한편에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측이 주도한 애국 및 반공단체들이 한국사회의 모든 계층에 존재註10)하였고, 이들 중 전자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면서 탄압이 극심해비면서 10여년간 지하에 잠복해 있다가 해방되면서 수백만의 노동자, 농민을 현대적인 정치투쟁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해방 후 시민사회의 소생과 급팽창 과정을 살펴보면, 해방 후 두달도 지나지 않아 미군정청에 등록된 정단수는 54개였고, 그 후 1년 이내에 그 수는 300여개에 이른다. 이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의 대중적 기반이 되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방조직은 중앙기구가 8월 15일 창립된지 불과 수일 사이에 전국에 퍼져 8월 말에는 마을 단위까지 존재한 ‘인민위원회’가 농민조직과 대응하면서 가득 차 있었다. 전국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총평의회 산하 노동조합의 조직화는 3개월 이내에 가맹조합 수 1,194개와 조합원 20만을 기록하는 세계 노동운동사상 전무후무한 조직화의 속도와 조직을 보여준다. 그리고 청년단체, 학생단체, 부녀단체, 문화단체, 종교단체와 정치적, 사회적 이해를 달리하는 무수한 단체가 조직된다.註11) 이렇게 급속히 팽창된 시민사회의 조직들은 곧 바로 식민시대의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해체해나간다. 그러면 해방과 함께 식민사회의 유물로서 제거 대상이 되어버린 경찰•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의 해체 및 변화 과정을 살펴보자.

8월 16일 몇몇 건국준비위원회 간부들이 건국청년치안대-9월 2일 공식적으로 건국치안부로 명명-를 조직하고 전국에 걸쳐 162개의 중앙의 추인을 받은 지부가 구성된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이 “남한에서도 치안대는 식민경찰의 한인분자들을 철저하게 추방시켰다. 관련 소식통에 따르면 8월 15일과 9월 8일 사이에 일본인 경찰관의 90%가 그들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같은 시기에 한일 경찰관의 80%가 일을 멈추었던지, 쫓겨났든지, 혹은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한인들이 식민경찰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경찰력의 뚜렷한 약화를 초래한 것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직위에 머물러 있던 경찰의 대다수도 치안유지보다는 자기보호에 급급해 있었다. 따라서 치안대는 8•15 이후 치안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註12)

8•15 직후 수일 내지 수주 사이에 일본군 출신의 장병들이 주도한 상당수의 군사적•준군사적 단체들이 나타났고 8월 중에는 이들의 대부분이 건준의 산하에 있으면서 조선국군준비대를 조직한다. 지방에서는 건준과 국군준비대의 지도층이 서로 얽혀 있기도 했다. 국군준비대는 남한 전역에 지대를 설치했으며, 대원 6만 명을 모집하여 그 중 1만5천 명에게 약간의 훈련까지 시켜 비공식 군사기구 중 최강의 조직을 갖추고 치안 유지를 치안대와 함께 수행한다. 그러나 미군이 9월에 진주한 후 이 조직들은 무수한 사병들과 청년단체들로 분열되었다.註13)

식민지 관료기구들을 대신하여 새롭게 조직된 인민위원회가 한국의 군 중 약 반수를 지배하며 정부 역할을 담당한다. 대부분의 인민위원회들은 조직, 선전, 치안(혹은 보안), 식량관리 및 재정의 부서를 갖추었고, 해당 지역의 절대적 필요에 따라서 구호, 난민, 일용품, 노동관계 및 가장 흔한 것으로 소작료 등을 다루는 부서를 갖추기도 했다. 지방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학생들과 귀향한 정치범들이 주된 역할을 맡았으며, 이들 중에 많은 공산당원들이 있어서 지방의 당 세포조직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지방 인민위원회 조직에는 학생, 제대군인, 지방의 엘리트, 지방의 지주, 심지어 일본치하의 전직 관리까지 참여하였다. 이 모든 것이 해방 후 한국에서 일어난 조직 팽창의 일부이다. 해방의 흥분된 분위기와 가슴 속에 누적된 농민들의 불만이 한반도 전역에 걸친 인민위원회의 급속한 전파(조직의 팽창, 시민사회의 팽창)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전적 혁명을 농민들이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서처럼 유리한 기회를 보았을 때 지방 관리들, 경찰들 및 지주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군, 읍 및 마을에서 고전적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해방 후 시민사회의 급속한 팽창 속에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경찰력이 구성되었으며, 인민위원회들이 행정을 인수하였다. 하지만 몇몇 지방에서는 구질서와 새질서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나란히 서있기도 했으며, 몇 안 되는 지방에서는 새질서가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것 역시 고려하여야 한다.註14)

5.

“해방 직후의 미소냉전의 급속한 전개가 상이한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동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일제 유제의 청산과 민족독립국가의 형성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념적 바탕이 될 민족주의라는 정의적(情義的)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연계될 수 있었던 상황 조성을 일찍이 분쇄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그에 적대하는 이데올로기를 불러일으키는 식으로 모든 정치사회적 대식을 양극 분해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전치시켰다.”註15)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점은 해방 직후 다수의 정치세력들이 ‘상이한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동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일제 유제의 청산과 민족독립국가의 형성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념적 바탕이 될 민족주의라는 정의적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연계될 수 있었던 상황’이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기간엔 공산주의자인 좌파, 비공산주의자적 사회주의자들인 중도파, 그리고 민족주의 좌파가 연합하여 건준을 조직했고, 앞에서 살폈던 바와 같이 정치적 정통성에 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민족주의 우파들은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 하며 조직구성 노력을 주저하면서 건준에도 참여를 거부했다.註16)

하지만 “항일투쟁에서 단련되어 온 공산주의자들과 좌파인사들에게 있어서 민족주의가 국제주의보다 앞섰[고 따라서] …… 인공의 영도자 명단은 좌파의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양파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반영했다. …… 9월 8일에 인공은 내각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좌와 우의 진정한 연립정부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註17) 그리고 해방정국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살펴보면, ‘민족주의 우파(극우)’라는 명칭을 부여 받은 한민당 등도 당시 정파간의 상대적 비교를 위한 ‘비교서술’적 개념으로는 적합한 것일지는 몰라도 이들 경제강령의 내용을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분류기준에 맞추어 보면 오히려 이들에 대한 분류는 ‘좌익’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정도로 좌경화되어 좌측의 반쪽 지형에서 싸움이 이루어질 정도로 ‘좌경 반쪽 지형화’되어 있었다.註18)

이러한 전체적 이데올로기 지향의 전반적 좌경화 속에서 우리는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지적한 바 있는 ‘혁명적 민주주의적 길’이 선택될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즉 ‘비(非)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의 지향성을 가지면서 경제에서 국가부문이 지배적이고 산업활동이 국가주도로 이루어지는 ‘국가자본주의’적 토대형성의 가능성과 이에 조응하는 상부구조인 ‘민족민주국가’ 수립의 가능성이다.註19)

<표> 해방정국과 제정파의 경제강령 비교

 

극우

(임협,한민당)

중도우

(입헌의회)

중도파

(시협)

극좌

(민전,남로당)

극좌

(북로당)

생산수단

소유형태

: 공유 내지
국가경영

: 국방산업
외 사유

: 사유

좌동

: 국가경영
: 관민합영

: 사유

: 국유화

: 국유·공유

: 대체로
  
사유, 공유

공공기관과 지하자원 국유, 기타 국공사 혼합

경제
운영방식

통제경제

계획경제

 

계획경제

계획경제


※ 주:여기서 ‘극우’, ‘극좌’는 제정파간의 상대적 관계를 구별하기 위한 ‘서술적’ 명칭일 뿐 제정파의 구체적 내용을 평가한 ‘평가적’ 개념은 아님. 그리고 ‘북로당’에서 공공기관은 은행, 철도, 전기 등이고, 기타에는 소매업, 회사, 수공업이 속한다.

<그림> 해방정국의 이데올로기 지형(좌경 반쪽 지형)

해방정국의 이데올로기 지형

하지만 시민사회에서의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의한 억압적 국가기구의 파괴와 좌경화된 이데올로기 지형의 구축은 미군정의 시작과 함께 억압적 국가기구의 부활•강화와 이데올로기 지형의 우익화 과정으로 진행되었고 한국전쟁은 이것을 ‘가속화’시키고, 한국은 민중부문을 배제시킨 ‘종속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걷게 된다.

6.

8월 28일부터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다는 말이 퍼졌으며 우파들도 그날부터 조직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우파는 연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한민당의 핵심세력은 지주, 지주출신의 생산업자 및 출판업자들의 집단이었고, 한민당은 식민총독부에서 고관을 지낸 많은 사람들-이들의 대부분 또한 지주들이었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註20) 그러나 시민사회에서의 ‘정치적 정통성의 결여’와 지지 기반의 미약 속에서 그들의 최대강령-봉건적인 토지관계의 지속-이나, 최소강령-지주 및 기타 한국의 엘리트들에게 토지든 혹은 다른 형태의 자본이든 간에 그것에 보다 특이하고 우월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기존의 사회적 지배구조를 유지시키라는 것-의 실현은 모두 미군에게 달려있었다.註21)

거리를 행진하는 미군과 그들 바라보는 시민들
     사진출처: http://kr.blog.yahoo.com/cks21kj/folder/2675336.html

1945년 9월 7일 미 24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 미국은 미군정이 남한에 있어서의 유일한 정부라고 하고, 행정•입법•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직접통치」를 시작했다. 미군정은 우선 조선총독부의 기구 및 많은 인원을 그대로 유임시켜 이용했다. 그리고 점령목적에 필요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이용하면서 남한에 있어서 좌파세력의 앙양을 저지하고 ‘친미적 정권’을 육성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정했다. 요컨데 남한 공산화의 저지라고 하는 기본방침은 명백했으나 구체적 준비 없이 진주했기 때문에 미군은 우선 앞에 말한 미군정에 의한 직접통치를 통하여 현지 남한의 실정을 익히는 한편 미국인의 감각에 맞는 우파세력을 형성하려고 했던 것이다.註22) 그 구체적인 정책의 전개과정에 대한 분석은 본론의 범위를 넘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미군정기의 지배연합의 형성과 억압적 국가기구의 부활을 중점적으로 살피겠다.

미군정은 가장 먼저 친일 관료세력들을 대부분 재등용시켰다.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주인만 바뀐 채 관료세력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자본가계급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은 일정 기간 동안은 남한 내의 지배계급으로서 지주계급을 민중들의 요구를 배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동맹세력으로 삼았다. 국내에 지지기반을 갖지 못한 미군정에게 지주계급의 급속한 몰락은 권력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에 의한 지배는 이후 미국 독점자본의 이해가 남한에서 관철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미군정은 민중들의 요구를 배제하기 위해서 억압적 국가기구로서 경찰력과 함께 준국가기구로서의 우익청년단체들을 이용했다. 이와 같이 미군정기에는 미군정을 중심으로 식민지 관료세력 및 식민지 경찰세력, 우익청년, 그리고 민족주의 우파세력의 핵심인 지주계급들을 주축으로 하고, 국내 자본 및 미국 독점자본을 보조축으로 하는 지배연합이 형성되었다.註23)

미군정은 남한에서 가장 잘 조직되어 있는 식민지 관료체제를 시민사회에서의 대중의 정치적 동원 속에서 해체되어 가던 것을 저지시키고 다시 부활시켰다. 더욱이 관료체제는 북한에서의 철저한 숙청작업을 통해 쫓겨난 부일 관료들이 남하하여 ‘개편된 총독부, 혹은 미군정에 봉사할 수 있는 관료수는 아마 배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식민관리들은 미군 사령부와 한민당 내에서 적극적인 동맹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한민당의 지도층은 관료체제의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였다.註24)

미군정 하에서 식민지 시대의 군사법령, 정치집회금지법, 선동문서통제령, 치안유지법 제2호 등이 계속 발효되었고, 식민법률들이 자주 판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시민사회에서의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서 출판물의 검열권, 모든 정당의 등록규정 및 점령에 ‘유해하다’고 인정되는 모든 것을 방지하는 점령군의 고유한 일반적 권력에도 많이 의존하였다. 또한 일본의 사법부에 종사했던 조선인은 전원 유임되었고, 가장 중요한 직책은 또 한민당으로 돌아갔다.註25)

미군정의 시작과 함께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가 ‘고도로 중앙집권화 되었고, 자족하는 전국적 부대’로서 식민지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경제•문화활동•교육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전면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전제적’인 식민지 경찰체제의 부활이다. 최상룡의 글 속에서 보았듯이 미군정은 좌파세력의 앙양 저지와 친미적 정권수립이라는 정책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모두 실현시킬만한 우파세력이 사회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을 수행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이 부일 협력자들을 축출•처벌하고자 하는 좌익에 대해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인공과 인민위원회를 해체하는데-좌익의 집권을 막아야 하는데-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응집되어 있는 국립경찰이었다. 미군정 하에서 남한 내의 경찰은 식민지 시대의 억압적인 ‘사상통제•비밀경찰업무’ 등과 같은 업무를 계속 하면서 좌파를 탄압하였다. 또한 ‘반대파에 대항할 조직과 대중적 기반이 없는 우파들’에게 경찰체계는 정치투쟁에서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註26)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을 점령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친소세력이라고 판단되는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로서 ‘특정한 지도자나 단체 혹은 연합체’를 제외하고는 많은 단체들을 미군정청은 좌익으로 분류하여 정치권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제하였다. 따라서 미군정은 ‘지나치리만큼 부호와 보수적인 인사들’을 끌어들여 남한 지배를 수행했다.註27) 미군정기의 지배연합의 형성은 “유약한 경제적 지배계층의 형성보다 미국의 전략적 목표에 부응하여 군정체제를 뒷받침할 지원세력으로서의 정치적 핵심집단의 형성”註28)이었고, 이것은 식민시대의 ‘과대성장된’ 억압적 국가기구를 매개로 이루어 졌다. 이러한 정치연합은 곧 바로 시민사회에서의 노동자, 농민, 중산층, 지식인 등의 폭발적인 정치 조직화의 탄압과 분쇄, 민중의 탈동원화를 의미하였고, 이것은 1946년 후반기에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성을 가진 세력간의 무력투쟁이라는 상황으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지방에서의 봉기가 지나간 후의 결과는 남한 정치의 거의 모든 무대에서 ‘우익 독재세력의 강화와 신장’이었다.註29) 결국 사회에서 좌파의 패배의 결과는 사회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어떤 나라보다 많이 확보한 국가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7.

민중들의 체제변혁의 도전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변화가 지배연합 내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농민들의 혁명적 열기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신한공사 소유의 토지분배, 농지개혁을 실시한 것이다. 그 결과 지배연합의 한 분파였던 지주계급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장기적으로 자본주의화에 장애가 되는 존재”註30)였기 때문이라는 추상적인 것에서 찾기보다는 추상성이 낮은 구체적 수준에서 국가를 ‘후기’ 풀란차스와 같이 “사회제세력의 힘의 역관계의 응집”으로 이해하면서 국가정책의 성격도 궁극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이 관철되는 구조적 한계 내에서 계급의 역관계에 따라 상대적으로 농민에게 유리한 이러한 정책이 수립되었다는 것에서 찾아야 옳을듯하다. 지배계급 전체의 입장에서 국가는 당시의 혁명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을 찾는다면 지배연합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관료•경찰세력에게는 시민사회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정당(한민당)이라는 것은 권력의 분배만을 요구하는 불필요한 존재로 비춰졌다는 것이다.註31) 따라서 제1공화국의 지배연합은 관료•경찰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성장하는 국내자본과 결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註32) 이러한 것은 당시의 ‘과대성장된’ 국가기구에 의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이 확보된 ‘상대적 자율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1공화국 기간 중에 억압적 국가기구의 양적, 질적 팽창에 또 한번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 것이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 중 군은 최고 70만 명, 경찰은 6만 3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종전 후에도 경찰은 3만3천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군은 60만명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註33) 그리고 이러한 ‘과대성장된’ 상부구조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역할, 즉 내전을 통해 형성된 반공이념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한국전쟁이 만료될 때까지의 격렬한 계급투쟁 속에서 식민시대의 산물인 ‘과대성장된’ 억압적 국가기구를 장악한 우파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전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면서 지배계급은 그람시적 의미의 정치적 헤게모니-‘능동적 동의’에 의한 지배-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부분적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은 그 전까지 이승만, 한민당 등 ‘극우세력’과 지배연합에 국한되어 있던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절대 다수의 국민들의 ‘수동적 동의’ 내지 ‘능동적 동의’로까지 유도해낼 정도로 확산되었다.註34) 이러한 ‘반공•반북 의식의 내재화’와 우파세력의 권력장악 속에 ‘우경 반쪽화된’ 이데올로기 지형이 형성되면서 해방 당시 형성되었던 좌익 헤게모니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적 국가요소와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들의 모순적 혼재 현상은 급속히 사라지고 ‘종속적 자본주의’ 국가가 성립되었다.註35)

8.

지금까지 계급투쟁을 매개로한 남한에서의 국가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작업은 50년대의 이승만정권의 ‘독재’와 60년대의 ‘군부독재’ 출현의 가능성을 밝히는 기초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70년대의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상부구조로써 ‘신식파시즘’ 체제의 용이한 구축이 가능했던 원인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 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시민사회의 재부활’과 억압적 국가기구의 해체와 사회의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과대성장국가론의 문제점은 알라비는 상부구조가 토대에 ‘비조응’하여 과대성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상부구조의 토대에 대한 ‘비조응’이라는 것에 반대하여 상부구조는, 일시적인 일탈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짧은 시간일 뿐이며 장기적으로는 토대에 ‘조응’한다는 것에 기초하여 쓰여졌다. 따라서 제3세계에 있어서 국가의 과대성장이라는 개념은 토대-상부구조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기구의 차원에서 상대적인 국가기구의 과대성장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알라비처럼 국가와 시민사회를 대립개념으로 놓고, 국가가 과대성장했다고 할 때, 헤겔류의 ‘사회로부터 군정의 절대적 자율성 확보’라는 이론의 국가주의적 신화로의 퇴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국가는 다만 사회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현재 남한 사회에서 보여지고 있는 정치현상들-재벌의 정치적인 진출은 ‘일탈’에서 ‘조응’으로 가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과거의 지배블럭이 파괴되고 새로운 지배블럭의 형성-지배블럭의 재편 과정-을 의미한다. 그 사이에 기존의 기득권 세력간의 정치적인 헤게모니 장악을 목표로 한 투쟁이 발생하고, 그것이 지배계급 내의 이전투구이다. 그 원인에 한국경제-자본주의적인 토대-의 발전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미주

1)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 pp.107~118.
2) Hamza Alavi, 「과대성장국가론: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국가란 무엇인가』(영일, 이성형 편역, 까치), pp.346~347.

국가란 무엇인가:자본주의와 그 국가이론 - 10점
임영일/까치글방
3)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p.40.
한국전쟁의 기원 - 10점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일월서각
4) 커밍스, 같은 책, p.121.
5) 커밍스, 같은 책, p.141.
6) 한승주, 「제1공화국의 유산」, 1950년대 인식』, pp.29~30.
7) 커밍스, 같은 책, p.41.
8) 최장집, 「과대성장국가의 형성과 정치균열의 전개」, 『한국현대정치의 구조와 변화』(까치), pp.82~83.
9) 커밍스, 같은 책, p.118.
10) 커밍스, 같은 책, p.114.
11) 최장집, 같은 책, pp.82~83. 커밍스, 같은 책, pp.346~355.
12) 커밍스, 같은 책, pp.114~115.
13) 커밍스, 같은 책, pp.116~117.
14) 커밍스, 같은 책, pp.346~355.
15) 최장집, 같은 책, p.83.
16) 커밍스, 같은 책, pp.134~135. 『한국민중사』(풀빛), pp.229~230을 참고할 것.
한국민중사 1:전근대편 - 10점
한국민중사연구회/풀빛
17) 커밍스, 같은 책, p.123, p.129.
18) 손호철, 「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지형」(역사비평, 1991 여름), 『한국정치의 새구상』(풀빛, 1991), pp.158~160.
19) 서울사회과학연구소, 같은 책, pp.107~127을 참고할 것. 손호철, 같은 책, pp.165~166.
20) 커밍스, 같은 책, p.124를 참고할 것.
21) 커밍스, 같은 책, pp.134~142.
22) 최상룡, 「分割占領과 信託統治」, 『現代韓國政治論』(법문사, 1986, 한국정치학회편), pp.110~121.
현대한국정치론 - 10점
한국정치학회/법문사
23) 『한국정치론』(백산서당), pp.228~229.
24) 커밍스, 같은 책, pp.206~213.
25) 커밍스, 같은 책, pp.213~216.
26) 커밍스, 같은 책, pp.216~222.
27) 『경제와 사회』, pp.201~202.
28) 최장집, 같은 책, p.86.
29) 커밍스, 같은 책, pp.531~532.
30) 『한국정치론』(백산서당), p.228.
31) 한승주, 「제1공화국의 유산」, 1950년대의 인식』(한길사, 1981), pp.29~30.
32) 『한국정치론』(백산서당), p.229.
33) 손호철,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연구 비판」(실천문학, 1989 가을), p.121.
34)
손호철, 「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지형」, 같은 책, p.160.
35) 손호철, 같은 책, pp.165~169.

연꽃 - 내용 나눔 그림막대

이 글은 1991년,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썼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져 구조화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이다. 자취방과 텅빈 강의실을 오가면서 공부하던 때가 그립다.

올해 1월 초 이사를 위해 짐을 정리하면서 누렇게 바랜 출력물을 찾았다. 그때는 PC가 흔하지 않던 관계로 워드프로세서(대우전자에서 나온 '르모'였던 것 같은데)로 작업하여 출력했다. 그때는 손으로 쓰고 입력하고 했다.

이 글을 읽다보니 사실에 대한 인식이 경험이 아닌, 이론 의존적이라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무수히 많은 경험적 사실(데이터)들이 이론에 걸러져 재배치/구조화되면서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이 만들어진다. 이때 과대성장국가론이라는 하나의 이론에 의지하여 한국사회를 이해했고 여전히 이런 이해의 연장선에서 90년대와 2000년대를, 오늘을 이해하고 있다. 과거/역사를 살피는 이유는 현재에 대한 이해를 공고히 하여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1945년 해방 공간에 대한 이해 - 민족주의적 과제와 억압적 국가기구의 기원
김수행 교수 인터뷰 - 우경반쪽 지형

blog icon 정치경제학적 분석방법

2008/02/13 23:35 2008/02/13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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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엔 이제 마르크스가 없다
‘유일한 마르크스 강의’ 김수행 경제학부 교수 퇴임

 
인터뷰에서 민주노동당이 중간 정도이고 한나라당이 가장 오른쪽, 통합민주신당이 그 가운데에 있다고 김수행교수가 말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손호철교수가 『한국정치학의 새구상』(풀빛, 1991, p.161)에서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그린 것이다.

손호철-해방정국과 한국전쟁 후 이데올로기 지형 비교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무엇이 변했을까? 아니 80년대 이후 지난 20년간, 또는 한국전쟁 후 지난 60여년간 무엇이 변했을까? 현상과 본질을 나눠놓고 변화 자체를 '현상적'인 것으로 놓고, 본질적인 관계-자본주의적인 착취관계-가 변화되지않았고 더욱 심화되었다고 이야기해야 하는가?

(우파들은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 좌파집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정치적 수사에 실소가 나온다. 이것을 되뇌며 전파하는 언론들이란! 그런데 이데올로기적 우위는 사회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로 만드는 것이다. 좌와 우가 상대적이라고 하지만 한국사회는 더욱 우측으로 간 것 같다. 민주노동당 같은 조그만 '좌파' 정당이 존재한다고 좌로 갔다고 할 수 없다. 김수행교수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상대적 진보성을 인정하지만 정강/정책에 있어 좌파 정당으로 평가하지 않는듯 하다.)

우리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심급에서의 변화, 또는 이를 설명할  그 '유명한' 물적 기반에 대한 규명을 해야하는데.. 대학 이후 정말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이런 이유를 찾아보는 것, 일반론적인 '국가론'이 아닌 구체적인 '국가론'을 쓰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할때, 나는 김수행교수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한다. 우경반쪽 지형이라고, 변화가 없다고 하자! 1980년대 이후 그럼 무엇이 변한 것인가? 나의 의식만이, 존재기반만이 변한 것일까? 세상은 그대로 인데... 아니면 세상이 변한 것일까? 세상이 변했다면 김수행교수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까? 변했다면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그대로 일까?

잠정적으로 서로 보는 세계가 다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한한 세계를 유한한 우리가 볼때, 서로 다른 곳을 볼 수 있고 이런 것들이 연결되어, 또는 대립되며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아니면 손호철교수가 말하는 추상의 수준이 다른 것이다. 우린 반성적으로 되어야, 되돌아갔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

한국정치학의 새구상

한국정치학의 새구상


- 차례
001. <1> 국가론
002. 국가자율성 개념의 과학적 이해
003. '공장법' 분석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국가론
004. '계급지배의 도구'로서의 국가와 '도구주의적' 국가
005. '총자본'으로서의 국가와 '자본분파'로서의 국가
006. 국가자율성, 국가능력, 국가강도, 국가경도

007. <2> 한국정치
008. 브루스커밍스와 한국 현대사연구 비판
009. 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 지형
010. 5.16 쿠테타의 재조명
011. 한국 국가성격에 관한 이론적 고찰
012. 자본주의 국가와 토지공개념
013. 신흥공업국의 국제정치경제학
014. 주체사상의 연구방향에 대한 일제안

015. <3> 현대세계체제와 제 3세계
016. 현대세계체제에 대한 체계적 이해
017. 제 3세계와 혁명
018. 제 3세계와 자유민주주의
019. 제 3세계의 분화모형에 대한 비판적 고찰

020. <4> 현대세계체제: 페레스트로이카 그 이후
021. 현대세계체제의 개편과 제 3세계의 미래
022. 페레스트로이카 제 3세계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023. 스탈린주의와 현존사회주의의 개혁
024. 현존사회주의의 위기와 개편1: 정치개혁
025. 현존사회주의의 위기와 개편2: 경제개혁

손호철 -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양통신(현 연합통신) 기자로 일했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오스틴)에서 정치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전남대 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한국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진보학술동인지 이론 대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전국민중연대 공동의장,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민주노총 정치위원회 자문위원장, 한국정치학회 연구이사와 편집이사, 한국국제정치학회 편집이사를 지냈다.
한국복지국가연구회 회장, 진보평론 공동대표, 진보넷 참세상 이사, 참여사회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책으로 <한국정치학의 새 구상>(1991), <전환기의 한국정치>(1993), <해방 50년의 한국정치>(1995, 시사저널 선정 올해의 책), <현대한국정치 ― 이론과 역사>(1997), <신자유주의시대의 한국정치>(1999), <근대와 탈근대의 정치>(2002), <현대한국정치 ― 이론과 역사, 1945-2003> (개정판, 2003), <3김을 넘어서>(1997), <빈 수레의 개혁을 넘어서 ― 손호철 교수의 노무현 정부 1기 주간 브리핑>(2004)이 있다.

1992년 여름방학 때 함자 알라비의 과대성장국가론을 적용하여 해방정국의 국가, 한국에서 국가형성과정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 이때 브루스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손호철의 『한국정치학의 새구상』, 그리고 최장집교수의 『한국현대정치의 구조와 변화』를 여름 내 들고 있었다.
2007/11/10 10:56 2007/11/1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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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부터 <근대세계체제 1, 2, 3>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사놓은지는 몇년 지났는데 계속 이어 끝까지 읽은 적은 없다. 대충 필요한 부분이거나 아니면 관심이 가는 장을 찾아 읽다가 던져놓곤 하였다.

책이 97년에 출간된 것을 보니 군대를 제대하고 산 것 같은데 아마 '생일선물'로 받은 것 같다. 2만원짜리 3권을 한번에 사는 경우는 이럴 때가 아니곤 여간해선 없다. 또 읽고는 싶었어도 꼭 사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드는 것이 아니면 비싸니 '선물로 받아야지'하고 생각하고 뒤로 미뤄둔다. 며칠 전 생일에도 이런 식으로 책을 한권 받았는데, 한권 가격(59,000원, 1200페이지가 넘는다!)이 만만찮아 둘이 함께 사달라고 했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1>이다. 2권은 내년에나 손에 들어오지 않은까?

아케이드 프로젝트 1 (양장합본) - 10점
발터 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새물결

왜 <근대세계체제>를 읽기 시작했지? 방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에 책이 꽂혀 있어서였나. 책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버릇이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쓴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책이 한국어로 출판되기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에 다닐 때,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함께 잦아들고 있었다. 아마 3학년 아니면 4학년(91~92년) 때였나보다. 한참 혼자서 국가론과 사회구성체(사회형성체) 논쟁을 관련 논문들을 읽고 있었다. 그때 한국 사회성격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신식민지'는 개념이 담고있는 의미나 한국에서 전개된 논쟁, 운동의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다시 남아메리카에서 발전한 '종속적'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쪽도 그리 맞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종속적'이라는 개념은 신식민지와 같이 일본과 조선, 미국과 한국 등의 한국가와 다른 한국가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더 낮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국제적인 경제현상은 다자간의 관계이며, 어떤 층위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요즘의 BRICs처럼 당시에 NICs(아시아 신흥공업국)에 대한 논의들이 많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종속적이라는 개념을 국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주도적이지 못한 위치에 있는 일군의 국가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종속적이라는 개념이 마음에 들지않았던 것은 소위 '제국주의' 국가들도 전체/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보면 얼마나 자율적일까 하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운명도 이 체제에 '의존적'이지 않은가? 자신들의 운명이 '종속적' 상태에 있는 국가들에 달려있지 않은가? 이때 한국 자본주의에 '개량의 물적 기반'이 있는가, 없는가의 논쟁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것의 밑에는 한국 자본주의가 일본, 미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다국적 자본)처럼, 수준의 문제이긴 하지만,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것은 파시즘 체제가 아닌 민주적 체제로 이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운명도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 의존적 이라는 말은 민주적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은 새로운 시장(신민지 또는 신식민지에 있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을 통해서만 갖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처음 월러스틴의 책을 이곳 저곳의 논문에서 짜집기하듯 읽었다. 역사적으로 자본의가 태어날 때부터 한 국가가 아닌 '세계경제'를 배경으로 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신식민지, 종속적, 이런 것보다는 공간적 은유인 주변부, 또는 반주변부라는 개념이 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같다.
 
<근대세계체제>는 '1450년 당시에 유럽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등장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체제제는 두 가지 핵심적인 제도, 즉 어느 일정지역 안에 자리잡은 "세계적" 범위의 분업과 관료제적인 국가기구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경제는 세 지역, 반주변부(semiperiphery), 핵심부(core), 주변부(periphery)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나뉜다.'(p.106)고 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나는 월러스틴이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과 어떤 주의, 주장에 헌신하는 것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어떤 주의, 주장에 헌신하지 않는 사회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과학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한다.(p.25)
그리고 "진리는 변화하는데, 그것은 사회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어진 시간에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동시대적이다. 심지어 지나간 것까지도 그렇다. 그리고 현재 안에서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배경, 우리가 받은 훈련, 우리의 개성과 사회적 역할, 그리고 우리가 그 속에서 활동하는 구조화된 압력들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이다."라고 말한다.(p.26)
따라서 "객과성이란, 전체 사회체제의 한 함수이다. 사회체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특정한 종류의 연구활동이 특정 집단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한 그 연구결과는 이 특정 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향될 것이다. 객관성이란, 이러한 활동이 세계체제의 모든 주요 집단에 기반을 둔 사람에 의해서 균형 있게 수행되도록 해주는, 사회적 투자 분배의 벡터이다. 객관성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객관적인 사회과학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이 가까운 장래에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목표는 아니다."(p.27)

이렇게 월러스틴의 이야기를 쓰게된 동기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근 한겨레신문에서 제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특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특집의 내용은 위 '사회구성체 논쟁'의 21세기적 형식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한겨레-지식논쟁
한겨레신문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① 조정환, 왜 제국인가 - 제국주의는 죽었다, 21세기는 지구  제국 시대
   ② 정성진, 왜 제국주의인가 - '지구제국'은 허상이다, 제국주의 되레 격화
   ③ 이진경, 제3의 시각 '과잉제국주의' - 제국주의는 과거형, 지구제국은 미래형

조정환, 정성진, 이진경의 주장을 읽으면서 불현듯 월러스틴이 <근대세계체제>에서 쓴 글이 생각났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독특한 특징은, 경제적 결정은 주로 세계경제를 지향한 반면, 정치적 결정은 주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더 작은 구조들-세계경제 내의 국가들(민족국가, 도시국가, 제국)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제 및 정치의 이중 지향성 또는 "차별성"은 여러 집단들의 자기 정체성에 관한, 즉 집단 이해관계의 합당한 표명에 관한 혼란과 신비화의 근원이다."(p.109)
경제적인 세계화를 기본으로 사태를 판단하는 조정환과 상대적으로 정치적 국가를 중시하는 정성진은 이런 혼란과 신비화의 도정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나는 감성적으로는 여전히 정성진에 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진경의 지적처럼 유럽연합 등을 살펴볼 때, "경제 및 정치의 이중 지향성"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합류하고, 전지구적인 제국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현재 '경향적'으로 이런쪽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성적으로는 이진경을 지지한다.

(요즘은 이진경을 지지하는 판단에 회의가 든다. 경향성이란 말도 여러 가지 잠재성 중에 하나이고, 어떤 조건에서는 다른 것이 나타날 수가 있다. 또 국가라는 물질적 실재가 언제 없어질까? 정성진의 주장에 '감성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지만 감성 자체가 합리적 이성의 기초이기도 하다. 2009.3.20 update)

이진경의 '과잉'제국주의에서 과잉의 의미를 어떻게 볼까? 국가론에서 보면 함자 알라비(맞나?)가 과대성장국가이론을 말하는데, 그때의 '과잉'과 친연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91년 여름 내내 나는 과대성장국가이론을 한국에 적용하여 분석하는 작업을 했었다. 그리고 에세이 한편을 썼는데 언제가 이것도 posting을 하겠다.) 한 국가차원에서 상부구조가 과잉성장한다는 것과 여러 국가들의 연합을 통해서 제국주의가 과잉(성장)하다는 것. 그런데 전자가 그렇게 되기에 필요한 역사적 배경(식민경험이라는)이 있었던 것처럼 후자가 성립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제국주의간의 경쟁, 아니면... 이진경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장기 16세기'의 유럽과 제국 중국을 비교하면서 자본주의의 탄생을 살피는데, 제국이 자본주의 발전을 담보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과거 역사에서의 제국과 조정환의 제국은 어떻게 다른가? 경제와 정치의 분절(이중 지향성)이 경제적 착취구조를 감싸는 이데올로기적(신비화) 기제는 아닌가? 이것이 합치될 때는 계급투쟁에서 피아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고 있다.

여하튼 나는 "진리는 변화하는데, 그것은 사회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어진 시간에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동시대적이다. 심지어 지나간 것까지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월러스틴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사회체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특정한 종류의 연구활동이 특정 집단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한 그 연구결과는 이 특정 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향될 것"이며 이를 정정하기 위해서는 알뛰세르의 말처럼 막대를 반대로 구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대세계체제 1 - 10점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나종일 외 옮김/까치글방
근대세계체제 2 - 10점
중상주의와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 1600-1750년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유재건 외 옮김/까치글방
근대세계체제 3 - 10점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의 두 번째 시대 1730-1840년대
이매뉴얼
2007/09/15 10:17 2007/09/1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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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네 이웃을 비정규직을 사랑하라! (2008.05.21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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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2007년 7월 26일 "비정규직 법을 고치려는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이전보다 노동계에 결코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일단 비정규직법을 안착시키면서 한편으로 악용 사례를 차단할 수 있는 보완 입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랜드그룹의 비정규직 대량해고에 대해서도 "법을 악용하는 사용자의 자질이 문제"라며 '법의 문제'가 아닌 '개별 기업가의 부도덕성'에서 원인을 찾았다. (한겨레신문, 2007.7.27, 13면)

법 자체가 이런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법을 악용하는 사용자의 자질"과 "개별 기업가의 부도덕성"만을 문제삼아야 할까? 정치체가 아닌 기업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노동자들)이 법 아래서 자유롭다는 것은 개별기업가의 선의를 통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닌 법 아래서 모두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기업가의 선의를 통해야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이 법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닌 기업가에게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를 유지하려면 (기업가, 전제군주, 또는 독재자의) 임의적 자유재량권의 요소가 없는 정치 체제하에서 살아야 하며 시민권이 국가의 지배자, 지배 집단, 혹은 또 다른 권력자의 선의에 의존해야만 하는 가능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입법의 유일한 권력이 인민 혹은 그들이 신임하는 대표들에게 있는, 그리고 정치체의 모든 개별적 구성원들이-지배자와 시민 다 함께-그들이 자신에게 부과한 그 어떤 법에도 평등하게 복종하는 체제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치 정부 체제하에서 살아야만 지배자들의 강압적 임의 재량권을 박탈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시민들을 지배자의 선의에 의존하게 해 노예의 지위로 전락시킬 수 있는 그 어떤 폭군의 등장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주의, 푸른역사, 2007>

more..

한국노총 위원장의 주장은 결국 "어떤 법에도 평등하게 복종하는 체제"가 아닌 '기업가들의 강압적 임의재량권',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을 기업가의 선의에 의존하게 해 노예의 지위로 전락'시키려는 것 아닌가? 자유, 법 앞에서의 자유는 정치체만이 아닌 모든 권력에 대한 제한을
요구한다.
2007/07/28 15:43 2007/07/2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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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 8점
켄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푸른역사

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만들어진 자유주의 개념은 아주 "공화주의"적이다. "인간 개개인의 육체가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혹은 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처럼, 국민과 국가의 조직체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원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 의지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데 제약받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것이다, 자유국가란 자유로운 인격체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가라는 뜻이다. 즉 자유국가란 정치의 행위가 하나의 전체로서의 그 구성원들의 의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p.81)"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자유주의는 "사적 개인으로서 침해받을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17세기 영국혁명을 전후로 형성된 자유주의 개념은 "순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타인의 혹은 외부의 간섭이 없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며, "정치 제도와도 상관없이 어떤 체제하에서도 느릴 수 있는 것"이라는 현재의 개념이 아니었다. 현재 사용되는 이런 의미의 자유는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는 자유인 못지않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7세기 공화주의적인 자유주의 개념을 기준으로 현재, 또는 과거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많은 문제들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 국주의의 식민지배를 한국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해서 엄격하게 한국민은 모두 노예상태였으며, 주인(일본)의 시혜없이는 자신의 의지대로는 무엇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아닌 자유주의적인 시각으로도.

60~80년대의 군부정치에 대해서도 똑같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단 전제군주와 같이 한사람만 자유로운 체제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독재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국민들이 '인자한' 주인을 만난 노예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의 발전과 같은 경제성장 논리, 현재의 신자유주의를 공화주의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반대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부르조아 정치학 비판"을 통해 비판적인 국가이론을 정립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영국 유학을 생각한적이 있다. 그리고 계급이 없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모든 개인이 자유로운 사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단순하게 진행된 논리, 생각은 아니지만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이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공화국"은 궁극적으로 계급이 사멸한 국가이다. 왜냐하면 의지의 자유를 제약하는 조건들의 제거를 숙고하는 곳에는 경제적 지배관계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개인의 재산행사의 자유, 사적자유의 영역이 아닌 '의지의 자유'로 읽을 때, 이런 개인들의 의지의 자유로운 발현을 제약하는 사회경제적인 권력구조가 존재할 때 그것 자체가 노예상태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때, 현재의 자유를 포장하고 있는 형식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로 변화될 수 있게된다.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형식성을 탈피한 실질적인 경제적 민주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17세기의 혁명적인 자유주의 이론이 현재의 미국독립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기반한 자유주의!



2007/07/21 00:51 2007/07/21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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